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1일 러시아의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베슬란(Beslan). '지식의 날'이라고 불리는 9월 1일은 러시아에서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로, 대게 학부모들이 학생들과 동반하여 학교를 찾는다. 이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경찰서 바로 옆에 위치한 제1공립학교의 학생 수는 약 800명, 교사는 60여 명이었지만, 이날은 새 학년의 시작을 맞이하여 무려 1,200여 명이나 되는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로 몰려들었다.
한편 같은 날 아침, 인근의 잉구셰티야(Ingushetia) 공화국의 프슈타크(Psedakh)에서는 한 무리의 무장세력이 산악의 기지를 출발했다. 이들은 목적지인 베슬란으로 향하면서 잉구셰티야 경찰 술탄 구라체프(Sultan Gurazhev)를 납치하여 북오세티야의 쿠리카우(Khurikau) 마을까지 다달았다. 이후 구라체프는 테러범들로부터 도주하여 인근 경찰에게 자신의 권총과 배지를 도난당했음을 알렸다.
학교에 난입한 테러범들
현지시각 09시 10분, 군복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쓴 테러범들이 제1공립학교로 들이닥쳤다. 이들은 훔친 경찰용 GAZ 밴 트럭과 GAZ-66 트럭에 탑승하고 학교로 들어섰다. 학교에 있던 사람들은 러시아 군부대가 훈련을 위해 학교로 진입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소총을 난사하면서 건물 안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자, 이내 이들이 러시아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최초의 점거과정에서 50여 명의 인질이 학교로부터 도망쳐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음을 당국에 신고했다. 몇몇 사람은 테러범들의 눈을 피해 학교의 보일러실에 숨기도 했다. 학교에 지원을 나왔던 경찰관 2명이 테러범들과 총격전을 벌여 그중 1명을 사살했지만, 수도 많고 우세한 화력을 갖춘 테러범들에게 곧 사살당했다. 학교 건물과 1,200여 명에 이르는 인질은 순식간에 테러범들 수중에 들어갔다. 최초의 총격에서 사망자 8명, 부상자 12명이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인질을 너비 10미터, 길이 25미터의 학교 체육관으로 집결시켰다. 테러범들은 인질로부터 휴대전화를 모두 압수했으며, 할 말이 있을 경우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그럼에도 인질 중 몇 명이 오세티야어를 사용하자 테러범은 본보기로 한 사람을 사살했다. 또한 무릎을 꿇으라는 테러범의 요구를 거부한 학부모 한 사람도 곧바로 처형되었다. 테러범들은 피범벅이 된 시신을 체육관 밖으로 끌어냈다
제1공립학교의 대치상황도.학교 측이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어 러시아 특수부대는 쉽사리 인질 구출작전을 시작할 수 없었다.
잔인한 인질 제압
인질들을 모두 집합시킨 테러범들은 교사나 학교 직원, 학부모 가운데 힘이 세 보이는 남자들을 20여 명 골라냈다. 테러범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질들을 별도로 추려낸 것이다. 그리고는 이들을 체육관 2층의 식당으로 끌고 갔다.
얼마 후 커다란 폭음이 2층 식당에서 들려왔다. 인질들을 끌고 간 테러범이 몸에 두르고 있던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테러범들 중 몇몇이 아이들을 인질로 잡는 것에 반대하자 테러범 리더가 이들을 선별한 인질들과 함께 떨어진 장소로 보낸 후 원격스위치로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이 폭발로 여성 테러범 2명과 다수의 인질이 죽고, 남자 테러범 1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폭발에서 살아남은 인질들에게 확인 사살을 가해, 운 좋게 발각되지 않은 1명을 빼고 전원이 사망했다.
테러범들은 다른 인질들에게 시체를 건물 밖으로 버리고 바닥의 피를 닦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인질 1명이 도주했으며, 당국은 그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듣게 되었다. 한편 폭발과 확인사살에서도 살아남은 인질은 다시 체육관으로 끌려갔다.
왜 하필 베슬란의 학교가 테러의 대상이 되었을까? 베슬란의 제1공립학교는 1992년 오세티야-잉구셰티야 분쟁 때 오세티야 민병대가 잉구셰티야 시민들을 수용했던 장소였다. 또한 베슬란은 1994년 체첸 분쟁 당시 러시아 공군의 주요한 발진기지였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학교가 테러의 대상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FSB 예하 알파 부대원의 모습.테러사건이 발생하자 러시아 최고의 특수부대가 베슬란으로 집결했다.
