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기 높은 현대적 기관총인 FN M240 기관총 <출처: FN Herstal>
기관총(MG, Machine Gun)은 현대 보병전투의 척추에 해당하는 핵심적인 무기체계로, 실탄을 빠른 속도로 지속적으로 발사해 전투지역을 광범위하게 제압할 수 있다. 화력이 강한 기관총은 역할이 더욱 확대되어 보병전투를 넘어 대공, 공중, 해상 등 다양한 전투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기관총의 사전적 의미는 지속적으로 속사가 가능한 소구경 자동화기다. 탄환을 자동으로 장전하면서 연속적으로 발사하는 총기를 가리킨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관총은 탄띠 급탄 방식을 취해 사격속도는 분당 500~1,000발이며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한 탄약이 고갈될 때까지 계속 발사된다.
좁은 의미의 기관총은 이렇게 풀사이즈의 소총탄을 지속적으로 발사하는 화기를 가리키며, 넓은 의미의 기관총은 권총탄을 사용하는 기관단총(SMG, Submachine Gub), 권총탄과 풀사이즈 소총탄의 중간에 해당하는 탄환을 사용하는 공격용 소총(Assault Rifle), 전자동 사격이 가능한 자동소총(Automatic Rifle) 등을 포함한다. 넓은 의미의 기관총은 영어로 ‘Machine Gun(머신 건)’ 대신 ‘Full Automatic Firearm(전자동 화기)’으로 표기한다.
인류의 오랜 꿈: 속사 화기
오늘날의 기관총은 19세기 말 개발되어 현대전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이를 개발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훨씬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다. 12세기 중국 송나라에서 화기를 사용하고, 14세기 유럽과 중동에서 총기를 무기로 도입한 이래 인류는 발사속도를 향상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총기의 발사속도를 높이기 위해 수많은 인물이 나섰는데, 심지어 ‘르네상스맨’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기관총과 비슷한 속사 화기의 아이디어를 그림과 글로 남겼다.
16세기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인도 무굴제국의 학자이자 발명가인 파툴라 시라지(Fathullah Shirazi)는 포신에 17개의 흑색화약을 결합한 핸드건(handgun)을 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에서는 1663년 팔머(Palmer)라는 인물이 1660년 창립된 지식인 및 학자들의 모임인 왕립학회(Royal Society)에 탄환을 발사하는 반동과 가스 압력을 이용한 자동사격의 가능성을 거론한 논문을 제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관총이 등장하기 이미 200년 전에 기술적 가능성을 거론한 사례다. 하지만, 모두 자료가 자세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모호한 상태다.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는 최초의 것으로는 영국 런던의 법률가 제임스 퍼클(James Puckle)이 발명한 퍼클 건(Puckle gun)이라는 총기로, 1718년 5월 15일자로 ‘디펜스(Defence)’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취득한 기록이 남아 있다. 부싯돌로 화약을 점화해 구경 24.4mm의 총알을 발사하는 수석총(燧石銃, flintlock) 방식의 리볼버 캐논(revolver cannon)이다. 중요한 약실의 구조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1722년 이뤄진 공개 시연에서 7분간 63발을 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도에게는 둥근 탄환을, 터키인 같은 이교도에게는 사각 탄환을 사용한다는 등 현실성이 떨어지는 내용이 있어 실제로 제조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트라예즈: 여러 개의 총열을 묶는 제사총 개발 시도
19세기 중엽 여러 개의 총신을 한꺼번에 묶어 각각 탄환을 채워놓고 한꺼번에, 또는 연속으로 발사하는 반자동 화기인 미트라예즈(Mitrailleuse)가 등장했다. 발사는 자동이지만 장전은 수동이기 때문에 원시적 형태의 기관총으로 볼 수도 있다. 유럽에선 중세 때부터 총기 하나가 여러 개의 총구를 가졌거나, 여러 개의 총열을 묶어 사용하는 제사총(齊射銃: 여러 개의 총구를 사용하는 총기)인 발리건(Volley Gun)이 있었다. 미트라예즈는 여기에서 진화된 형태다. 연발 화기이자 반자동 화기다.
1851년 벨기에 육군의 투생앙리조세프 파프샹(Toussaint-Henry-Joseph Fafchamps) 대위가 고안한 미트라예즈(Mitrailleuse)가 효시다. 미트라예즈는 영어권에서 포도탄 발사기(grapeshot shooter)로 부른다. 포도탄은 당시 포병들이 근거리 살상용으로 사용했던 금속구 산탄을 가리킨다.
파프샹이 개발한 미트라예즈는 50개의 총구를 가진 발리건이었는데, 총기 제작자인 조세프 몽티니(Joseph Montigny)가 1859년 37개의 11mm 총신을 가지고 크랭크축을 작동해 이를 수동으로 발사하는 원시적 형태의 기관총을 개발했다. 이 미트라예즈는 벨기에군에 납품되었다. 나중에 25개의 총신을 쓰는 미트라예즈도 개발되었다.
