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그 이름도... 백마부대 용사들...!"
당당하게 우렁찬 군가를 부르며 동대문에서 광화문까지 행군하는 동안 태극기를 휘날리며
열렬히 환송하는 시민들의 갈채와 간간이 예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안겨주는 한아름의
꽃다발 세례 속에 "민주와 자유수호"를 외치며 포화 속을 누비며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으니...
정말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조금도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얼마 전, 대한민국의 국익증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파월 장병들에게 김
대중 대통령 명의로 된 '참전용사증서'가 주어졌는데, 해외 참전용사들에게 대하는 국가의
예우치고는 너무나 소홀한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서글프고 섭섭함에 더욱 가중되었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라 할 수 있겠다.
1968년 2월
부산항에서 미 해군 소속 2만3천 톤 급 수송선에 몸을 싣고 집채만한 검푸른 파도를 헤치며
일주일 내내 배멀미와 싸우기를 마다 않고 베트남으로 베트남으로 향한 장병 2천 여명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기백은 옛 고구려 병사가 중국 대륙 한가운데까지 치고 들어간
조상들의 위용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루종일 선실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우선 밤낮을 구분하기 힘들어 정상적인 생활의 리듬이 깨어져 괴로웠고 새벽6시에 기상해서 세면을 하자마자 하루 세끼 밥 찾아먹는 것이 그 날 그 날 작전중의 작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천여 장병들이 한 곳의 식당에서만 배식을 받아 밥을 먹어야 하니 온종일
줄서는데 몇 시간씩 보낼 수밖에 없었고 조금만 게을러 늦잠을 자거나 선상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쏘이다 늦게 되면 당연히 한끼정도는 굶어야 하는 것이 예사였다.
처음엔 줄서기에 익숙하지 않아 새치기와 무질서가 판을 쳤는데 개병대(해병대)의 자율관리대가 나서면서부터 늦게나마 그런대로 질서가 잡혀갔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서둘러 저녁을 오후 5시까지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날 작전(?)을
무사히 끝난 날이면 샤워를 한 후 선상에 오르게 되는데 그런 때는 운이 좋은 날이었다. 망망대해에 보이는 것이라곤 바다와 가끔씩 심술을 부리는 집채만한 파도가 전부였으며 밤이면 청승맞게 떠 있는 반쪽 달과 별들이 전쟁터로 향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더욱 더 죽여주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이던가? 그날도 방정맞은 어느 장병이 불어 제끼는 하모니카소리에서
흘러나오는 '타향살이'가 그토록 청승맞을 수가 없었다.
부산항을 떠난 지 5일째부터는 모두가 무표정하고 무덤덤해진게 장병들이 지쳐서인지 겁을 먹어서인지 어느 쪽으로도 구분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로 모두 잠잠했다.
7일째 저녁 즈음, 저 멀리 사라지는 태양빛이 검붉게 비쳐지는 희미한 사이로 흐느적거리는 길다란 나뭇잎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베트남이다!" 하는 외침속에서 많은 장병들이 앞다투어 선상에 올라 남지나해의 전쟁터인 베트남을 서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튿날 새벽 6시에 기상해서 아침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각기 지급된 더블백을 메고 선상에 나가 배치될 부대 순서대로 하선작전이 전개되면서 우리가 상륙할 '나트랑' 시가지가 좀 더
뚜렷하게 아침햇살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울창하고 커다란 야자수 나무 사이사이로 지붕 얕은 주택지가 낯설게 보였고 그 주택들은
꽤나 멀리 퍼져 있었다.
마을을 한참 달려가다 보면 그 멀리 높은 산봉우리들을 가지런히 한 채 내려온 계곡 깊은 정글의 산자락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다.
가끔 쿵쾅거리며 쏘아대는 대포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이 곳 수송선에까지 들려와 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정렬해 있는 장병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산자락 군데군데에선 하이얀 연기들이 모락모락 아물거리며 퍼지고 있어 역시 전쟁터는 전쟁터구나 하는 기분을 들게 해 주었다.
장병들은 바다 한가운데 떠서 출렁대는 부교에 하선해서 소형 쾌속 상륙선에 몸을 실었고
10여척의 상륙정은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났는지 부.지런히 나트랑 항구와 수송선을 오가며 장병들을 실어 날랐다.
