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만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광고 촬영 스튜디오. 오전 9시 정각에 보디아노바가 나타났다. 호텔에서 가볍게 샤워를 마친 그의 머리카락은 아직 물기가 촉촉했다. 화장기 하나 없었지만 그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뿌리 쪽에 짙은 갈색을 품고 있는 환한 금발. 맑고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초신성 수퍼모델은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스튜디오 한쪽에 간단하게 차려진 뷔페 코너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이것저것 접시에 옮겨 담더니 편안한 소파를 찾아 앉는다. 온갖 명품 브랜드가 탐을 내는 수퍼모델의 아침 식단은 어떨까. 커피 1잔, 스크램블드 에그와 베이글 1개, 과일 몇 점과 요거트. 적지 않은 양이다. 복스럽고 씩씩하게 아침밥을 다 먹은 후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특별히 먹을 걸 가리지는 않아요. 뭐든 잘 먹으려고 노력하죠. 물론 피하는 게 있긴 해요. 튀긴 음식요. 먹고 싶지 않냐고요? 별로. 튀긴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내 몸에 좋지 않아서 ‘먹지 않는’ 건데 왜 ‘못 먹는다’고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다이어트를 위해 특별히 짠 식단은 없다고 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양껏 먹어요. 특히 아침은. 그리고 균형을 생각하죠. 아침에 단백질보다 탄수화물을 많이 먹은 듯 싶으면 점심엔 단백질을 더 챙겨 먹죠. 무엇보다 골고루 먹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분이건 소금이건 지방(물론 좋은 지방요)이건 말이죠.” 분명하면서도 낙천적인 대답이다. “낙천적인 성격, 맞아요.” 대답을 하던 그가 남자 아이처럼 ‘푸푸’ 소리를 내며 해맑게 웃었다.
‘뭐든 잘 먹는다’는 그의 대답이 수퍼모델이 흔히 말하는 ‘전 원래 몸매가 좋아요’라는 가식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마른 체질이다(키 176cm). 첫 아이를 임신하고 7개월이 될 때까지 패션쇼 무대에 섰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임신한 것을 크게 의식하지 못했다. 셋째 아이를 낳고는 몇 주 뒤 바로 파리 컬렉션 무대에 올랐다. “아이를 낳고서도 특별히 임신 전 몸매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 것은 없어요. 그냥 열심히 일을 해서 그런가? 오히려 임신 중에 아이 무게를 빼고 실제 체중은 더 줄었어요.” 그에겐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인 수퍼모델! 실제로 그는 모델로 왕성하게 활동하며 세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1999년 데뷔한 이래로 늘 모델 중 최고 대우를 받아왔다.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이 아니면 등장하기 힘든 미국 패션전문잡지 ‘보그’의 표지모델로 등장한 것만 네 번이다. 요즘은 지젤 번천, 나오미 캠벨처럼 표지를 장식하는 수퍼모델이 별로 없다. 그래서 최근 보그의 표지 모델은 주로 영화배우 등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12개 표지 모델 중 유일한 패션모델이었다. 한 번쯤은 마주쳤을 수많은 광고 속에서도 보디아노바를 발견할 수 있다. 샤넬(색조 화장품), 루이뷔통, 마크 제이콥스, 베르사체, 구찌 패션과 향수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 광고에서 그는 팔색조 같은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인터뷰 촬영장에는 목선이 깊이 파인 연한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잔주름이 조금씩 잡힌 풍성한 실루엣이 편안해 보였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 ‘아줌마’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앳돼 보인다. 원피스는 스페인 브랜드 ‘호스(hoss)’의 것이고, 굽 낮은 구두는 프랑스 브랜드 클로에 것을 신었다. “평소 여러 아이템을 섞어 편하게 입는 걸 좋아해요. 지방시나 레이첼 로이, 알렉산더 왕, 마르틴 마르지엘라 같은 브랜드를 좋아하죠. 그렇다고 ‘티셔츠+청바지’를 저의 대표적인 룩으로 꼽고 싶진 않아요. 전 더 근사하게 입고 싶거든요.” 공교롭게도 옆엔 ‘티셔츠+청바지’ 차림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서 있었다. 보디아노바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편안함=티셔츠+청바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증오해요. 어떤 옷을 입었는가보다 자기가 얼마나 편안함을 느끼는가, 이게 훨씬 중요하니까요. 지젤(수퍼모델 지젤 번천을 그는 이렇게 불렀다)은 늘 ‘티셔츠+청바지’를 입어요. 그래도 언제나 섹시하고 멋져요.”