【CC BY-SA】 Dmitry Beliakov
테러에 취약한 당국의 대응
사건이 발생하자 곧 학교 주변에는 차단선이 구축되었고 러시아의 최정예인 FSB 소속 알파와 빔펠(Vympel), 그리고 내무부 소속의 오몬(OMON) 등 여러 특수부대가 배치되었다. 학교의 주변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모든 주민을 소개하고, 대신 특수부대를 배치했다. 차단선은 학교로부터 약 230미터로 설정되었는데, 이는 테러범이 보유한 유탄발사기의 사거리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준비는 여전히 허술하여 폭탄테러의 위험이 있음에도 주변에 소방차를 대기시켜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002년 모스크바 극장 테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구급차도 충분히 대기하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 최악의 상황은 바로 오세티야 민병대였다. 북오세티야 공화국은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지역으로, 인질의 친지들이 하나둘씩 총을 들고 사건현장 주변에 몰려들었는데 그 수가 무려 5,000여 명에 이르렀다. 경찰은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한편 인질극의 현장인 체육관 내부에는 테러범들이 한바탕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사제 급조폭발물(Improvised Explosive Device; IED)과 인계철선1)을 건물 전체에 설치했다. 또한 테러범 1명이 사망하면 인질 50명을, 테러범 1명이 부상하면 인질 20명을 사살하겠다고 협박하고, 특공대가 진입할 경우 건물을 폭파하겠다고 공표했다. 한편 2002년처럼 수면가스 공격에 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체육관의 유리창을 모두 부수었다. 테러범들은 모스크바 극장 테러 때의 범인들보다 더욱 조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북오세티야 대통령 알렉산드르 자소호프(Aleksandr Dzasokhov)는 현장에 도착하여 테러범들과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연방보안국(FSB)은 자소호프를 배제하고 위기대책본부를 세웠다. 한편 러시아는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인질의 무조건적인 석방"을 의결했으며, 미국의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형태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계속되는 인질극
이튿날이 되도록 인질석방을 위한 협상은 정체되고 있었다. 테러범들은 인질들에게 물과 음식 및 의료지원을 허락하지 않았고, 학교 앞쪽에 쌓인 시신을 치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FSB 부국장인 프로니체프 장군과 자소호프 북오세티야 대통령은 회동을 갖고, 북오세티야의 FSB 지국장인 발레리 안드레예프(Valery Andreyev) 장군을 현장지휘관으로 임명하기로 동의했다. 이로써 러시아 연방정부는 사태를 직접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정부는 사태를 감추기에 바빴다. 최초의 정부성명에서 인질의 수를 354명으로 축소해서 발표했으며, 푸틴 대통령을 포함하여 러시아의 어떤 정치지도자도 인질극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겨우 이튿날이 되어서야 푸틴 대통령이 인질의 구출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간단한 성명을 발표했을 뿐이다.
정오가 되자 테러범들은 잉구셰티야 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루슬란 아우셰프(Ruslan Aushev)를 학교 내로 들어오게 하여 협상을 재개했으며, 인질 26명을 석방했다. 이와 함께 테러범들은 아우셰프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와 서신을 전달했다. 체첸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Shamil Basayev) 명의로 된 이 서신에서 테러범들은 체첸 공화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한편 음식과 물이 공급되지 않자 인질로 잡힌 어린이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갈증과 허기, 체육관 내의 뜨거운 공기로 인하여 대부분은 정신이 몽롱해졌고, 몇몇은 기절하기까지 했다. 이튿날 저녁이 되자 어른들까지도 체력이 고갈되어 정신을 잃고 말았다.
15시 30분경에는 테러범들이 유탄발사기 2발을 발사하여 경찰차가 불타고 경찰관 1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대응사격을 자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면부족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테러범들은 신경질적이면서도 예측불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질극이 사흘째에 이르자 다양한 협상시도가 재개되었다. 최후에는 대통령 자문이자 경찰관료였던 체첸 출신의 아슬람벡 아슬라하노프(Aslambek Aslakhanov) 장군이 아이들을 대신하여 인질이 되기를 자원한 러시아 사회지도층 700여 명의 명단을 가지고 테러범과 협상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가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폭발
인질극 사흘째인 2004년 9월 3일 13시경, 4명의 비상관리국 소속 구급대원이 구급차 2대로 학교 운동장에 버려진 시체 20구를 치우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3시 03분경, 구급대원들이 학교로 다가가자 체육관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그리고는 테러범들은 구급대원에게 사격을 가하여 2명을 사살했다.