조용하기만 하던 나트랑 해변가는 쏟아놓은 병사들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고 우리들을 각기 부대로 인솔하려는 호송병들의 외침에 마치 고국의 속초 어항 새벽시장에 와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 주려는 듯 분주했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어찌나 더운지 깨끗하게 다려입은 군복은 금방 진한 땀으로 적셔지기 시작했고 가볍던 더블백이 점차 무거워져 모래바닥에 질질 끌면서 다녀야 했다. 많은 병사들의 모습은 꿀먹은 벙어리 모습으로 어찌보면 대도시에 처음 소풍 나온 유치원 생도들처럼
조용히 사방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상륙한 병사들을 각 부대로 호송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선배 장병들의 모습이 신병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검붉고 시커멓게 타버린 무표정한 얼굴하며 억센 팔뚝, 퍼득거리는 독수리의 눈과 흡사한
번뜩이는 눈동자, 그 위에 얹혀진 철모하며 마치 철모가 날라 가는 것을 붙들어 놓으려고
그랬는지 4∼5개씩 묶여져 있는 모기 약병들.
다 낡고 땀에 절은 누런 런닝셔츠와 흔한 서부영화에서나 가끔 출연하는 못생긴 악당들이
매고 있을법한 헐렁한 허리띠, 거기에 매달린 2∼3개의 물통(수통)들.
어디 그 뿐인가. 무겁지도 않은지 굴비 묶듯 총총히 엮은 총알을 자기들이 무슨 일제시대
독립군이라도 되는지 양어깨에 대각선 모양으로 걸쳤으며 손에 손엔 칼빈 소총 아니면 M16
소총에 실탄을 장착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치고 다녔으니 작업모에 완전비무장 차림인
신병들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지 않을 재간이 어디 있을 것인가 말이다.
인솔자를 따라 합승한 G.M.C 트럭엔 어김없이 캐리바 30, 50이 아니면 기관단총이 설치되어 총알꾸러미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트럭 주변을 맴돌던 잽싸게 생긴 A.P.C 장갑차들은 이곳저곳의 트럭 사이사이에 자리잡기 시작하더니 이내 트럭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인솔차량은 아물아물 저 앞에서 보이는데, 끝머리 차량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탄 호송대열 상공엔 중무장한 U.H.I.D 헬리콥터가 함께가고 있었다.
호송대열이 나트랑 사가지를 벗어나면서부터 나는 큰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잘 정돈된 시가지와 눈처럼 하얗고 개나리꽃처럼 노오란 원색의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듯한 옷감으로(아오자이) 가녀린 몸체를 감고 다니는 여성들.
그녀들은 대개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다녔는데 가벼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아오자이의
자태는 정말이지 무쇠도 소화시킬 젊은 병사들의 욕정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그녀들은 표정도 무척 밝았고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모두가 웃고 명랑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간혹 영업하는 상점들도 보였는데 모두가 깨끗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형 삼륜차들이 사람들을 가득 싣고 털털거리며 지나가는데 그것이 곧 시내버스역할을
하는 '람브렐라' 라고 했다. 한국의 4∼6일용 짚차 크기에 바퀴부분만 삼륜으로 개조한 형태의 조그만 승합차량이었다. 베트남 땅에 상륙한 지 2∼3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첫눈에 과연
이 나라가 전쟁터인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 동안 한국에서 신문을 통해 알고 있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전쟁터에 와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해 주었다.
내가 배속된 부대는 백마 제 28연대 '도깨비 부대'로서 나트랑에서 차량으로 쉬엄쉬엄 여덟시간 이상을 북쪽을 향해 달려 도착한 투이호아시 외곽해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파월이래 홍길동 작전 1,2,3호, 풋카산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월맹정규군과
V.C(베트공)들 사이에선 이미 악명높은 부대로 알려져 있었다.
도깨비 부대는 남쪽으로 험난한 '혼바산'이 자리잡고 있었고 북쪽으로 국도를 따라가면
'캄란' 지역에 우리 해병대가 진주하고 있어 육군부대로서는 최전방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남지나해 반대쪽으로는 도주하는 V.C들을 추격하다 보면 곧이어 '캄보디아' 국경에 도달하는 그야말로 적지 중의 적지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었다.
백마 도깨비 부대는 이미 '병력 받으나마나'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주로 야간에만 작전에 투입되기 때문에 도깨비 부대라고 불리고 있었다. 도깨비마크를 가슴에 달고 인근 마을 유흥가에 나가면 술집에서도 미군병사들은 맥주를 권하며 친하길 원했고, 은도깨비 마크 한 개와 맥주 몇 캔씩 맞바꾸어 갖기를 원할 정도로 인기가 캡이었다.
