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보배 밀리터리 게시판을 이용하는 누리꾼들 중에 용산구에 자리한 효창공원에 가 본 사람이 있는가?? 그곳에는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의 삼의사 묘와 임시정부요인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다들 알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정말 효창원이라는 이름에서 효창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만큼의 민족과 독립운동가들의 恨이 서린 곳이다.
원래, 효창공원은 조선 후기의 왕이었던 정조가 아들 문효세자가 갑자기 독살 당하자 궁궐에서 가까우면서도 길지인 효창원에 아들을 묻어두었던데서 그 역사가 출발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넘들은 이곳 일부를 ‘효창공원’으로 만들어버리고, 문효세자의 묘와 의빈성씨의 묘를 서삼능으로 옮겨버렸지. 그렇지만 일찍히 이 자리를 주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었다. 백범은 일찍이 지관이 되고자 풍수를 배웠던 탓에 효창원을 보고 한 눈에 그곳이 길지임을 알아보았고 해방 직후인 1946년 6월 30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를 고국 땅으로 모신 다음 문효세자의 옛 무덤 터에 국민장으로 안장했다. 당시에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모셔올 수가 없어서 삼의사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두었다. 1948년에는 중국에서 순국한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도 의빈성씨 묘자리에 안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범 자신은 1949년에 암살 된 후 효창공원 북쪽 능선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 첫번째가 바로 이승만정권이요, 그 두 번째가 박정희정권이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친일파들과 손잡고 정권쟁탈에만 급급하던 이승만정권은 민족의 영웅 김구를 제거한 후에도 민족의 독립정신이 꺼지지 않음을 보고 그 정신을 억누르고자 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려고 추진했다. 그러나 시민들과 유족들의 반대가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승만정권은 독립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묘역을 놀이터화 하기로 작정하였다. 김창룡의 주도로 동물원을 만드는 계획이 준비되었는데 김창룡이 갑작스럽게 암살당하게 됨으로써 잠시 주춤해졌지만 결국 이승만정권은 아시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독립운동가들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반민족정권의 독립정신 훼손 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만주에서 일본군 소위로써 독립군 잡는데 앞장섰던 자신의 친일 행적에 가장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라고 여기던 박정희정권은 다시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을 눈에 안 띄게 저 멀리 서오릉으로 옮기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시민과 유족들의 반대가 심하여 무산되자 이번에는 독립운동가 묘역 주변을 훼손하여 민족정기와 독립정신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바로 육영수경로송덕비이고 이것은 사적지 내에 만들 수 없는 시설물이다. 박정희정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원효대사동상, 어린이 놀이터, 배드민턴장 등 독립운동가 묘역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시설물들을 잔뜩 만들어 놓아 여기가 독립유적지라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오히려 친일파 및 반민족행위자들과 반민주인사들이 좋은 터를 다 차지하여 묻혀 있는 국립묘지에 비하여 순도 100%의 민족정신이 유지되고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해방이후 제대로 된 친일청산 작업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이런 성스러운 곳조차 제멋대로 왜곡되고 조작되어 백범 김구선생이 의도했던 본질적인 것들이 우리 기억속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도 못한채 은폐되고 묻혀 버렸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볼때마다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고 깊은 한숨이 토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정의는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만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