몽티니의 미트라예즈 <출처: Public Domain>
그 뒤 하나의 총신에서 총탄이 고속으로 발사되는 본격적인 기관총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834년 덴마크의 발명가인 N. J. 로브니츠(N. J. Lobnitz)가 공기압으로 작동하는 기관총을 발명했다. 1분당 80발을 쏠 수 있는 총이었지만 직경 2m짜리 플라이휠(flywheel)이 2개나 필요했고 장치가 너무 커서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1854년 영국의 헨리 베서머(Henry Bessemer)가 증기를 이용한 후장식 자동총기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이는 실제 개발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아이디어에 머물렀지만, 당시 기술 진보에 맞춰 다양한 기관총 또는 속사 화기의 개발 시도가 계속됐음을 보여준다.
백인에게는 차마 쓰지 못하는 무기: 미국 남북전쟁에서 첫 실전 사용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사회에서는 기관총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래도 기사도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 풍토상 같은 백인끼리 전쟁을 치르면서 이런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주로 식민지나 외국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실제로 기관총은 주로 아프리카 식민지 등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총기 사용에도 인종차별이 존재했던 것이다.
백인 간의 분쟁에서 기관총을 처음 대대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나마 윤리적 제약이 희박했던 신흥국가인 미국의 남북전쟁에서였다. 기관총이 지닌 군사적 합리성이 기사도 정신보다 우선했던 셈이다. 게다가 미국의 남북전쟁이 워낙 치열하게 전개된 탓도 있다. 남북전쟁은 오랫동안 나라를 분열시켜온 주제인 노예제와 연방정부-주정부 관계 등 다양한 갈등요소가 뒤섞여 첨예한 갈등 속에서 발발하고 진행되었다.
남북전쟁이 벌어지자 수많은 발명가들이 신무기 개발에 나섰다. 그중 하나가 윌슨 에이가(Wilson Agar)가 1861년 개발한 ‘에이가 건(Agar Gun)’이었다. 에이가 건은 하나의 총신으로 이뤄져 있으며 손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연속발사가 가능했다. 1분당 최고 120발의 연사가 가능해 당시로서는 가공할 화력의 무기체계였다. 시연회에서 에이가 건의 엄청난 화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정당 1,300달러라는 고가에 이를 10정이나 구입하고 54정을 추가 주문했다. 정부가 기관총을 구입한 첫 사례다. 참혹한 남북전쟁은 기관총을 사용한 사실상 첫 전쟁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에이가 건은 실전에서는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 정부는 에이가 건을 모두 팔고 더 이상 운용하지 않았다.
개틀링의 연발화기, 전장을 바꾸다
이듬해인 1862년에는 미국인 리처드 조던 개틀링(Richard Jordan Gatling)이 여러 개의 총신을 묶어 수레에 얹고 총열을 수동으로 회전시키면서 발사하는 방식의 연발화기를 개발했다. 그의 이름을 딴 개틀링 건(Gatling Gun)은 총신 위에 놓인 탄약통 용기가 총열의 회전운동을 왕복운동으로 바꾸면서 실탄의 급탄, 장전, 발사, 탄피방출의 과정을 이끌게 된다. 개틀링 건은 남북전쟁 당시 다양하게 실전에 응용되었다. 현대에는 수동 회전 작업을 강력한 전동 모터가 대신하는 개틀링 포로 진화해 대공, 공중, 해상 무기체계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개틀링 건 역시 남북전쟁에 사용되었다. 에이가 건은 남북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지만 개틀링 건은 미국은 물론 영국, 러시아, 프랑스, 청나라, 일본 등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면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오늘날의 태국인 사이암(Saiam) 왕국과 대한제국도 소량이지만 도입했다.
개틀링 건은 유럽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에도 투입되었다. 미국은 인디언 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필리핀인 반미 봉기 진압에 이를 사용했다. 영국은 1879년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줄루 전쟁(Anglo-Zulu War)에서도 1차전에서 1정, 2차전에서 2정의 개틀링 건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서구 열강과 청나라는 1899~1901년에 벌어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할 때 개틀링 건을 사용했다.
개틀링 건은 77.2kg이라는 무게 때문에 기동성이 좋지 않아 이런 전쟁과 전투에서 그리 많지 않은 수가 투입되었을 뿐인데도 빠른 속도의 연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함으로써 기관총이라는 무기체계의 유용성을 확실히 입증해 보였다.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기 때문에 한정적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량을 거듭해 유용성을 확대해나갔다.
동학농민 학살 때 사용된 일본군의 개틀링 건
일본은 개틀링 건을 수입해 자국의 역사를 바꾼 내전에서 사용했다. 쇼군(將軍)의 권력 반환을 놓고 에도 바쿠후(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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