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메이커가 스포츠카를 만든다는 건 화룡점정의 의미다. 기능, 경제성, 가격 등 까다로운 고객들의 요구를 수용해 만들어지는 차가 세단, SUV, 미니밴 등이라면 스포츠카는 궁극적으로 성능과 달리는 즐거움에 포커스를 맞추는 분명한 성격의 차이기 때문이다.
스포츠카는 보기에 멋있으나 시장은 작다. 많이 팔리는 차가 아니다. 스포츠카만 생산하는 메이커들이 가난한 이유다. 부가티, 람보르기니, 페라리 등 값비싼 초호화 스포츠카를 만드는 회사들이 얼마나 많은 부침을 겪었는 지가 이를 말해준다. 반대로 소형 세단에서부터 럭셔리 SUV까지 모든 차종을 파는 회사가 스포츠카를 만든다는 건 튼튼한 반석 위에 지붕 하나 올리는 셈이다. 스포츠카를 많이 팔아 돈을 벌겠다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스포츠카를 보여줌으써 라인업에 궁극적인 마침표를 찍는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한국차메이커들이 세계로 도약하고는 있으나 제대로 된 마침표 하나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벤츠는 이미 50년 전에 멋진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바로 SL이다.
2도어 하드톱 컨버터블 SL500을 시승했다.
▲디자인
잘 나가는 스포츠카들의 특징은 지면과 가깝다는 것이다. 네 바퀴를 쫙 뻗어 도로에 딱 달라붙은 모습이 한눈에 봐도 뭔가 다른 아우라를 풍긴다. 당연히 차 높이는 낮다. 키는 작고 옆으로 쫙 퍼진 모습. 사람이라면 참 안쓰러운 체형이지만 자동차에서는 잘 달리기 위한 최적의 형태다. SL500이 그렇다. 딱 벌어진 차체가 바닥에 달라붙은 모습. 옆에서 봐도 늘씬한 몸매는 보는 사람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운전석의 위치는 휠베이스를 3등분했을 때 앞에서 3분의 2 지점이다. 차의 중앙보다 뒤쪽으로 드라이버가 자리하면 운전할 때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 펀투 드라이브의 한 요소가 된다. 긴 코. 옆에서 보면 부담스러울 만큼 보닛 라인이 길다.
보닛을 열면 8기통 5.4ℓ 엔진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낸다. 차의 공간배치가 사람보다 엔진을 더 위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엔진룸이 넓다. 이 큰 차에 사람을 위한 공간은 좁아서 달랑 두 사람만 탈 수 있다. 나머지 공간은 오로지 차를 이루는 기계들을 위해 배려했다. 앞에는 넓은 엔진룸이 있고, 뒤로는 지붕을 접어 넣는 공간이 트렁크룸을 나눠 쓰고 있다.
사람이 주인이라기보다 차와 사람이 동격인 디자인이다. 두 사람만 탈 수 있는 실내는 고급스럽게, 역시 벤츠임을 느끼게 만들었다. 계기판의 은색 게이지에 시선이 멈추는 순간 마음이 놓이는 건 은색 게이지가 이 차가 벤츠임을 말해주고 있어서다. 운전석에 들어가 앉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차와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사소한 불편쯤은 기꺼이 감수하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성능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붙잡으면 차의 숨소리가 들린다. 운전대를 잡은 손으로, 좌석에 붙은 엉덩이와 등으로, 가속 페달을 밟은 발로 차와의 교감이 시작된다. 아무 차에서나 느낄 수 없는 SL과의 특별한 교감이다.
지붕을 열고 가속 페달을 밟으면 우렁찬 엔진소리에 놀랄 지 모른다. 오감을 열고 느껴야 하는 게 스포츠카의 맛이다.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즐겁다.
직선주행은 말할 것 없이 안정적이다. 엔진이 호흡을 빨리하면 드라이버의 심박수도 올라간다. 차와 느껴 보는 오랜만의 일체감, 짜릿했다.
이 차의 압권은 코너링. 타이어를 좌우로 넓게 배치해 안정감을 높인 구조여서 한계속도가 높다. 게다가 서스펜션은 보통 단단한 게 아니다. 최저지상고가 낮아 세단보다 노면과 가깝지만 단단한 서스펜션이 노면과의 좁은 공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좌우로 돌며 치고 빠지는 맛이 여간아니다. 차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운전자라면 이 차와의 만남이 무척 즐거울 수밖에 없다.
시외로 빠져나가 속도를 제대로 올렸다. 시트에 푹 파묻히는 느낌인 데다 차창을 올리면 지붕만 열렸을 뿐 좌우는 유리벽이 쳐진다. 고속주행 시 발생하는 뒷바람도 크게 염려할 수준은 아니다.
180km/h는 무시로 드나들고, 200km/h 이상의 속도도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오픈 드라이빙의 묘미는 80~100km/h 를 넘지 않는 속도에서 차창 바깥과 하나됨을 느끼며 달리는 것이다. 차 안인 지 바깥인 지 구분이 없는 상태. 이를 즐기며 여유있는 움직임으로 차를 다루는 게 오픈 드라이빙에서는 훨씬 더 어울린다. 그 속도에서 SL500은 우아하고 여유있는 움직임으로 운전자와의 신뢰를 쌓는다.
388마력. 이 정도 힘이 왜 필요할 지는 묻지 말자. 스포츠카 아닌가. 5.4초만에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를 넘는다. 스포츠카가 이 정도는 돼야지.
7단 G트로닉스는 차를 좀더 부드럽게 만든다. 거친 스포츠카의 야성미보다 부드럽지만 충분히 강한 벤츠 특유의 힘을 만들어낸다. 운전대에 붙은 패들 시프트는 지루할 때 재미를 돋구는 요소가 된다.
잘 달리는 만큼 서는 게 중요한 건 당연지사. 전자유압식 제동 시스템인 센서트로닉 브레이크 컨트롤이 장착돼 있어 제동력이 좋다.
액티브 보디 컨트롤 플러스라는 장치도 있다. 주행조건에 따라 즉각 차체의 서스펜션을 변화시켜준다. 고속주행 시 차 높이가 단계적으로 최대 15mm까지 낮아진다. 눈길이나 빗길 등 도로상태가 안좋으면 2단계에 걸쳐 25mm씩 최대 50mm까지 차체를 높일 수도 있다. 똑똑한 차다.
지붕 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16초. 지붕을 닫고 쿠페로 달리는 맛도 괜찮다.
▲경제성
SL500의 가격은 1억9,830만원. 2억원짜리 2인승차. 호화로움의 극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조금 과한 건 아닌지 모르지만 그 판단은 실제 차값을 내고 이 차를 살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다. 그 정도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는 지 솔직히 모르겠다. 이 정도 차를 사는 사람이라면 차 자체보다 벤츠 SL이라는 브랜드에 기꺼이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런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지 않는 연비는 7.7km/ℓ.
시승 / 오종훈 기자 ojh@autotimes.co.kr
사진 / 권윤경 기자 kwon@autotimes.co.kr
2006-11-27 0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