4편. 김대중 납치살해기도 사건과 박정희
1973년 8월 14일,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메가톤급 뉴스가 터져 나왔다.
"金大中씨 서울自宅에 내려다놔" - 동아일보-
사건발생 일주일전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 19분 6명이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 2212호에서 양일동을 만나고 나오는
김대중을 납치해 2210호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곤 마취제로 기절시킨뒤 오사카 오카모토 빌딩 302호 총영사관 숙소로 알려진 중정안가로 옮김.
코만 남기고 포장용 테이프로 얼굴 전부를 포장하고 9일 새벽 1시쯤 "용금호" 선창 밑 타기실에 감금한다.
납치실행 총책 윤진원
같은시각 전 유엔 부대표 임창영
"헨더슨 씨, 한국의 김대중씨가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아마 중정의 짓 같은데 미국 정부쪽에 구명 전화 좀 부탁합니다."
1950년대 주한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
"알겠습니다. 코헨교수에게 연락해보겠습니다."
미 대통령 특보 헨리 키신저
"예? 김대중씨가 납치를 당해요?"
코헨교수
"그렇습니다. KCIA 소행이랍니다. 죽이지 못하게 연락을 취해주십시오."
남산중앙정보부 이후락
"그레그 지부장이 전화를????"
CIA 그레그 지부장
"경고합니다. 김대중씨를 죽여서는 안됩니다."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
"박 대통령 각하! 김대중씨를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후락과 박정희는 도둑질하다 들킨 쥐섹휘처럼 화들짝 놀라며 말문이 막힌다.
9일 오전 8시 45분 오사카항 출발, 12일 오전 7시 부산부두 진입. 구급차로 위장한 수송차량에
태워 서울의 중정안가에 감금. 13일 밤 납치 129시간만에 동교동 집앞에서 풀어준다.
집으로 돌아온 김대중. 도쿄에서 납치된지 만 5일9시간. 유신 쿠데타 직전인 1972년 10월11일
의문의 교통사고 신병 치료차 일본에 간 지 10개월 만의 귀환이였다.
상기 내용이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외국땅에서 자행된 "김대중 납치살해기도 사건"의 과정이다.
일본 경찰청의 조사 결과 한국 정부가 개입되었음이 드러났으나 정부가 이를 완강히 부인해
한.일 외교가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김대중 납치살해기도 사건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파멸의 궁지로 몰리게 된다.
사건발생 보름 뒤인 8월 28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공동위원장 김영주
"김대중 납치사건의 총지휘자인 이후락 같은 깡패, 불한당과는 더 이상 국사를 논할 수가 없습네다."
이후락
"중정은 납치 사건과 무관하므로 북은 생떼 쓰지 말라. 내 부하는 한 사람도 개입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개입했으면 내가 전부 책임지겠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 간 최초로 대화가 시작된 지 1년 1개월만에 남북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9월 5일 일본 법무대신 다나카
"김대중 씨는 자유의사로 귀국한 게 아니고 납치당한 것이다. 사건 발생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한국은 원상복구부터 하라"
김대중 납치사건은 침묵의 바다에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1973년 10월2일 서울 문리대
"정보정치 중지하라~!! 파쇼통치 웬말이냐!!
김대중씨 납치 진상을 밝혀라~!!
기본권 보장하는 민주체제 확립하라"
대학가에 드디어 반유신의 불길이 타올랐다.
10.2 서울대 시위는 반독재 투쟁의 기폭제였다. 전국 대학에서는 동맹휴학, 수업거부, 시험거부가
터져 나왔고 언론계에선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종교계와 교육계에서는 유신비판 성명서가
터져 나왔다. 재야인사들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동참했다.
김종필 국무총리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못한다. 이를 어기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는
엄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처벌 협박을 받은 뒤 12월 24일 서울 YMCA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 30여 명.
"성명서!!!
...우리는 오늘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이에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를 선포한다.
"이 시간부터 유신헌법을 반대, 부정, 비방하거나 개헌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하고 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쳐한다."
후덜덜..ㅜㅜ
1974년 8월 22일 김대중의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김영삼(47살)이 "선명 야당"의 깃발을 들고
신민당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사쿠라"라는 별칭까지 붙었던 유진산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박정희의 집요한 낙선공작에도 불구하고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야당 사상 최연소
총재로 탄생한 것이다.
(흐름상 김영삼도 빼놓을 수 없는데 중요사항 아니면 언급을 자제하겠습니다..토나오니까요.
나중에 전두환이 부각될때...."우리가 남이가"로...전두환이를 두둔하죠..바로 김대중앞에서.)
1975년 1월 초 김종필과 박정희는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을 모색하던중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투표"로 찬.반을 묻기로 결정한다..왜냐면 투표야...백전백승 할수있으니까....
동교동 김대중
"나는 국민투표에 단호히 반대한다! 투표의 형식을 빌려 개헌 열기에 찬물을 끼엊으려는 음모에 불과하다"
샌프란시스코 김영삼
"인마들이 내 미일순방 출국 공백기를 노리고 국민투표를 하는기다. 국민투표를 시도하는 것은 기만적
정치쇼다. 귀국하는 대로 신민당의 당력을 집결해 국민투표 거부운동을벌이겠다."
그러나 1975년 1월 2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공고됩니다. 20일 뒤인 2월 12일
박정희
"나는 국민의 반대가 많아 투표에서 지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결국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개표결과 투표율 78.8퍼센트 찬성 73.11퍼센트로 가결된다.
야당은 투표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국민투표는 무효임을 다시 확인하며 개헌투쟁을 벌이기로 다짐한다.
박정희, 일기장을 꺼내어 만년필로 쓴다.(1975년 2월 13일)
"신은 나에게 또 다시 중책을 맡기시다. 신명을 다해 중책완수에 헌신할 것을 서약하다."
(일왕에게 충성맹세한것이 오버랩되네요...ㅜㅜ)
1975년 5월 13일 결국 박정희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유언비어나 학생들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한 한 경우
영장없이 체포하고 1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
긴급조치 9호.....이제까지 나온 긴급조치를 집대성한 내용이였다.
1979년 12월 8일 해제되기까지 무려 4년 6개월 27일 동안 1,000여 명이투옥되었다.
이 기간은 민주주의 암흑기로
"전 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라는
ㅇㅇㅁ^,.^
슨상은 해외에서 개지랄 . 한국 이미지 개판
미국이나 일본에서 그 찐따짓
원조액 가지고 장난질 치라고 지랄에. 각종 언론 붙잡고
독재자 나라 한국이란 개소리해서 교민들 얼굴을 못들게 만들고
지가 무슨 망명정부 수반도 아니고
니가왜 이야길 하냐고 왜
ㅇㅇㅁ^,.^
대선까지 나왔던 인간이 할 짓이야??
글고 맨날 친일파 타령하며 박통 까면서 일본 힘 빌려
정권 압박하는걸 어찌 그리 간단하게 생각하냐
ㅇㅇㅁ^,.^
간단한 영문 토론에 응할 맘이 없어부러??
앙망 개대중이 부관참시를 해도 성이 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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