용맹스러운 무적의 부대에 배속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서 귀국할 궁리를 하고 입소를 해야 하는지가 신병들 모두의 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이 곳 낮과 밤의 기온차는 한국의 낮과 밤 같지가 않게 차이가 매우 컸다.
낮엔 작열하는 태양열의 온도가 30∼40℃를 오르내렸지만 야간엔 5∼10℃까지 떨어져 밤을
하얗게 지샐 때가 많았고, 불빛따라 병사들의 몸 위로 잽싸게 기어다니는 엄지손가락 만한
도마뱀의 출현은 신병들의 간담을 싸늘하게 해 주곤 했다.
베트남 전쟁터. 월남전에 지원을 했든 차출이 되었든 간에 일단 베트남에 도착한 신병들은
전쟁터에 대한 공포심과 일기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비법(?)부터 터득하는 훈련에 들어가야
했다. 처음엔 막사 주변의 청소와 간단한 병기손질을 했는데 2∼3일 후부터는 부서진 벙커와 높게 세워진 전망대 수리에 이르기까지 사역에 동원되었지만 모든 것이 생각대로 잘 처리되지 않았다.
고국에 있을 때 가끔 보던 전쟁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속의 장병들은 벙커도 잘 구축했고 즐겁게 놀며 나치 '전쟁을 동네 꼬마들 놀이쯤'으로
알고 생활하는 것을 보았는데 막상 현실에 부딪쳐 보니 그것들은 그저 '영화에 불과한 것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해야만 했다.
무더위에 나가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헉헉 차오고 수통의 물이 몇 통째 비워져도 작업해야 하는 벙커는 50cm도 진척되지 못했다. 28연대 병영은 무척이나 넓었다. 모르긴 해도 전 부대를 한번 순회하려면 차량을 이용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 안에는 미군들이 상주하고있는 야전병원, 병참부대, 세탁공장들이 있으며 한국군이
상주하고 있는 105m 야포부대, 헬기부대, PX, 식당, 장병들 숙소, 행정사무소 등 크고 작은
건물들을 모두 합하면 조그만 도시 규모로도 손색이 없을 듯 했다.
이곳의 장교식당, PX, 헌병대 등엔 베트남인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여성들의 매력은 가끔 한국군들의 열정이 무너져 내려 심각한 문제를 낳기도 했다.
병영생활이 처음엔 힘이 들었는데 도착한 지 일주일이 넘고 나니 오히려 이곳이 한국보다
좋은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의 가장 큰 고통은 역시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몰래 넘어 청와대까지 침투했던 그 당시 나는 제 25사단 최전방에
근무했으며 임진각변 파평산에서 죽지 않을 만큼 고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삭풍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서 추위와 온몸으로 싸우고 얼음 밥덩어리를 깨어 먹으며 보름 여를 고생할 때 손과 발에 동상까지 걸려 나는 여기서 죽으나 전쟁터에 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우선은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베트남까지 와 버렸던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다른 많은 사병들의 처지가 나와 같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역시 환경은 못 속이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 있을 땐 깡보리밥에 쓴 김치 몇 조각, 씁쓸한 된장국으로 하루 세끼를 때우며 굶주린 배를 달래야 했는데 이곳에 와보니 하얀 쌀밥에 고기국, C-레이션, K-레이션, 양주(물론 맥주지만)에 콜라까지 외국 음료수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 춥고 배고팠던 고국의 사병 신세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편이란 말인가?
보름만에 내가 배치된 부대는 연대본부 군무중대였다.
남들은 나더러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400여명 중에 7명이 근무중대(본대)에 차출되었는데 내가 그 속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동안이나마 함께 배를 타고 지내며 이곳까지 왔던 동료들이 이곳 저곳으로 G.M.C 트럭을 타고 가거나 중무장한 헬기나 씨누크를 타고 전투지역(주로 정글)으로 진출되는 것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써 이별이었다.
근무중대에 배속되면서 내가 한 일들은 제일 늦게 온 말단병사였으므로 그만큼 더 고달픈 일들이 많았다.
청소에 불침번은 기본이었고 격일제로 돌아오는 외곽보초근무도 일주일에 6일은 서야했다.
그러는 동안 정신없이 한 달이 흘러갔다.