총격이 발생한 지 약 22초 뒤에 두 번째로 폭발이 일어났다. 이후 13시 05분경에 체육관 지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곧바로 불길은 인질들이 있는 아래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폭발은 테러범의 실수에 의한 것이라고 러시아 측은 밝히고 있다. 이 폭발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음모이론이 많지만, 공식발표에 따르면 여자 테러범이 실수로 폭탄을 터뜨리면서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구출작전 개시
한편 폭발로 체육관의 벽에 구멍이 뚫리자, 인질 14명이 도망쳐 나왔다. 이와 함께 지역민병대가 테러범을 향해 총격을 시작하자, 테러범도 이내 반격을 가했다. 이렇게 현장이 아수라장으로 바뀌자 러시아군의 특수부대는 진입을 시작했다.
특수부대의 진입으로 현장은 전장으로 바뀌었다. FSB 소속 특수부대와 러시아 육군, 러시아 내무부 산하 경찰부대, 러시아 제58군 소속의 전차와 BTR-80 차륜장갑차, Mi-24 공격헬리콥터까지 다양한 화력이 투입되었다.
현장은 섬세한 고도의 인질 구출작전이라기보다는 대규모 군사작전에 가까웠다. 여기에 허술한 군과 경찰의 차단선을 뚫고 수많은 지역시민까지 자신의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몇몇 병사는 전투현장에서 도주했고, 베슬란 경찰당국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계속되는 총격전 가운데 특수부대는 인질들을 체육관으로부터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속된 허기와 갈증으로 인하여 어린이들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수부대원들이 아이들을 안거나 업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처참한 전쟁터
교전이 시작된 지 2시간이 지난 15시경, 러시아군은 학교를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교전은 저녁 때까지 계속되어, 테러범들은 건물 지하에서 격렬히 저항을 계속했다. 테러범 13명은 군의 포위망을 뚫고 인근의 다른 건물로 피신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전차와 로켓을 동원하여 테러범들을 몰살했다.
특수부대가 배치된 위치에서 RPO-A 쉬멜(Shmel) 대전차로켓이 학교 방면으로 발사되기까지 했다. RPG-26 로켓도 발사되었다. 물론 테러범도 로켓탄으로 구출부대에 대항했다.
러시아군의 BTR 장갑차로부터는 14.5×114㎜ KPVT 중기관총이 발사되었고, T-72 전차 2대는 125㎜ 전차포를 몇 발이나 발사했다. 이쯤에 이르면 인질 구출작전과는 전혀 다른 무차별한 공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최초의 폭발로 인해 곧바로 체육관 내부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무려 2시간이 지나도록 소방차는 현장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최초로 도착한 소방차에는 물이 부족하여 불길을 잡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지붕이 주저앉으면서 약 160명의 인질이 사망했다. 그나마 구출된 인질 가운데 부상자가 700명이 넘었지만, 구급차는 몇 대에 불과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
구출작전이 끝나고 나온 결과는 처참했다. 공식발표에 따르면 약 1,200명의 인질 가운데 334명이 사망했으며, 그중 156명이 어린이였다. 부상자의 수는 무려 783명에 이르렀다. 특수부대 측 사상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최정예로 유명한 알파 부대원 7명과 빔펠 부대원 9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슬란 인질극을 실행한 테러범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 가운데 31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생포되었으며, 일부는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으로 러시아는 테러에 취약한 국가공안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연방의 주요 도시는 대테러 보안대책을 뒤늦게나마 정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모스크바 극장 테러를 통해서 배운 교훈을 2년이 넘도록 실행하지 못했기에,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아무리 우수한 특수부대라 할지라도 대응절차를 확립하고 지휘통제계통을 구축하지 않는 한, 작전은 실패로 이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베슬란 인질 구출작전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베슬란 제1공립학교 인질사건 희생자 사진.인질 중 사망자는 334명에 달하고, 그중 156명은 어린이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이 사건이 러시아의 강경진압으로 욕을 많이 먹는데...
애초에 테러리스트들이 폭탄도 다 설치해 놓고
러시아의 수면가스 공격에도 대비하기 위해 창문을 다 깨버림;;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보다 더 치밀하고 계획적이라 볼수 있음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자녀들의 부모나 다른 민간인들이
테러리스트 때려잡자고 집에서 총들고 나온상황
그야말로 개 난장판...
결국 이런 강경진압;;;
탱크는 좀 아니라고 본다.
어찌보면 체첸 분쟁이라는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일때문에
죄없는 어린이들이 피해를본 끔찍한 사건이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