광고 촬영장에 온 것이니 그는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다. “평소엔 마스카라로 멋을 내요. 펜슬로 살짝 번진 듯 연출한 후 마스카라를 바르는 게 저만의 방법이죠. 볼에 약간 색을 넣고 립스틱도 살짝 칠해요. 피부가 좋은 편이라 더 이상의 화장은 하지 않아요.”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다.
그는 1년 내내 패션쇼와 각종 광고 화보 촬영 등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한다. 게다가 최근엔 러시아 어린이를 위한 재단도 세웠다. ‘네이키드 하트 재단’의 설립자인 보디아노바는 “헐벗고 굶주린 러시아 어린이들이 동심을 마음껏 펼치도록, 맘 놓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모금 행사를 벌여 단 사흘 만에 600만 달러(약 75억원)를 모아 명성을 과시했다. 부호 귀족의 부인이라면 좀 더 편하게 누리며 살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일을 찾아서 하는 걸까. “젊으니까요. 앞으로는 디자인도 해보고 싶어요.” 그 바람처럼 현재 그는 프랑스의 속옷 브랜드 에탐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건 라인을 디자인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가 기자의 수첩을 내어달라고 했다. 개인 e-메일 주소를 직접 적어주겠다는 거다. “중앙일보에 제 기사가 어떻게 나갈지 궁금해요.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니까 꼭 보고 싶어요. 번역해서 보내주실 거죠?” 연애편지라도 부탁하듯 애교를 섞어 웃음으로 부탁하는 보디아노바. 이미 세계적인 모델에게 언론 인터뷰야 흔한 일 아닌가. 그런데 “정식으로 첫 인사를 하게 된 한국 독자들”을 강조하며 직접 챙겨보고 싶어 하는 프로다움이 인상적이었다.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300여km 떨어진 노보고로트에서 태어났다. 갓난 아기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생활이 어려워 11세 때부터 과일 행상을 하다 17세 때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프랑스 비바 모델에이전시를 통해 패션모델로 데뷔했다. 영국인 귀족 저스틴 포트먼과 결혼해 영국 서섹스의 저택에 살고 있다.
‘DNA’대표 데이비드 본누브리에(43)
미국 뉴욕의 대표 모델 매니지먼트사인 ‘DNA’의 설립자이자 대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의 매력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샤넬, 루이뷔통, 이브생로랑 같은 프랑스의 대표 명품 브랜드가 그를 패션쇼의 첫 모델로 등장시키거나 피날레를 장식하게 하는 것은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시즌마다 새롭게 변하는 디자인 컨셉트에 따라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다양한 매력 때문이다. 나탈리아는 러시아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정말 동화 같은 성공을 이루어냈다. 환상적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에다 환상적인 스토리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열정을 쏟고 있는 재단 일만 해도 그렇다. 러시아 어린이들을 위한 ‘네이키드 하트 재단’ 활동은 그의 명성과 매력을 증폭시키고 있다. 열정적인 그의 모습은 현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10년 경력이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모든 스태프와 잘 어울리며 협조적인 사람이다. 사진 촬영은 그래야만 최고의 결과가 나온다. 사진가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광고주 등 모든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더해 촬영에 임하는 게 나탈리아다.”
사진작가 두산 렐진(35)
‘보그’ ‘엘르’ 등 세계적인 패션잡지의 표지 사진을 주로 찍는 사진가.
“7~8년 전부터 나탈리아와 함께 일했다. 카메라 앞에서 그는 빛이 난다. 어떤 옷을 입든, 무엇을 하든 주저함이 없다. 패션모델로서 나탈리아의 매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신선함, 젊음, 다양함, 열정, 순수, 여성성. 이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이 나탈리아다. 그가 등장한 잡지 화보나 광고를 보라. 매번 다른 모습이다. 보는 사람들이 언제나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의 이미지는 항상 젊다. 27세면 모델계에서 결코 젊지 않은 나이인데 나탈리아는 고양이처럼 귀여운 얼굴 덕에 젊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각도에서 카메라를 갖다 대도 완벽한 사진이 나오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패션모델로서 최고의 장점이다. 아기를 낳은 엄마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여성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절로 묻어나는 것도 나탈리아의 매력이다. 그가 귀족 부호의 부인이 됐다는 것? 촬영장에선 아무도 그런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나탈리아는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