무덥던 한낮의 더위도 해가 지면서부터는 남지나해의 바람 때문인지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고국에 쓰는 편지 속엔 주로
'작열하는 태양도 야자수 그늘 아래 앉아 고향생각을 하노라면 마치 시원한 선풍기 바람을
쏘이는 기분이고... 남지나해의 칠흙같은 어둠속에 둥그렇게 떠 있는 외로운 달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쯤 너는 어떤 놈과 즐겁게 보내고 있을까... 이 터질듯한 마음을 적고 있다...'
뭐 대강 이러한 글들이 파월 장병들이 주로 써야 하는 레파토리였다.
신병들이 베트남 현지생활에 채 익숙하기도 전에 마음고생을 시키는 광경들이 가끔씩 일어난다.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잠시 부대 내를 돌아보거나 근무 중 우연히 마주치며 지나치게 되는, 작전지역에서 철수한 전투병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축 처진 어깨, 갈기갈기 찢어진 군복, 겁먹은 눈동자들을 보면서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러한 몰골의 병사들은 3∼4일 휴식을 취한 채 또다시 작전지역으로 출동하곤 했다.
물론 다시 투입될 때는 말끔한 복장에 다소 사기충전이 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겁을 먹고 있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다.
나는 가끔 그들과 밤늦도록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처음엔 다소 서먹했지만 맥주캔 몇 개가 서로 오고가고 나면 금새 친근해졌다. 우리들은 그만큼 힘들고 외로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연대 규모의 큰 작전은 대개 3∼4개월에 한 번 정도지만 정글 한가운데 독립되어 있는 소총 중대들은 주로 매복작전과 인근마을에 몰래 드나드는 V.C들을 잡아내는 것인데, 매복작전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했다.
140여중대 병력이 마을이나 험난한 산 속에 집중 투입되어 V.C 색출작전을 펴다가 철수를
할 때, 30∼40명이 아무도 모르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매복하게 되는데, 운이 좋은 병사들은 햇볕이나 비도 막을 수 있는 좋은 장소가 선택되지만 대개는 바위틈새나 푹 꺼진 땅속이라 2박3일의 장기매복은 병사들을 초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는 일이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목마름이나 밤새 모기들에게 뜯기는 것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었다.
하루종일, 밤새도록 적막함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V.C들의 출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하는 긴장, 고독, 공포심 등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는 것이 그들 전투부대 소총수들의 넋두리이자 전쟁체험담이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근무중대 G-4 '병참 보급과'는 사무실 사방이 훤히 뚫려져 있어 맞바람이 들어오지만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바람보다는 못한 듯 싶었다. 무덥고 짜증이 나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근무를 했다. 매일을 독충과 뱀과 그들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V.C들과 정글에서 투쟁할 동료 병사들의 모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V.C들은 정말 강인하고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우리들이야 정해진 장소에서 지급되는 의·식·주 등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도 근무하기가
지루해 각종 안전사고까지 발생하는 판에 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조달하며 산 속에서 강군을 만나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볼 때 역시 끈질긴 민족성과 약소국가만의 투쟁정신은 평화시의 국민들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높고 진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부대에서 20여km 떨어진 마을에 대민사업을 나갔다.
쌀과 C-레이션, K-레이션 등 먹을 식량과 비가 새는 지붕을 덮어줄 몇 장의 양철판과 망치, 못 등 간단한 연장들을 챙겨 소위 대민 봉사활동에 나선 것이다.
베트남에 온 지 두 달만에 처음으로 월남인들을 가까이에서 접해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웬지 무섭고 긴장이 되어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야자나무 아래 얼기설기 이어져 있는 벽돌집 사이사이로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인근 부근에선 가족들이 모를 심거나 벼를 베느라 바빴다.
월남은 3∼4모작이기 때문에 한쪽에선 모를 심고 한쪽에선 벼를 베는 이상한 광경을 자주 보게 되며 새로운 이국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는 풍속이었다.
멀리서보나 가까이서 보나 역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고 언어와 모습만 약간 틀렸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한가지 가슴아픈 것은 마을 사람들 거의가 여자들뿐이었고 간혹 눈에 띄는 남자들은 15세이하 어린애들과 70세 이상 노인층들 뿐이라는 점이었다. 어쩌다 젊은 남자와 만날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개 목발을 짚고 다니거나 팔이 없는 등 전쟁으로 인한 상이군인들이었다.
월남 아이들은 천진스럽게도 우리들을 잘 따랐고 장병들은 그들에게 껌과 초코렛 등을 쥐어주며 함께 웃고 놀아주었다.
한국에서의 6·25이후 보던 미군들과 한국 아이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월남 도착 3개월이 조금 지난 어느 일요일. 그날도 평소 때와 다름없이 간단한 단독무장을 하고 혼바산 인근마을로 대민 지원사업을 나갔다. 인솔자. 염중위와 김중사, 서하사 등을 포함하여 모두 12명이었다. 우리 일행은 전쟁터에 와 있다는 긴장된 모습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서서 차량에서 내려 걷는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굉음을 내며 박격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각자가 은폐물과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었지만 도무지 어느 쪽에서 누가 쏘아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처박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콩볶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더니 이쪽에서도 누군가 응사를 하는지 칼빈 총 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군쪽 이곳저곳에서 응사를 했는데 사실 적을 향해 정확히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겁이 나니까 이곳저곳을 향해 마구 쏘아댄다고 표현해야 옳을 듯 싶었다.
잠시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방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적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내던지는 아군들이었다. 도무지 통제를 할 수
가 없는 순간들이 흘렀다.
이러한 교전시간이 상당히 긴 듯 싶었는데, 사실은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머리를 빼꼼이 뻗어 마을을 바라보니 이곳저곳에서 검은 연기가 퍼져나가고 사람들은커녕 그 흔한 개나 돼지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적들로부터도 더 이상 공격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서서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마을로 진입했다.
모두가 토끼 눈을 하고 숨을 죽여가며 걷다가 숲이며 정글이며 집을 향해 마구 무차별 사격을 하면서 뛰어다녔다.
얼마 후 부대에서 지원병이 속속 도착하였다.
그날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죽어나자빠진 적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아군 쪽에서 겁먹고 숨어 있다가 넘어져 다친 사병만 두 명 있었다.
그 반면 마을은 엉망이었다. 이곳저곳에 죽거나 부상당한 주민들이 많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직접 보았다. 한국군 엠블런스가 와서 부.지런히 환자들을 야전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전과 없는 전투 속에 애궂은 민간인들만 크게 희생시킨 셈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월남인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옷만 입고 슬금슬금 걸어 다니는 그들 모두가 베트공처럼 보였다.
그런가 하면 월남군들은 도무지 군기도 없고 규율도 없는 듯 싶었다.
사병들이 칼빈에 권총을 찼는가하면 장교들도 사제 장총에 길고 뾰족한 칼을 꽂아 힘겨운 듯 메고 다니는 예도 많았다.
월남에서는 무기를 암거래상에서 자유자재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잘 사는 사병은 얼마든지 편하게 무장을 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무질서한 전쟁터에서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남북과 긴장을 함께 하며 언제나 대처하고 있는 고국 대한민국이 걱정스러웠다.
고교재학 중 6·3데모, 한일회담 반대 데모 등에 주모자로 쫓겨 최전방 철의 삼각지 강원도 철원군 서면 와수리에서 병원을 하시는 큰 누나네에서 은둔한 적이 있었다.
1966년 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반공을 국시로 재건 등 구호만 요란했지 산골벽지까지 데모학생을 검거하는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기에 병원을 하는 지방유지인 매형 덕분에 편히 숨어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밤마다 무섭고 해괴한 일들이 벌어졌다.
"친애하는 남반부 동무 여러분..." 뻔히 보이는 거리에 있는 비무장지대 휴전선 넘어 북한땅 오성산에서 들려오는 소위 대남방송이었다.
와수리에서 12km 떨어진 '육단리' 엔 밤이면 이북 4사단 고급 장교들이 아군지역에 와서 잠을 자며 가족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것은 6·25이후 가족을 남쪽에 남겨두고
황급히 후퇴한 북한군들이 퍼뜨린 소문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육단리 음지마을엔 북한군 장교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고 언젠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도 하였으며 소설 단행본으로 나와 읽어 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어린 소년시절을 '반공, 무장투쟁, 아군, 간첩' 등에 대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알고 있었는데, 자유와 민주수호를 유린하는 이곳 베트남 땅에 와서 그 처절한 상황을 직접 보고 느끼니 이건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결심을 했다.
삼천리 금수강산 내 조국수호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보는 일을 하겠다고.
1968년 5월
매월 45불씩 전투수당으로 받은 금액 중 40불을 고국의 박정희 대통령께 송금했다.
철의 삼각지 철원지역에 '반공센터'를 건립하여 전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반공의식을
깊게 고취시켜 이 곳 베트남처럼 되게 하지 말게 해달라는 편지도 함께 동봉했다. 그런 뒤부터 온 국민들의 튼튼한 '국토방위'와 관련하여 '방위성금'을 모금하게 된 것도 이것이 기회가 아니었던가 싶다.
고국에 40불씩 송금하는 일은 처음부터 부대 내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부대 내에선 개인적으로 송금할 수가 없었고 모두가 일관되게 고국의 부모, 애인 등 가족에게 보내야 했는데 그러려면 서류작성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나는 수령인을 '박정희 대통령' 이라 썼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점차 주변에선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때만해도 고국엔 한창 '개발' 정책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때였는데 서울 초입 말죽거리의 땅 한 평이 '몇 만원 정도' 할 때였다.
1년만 잘 모으면 땅 몇 백 평은 살 수 있는 돈을 마다하고 '명예'와 '공명심' 때문에 '헛짓'을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목숨.
차라리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리면 좋았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부상이나 당해 귀국한다면
무슨 기력으로 산담. 차라리 죽어 원혼이 귀국하는 것이 나을 성 싶었기에 나는 돈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어찌보면 무모한 용기와 쉽게 삶을 내던지는 만용에서였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우리 후손들이나 편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반공교육'에 투자(?)하리라는 신념이 주변 동료들이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것보다 더 정의롭고 값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군수과에 근무하다 보면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하게 된다.
병사들이 전사하게 되면 '제6종'으로 분류 처리되기 때문에 고국으로 귀국하는 한줌의 재와
함께 그가 사용하던 몇가지 유품을 조그마한 상자에 담아 군수과에서 보관하다가 보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언젠가부터 동료들 관물함에서 '죽음'의 냄새가 날 때가 있었고 그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얼마 후 그 관물함 임자는 사고로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를 했기에 동료들은 나의 '직감'을 매우 무서워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어찌보면 '순간'이다.
조물주가 사람을 세상에 내보낼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모두가 어떠한 각본에
의해서 살고 죽는다. 그러므로 목숨이 붙어있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
후회 없는 삶, 멋있는 삶.
내 나이 21세에 이미 삶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무서운 것을 몰랐고
아무리 귀중한 것을 보아도 갖고 싶거나 탐하는 욕심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베트남 병영생활은 정말 바빴다.
미 병참기지에 출입하며 반납한 군수물자 보다 더 많은 물량을 수령해 와야 했고 서투른 영어는 손짓 발짓으로도 모자라 그림까지 그려가며 동료들을 인솔하여 야전병원에 가서 충치를 뽑아주거나 포경수술까지 해 주고......
가끔씩 주변마을에 봉사활동도 가고 주민들과 기념촬영도 하고 그러다 보니 친해지는 사람들도 생겨 영어, 베트남어, 프랑스어, 한국어 등 몇 개국언어를 써 가며 웃고 즐겁게 놀며
정도 나누고...
그러다 보니 베트남에 온 지 벌써 1년여가 다 되었다.
고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그만 송금하라는 친필 서신이 도착하면서 연대장은 나를
특별히 아껴주시고 힘든 일에서 제외시켜 주셨다.
남들은 베트남에서 1년씩 근무를 하고 귀국에 들떠 있었지만 난 오히려 6개월을 연장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재 파월 된 병사들은 월남 여인들과 사귀어 국제결혼도 하고 투이호아 시내에 불고기집이나 맥주홀을 차렸다고 했다.
전쟁터치고는 참으로 안정되고 편한 생활이었다.
1969년
귀국선에 올랐을 때 살아서 돌아가는 베트남 전지역의 병사들로 수송선은 가득했다. 모두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즐겁게 잡담하며 맥주캔들을 여유있게 비우곤 했다.
한가지 판이하게 달라진 것은 베트남에 도착할 때는 그렇게도 기세가 등등하고 용맹스러웠던 해병대 병사들이 하나같이 모두 기가 죽어 비실비실대었고 오히려 주눅들어 하선했던 백마 도깨비 부대 근무 병사들이 군기를 잡으며 설치고 다니는 광경이었다.
'귀신 잡는 해병'
베트남 땅에서 그들만큼 많이 희생된 부대가 없었으며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열하는 포탄과
무서운 지뢰밭, 독충, 정글 속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그만 얼이 다 빠져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에겐 역시 환경의 지배가 가장 무서운 것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에서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살려고 기를 쓰면 죽고, 죽으려 나서면 산다.'는 나름대로의 신념 어린 좌우명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까지 모진 세파 속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오로지 30여년전
베트남전에서 겪고 얻은 신념 어린 좌우명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에 국익을 위해 우리 병사들을 파병시킨다면
지금도 나는 먼저 무기를 나설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 길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