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레트 게이츠의 'Listen to my heart'이 차 안 가득 울려 퍼진다. 맑디 맑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탤런트 조인성이 등장했던 캔커피 광고가 문득 떠오른다. '분위기 제대로 잡자면 나무 한 그루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리고, 나를 원하는 친구 하나도 옆에 있어야 하고….' 이틀 꼬박 운전석에 앉아 있느라 잔뜩 긴장했던 온몸의 근육이 어느 샌가 편안하게 풀리는 것 같다. 개인적인 취향은 조금 거친 음색의 록 밴드지만, 가끔씩 듣는 가레트 게이츠 풍의 청아한 목소리는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준다.
회색도 아닌, 연보라에 가깝지만 꼭 그렇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계기판 불빛이 긴장감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살짝 비가 흩뿌리는지, 윈드실드에 빗방울 몇 점이 후두둑 듣는다. 속도계 게이지는 어느 샌가 시속 200km를 가리키고, 가레트 게이츠의 노래를 터질 듯 가득 실은 은빛 세단은 깜깜한 도로를 날래게 달려나간다.
이 차의 이름은 메르세데스 벤츠 C 230 V.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V6 엔진으로 성능을 업그레이드한 또 하나의 C클래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벤츠 차의 엔진 성능은 차 이름만으로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그게 도무지 어렵기만 하다. 이 차만 해도 그렇다. C 230 V의 엔진은 V6 2.5ℓ 204마력. 차 이름으로 유추했던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배기량과 성능을 감추고 있다. C 230 V 엔진의 핵심은 V6 특유의 매끈한 주행감각. 앞서 국내에 선보인 C 180 K의 직렬 4기통 엔진도 강렬한 박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부드러움에 있어서는 V6와 비할 바가 아니다. V6로 프리미엄 브랜드에 걸맞은 부드러움까지 갖춘 컴팩트 세단이라, 꽤 근사한 조합 아닌가.
이와 비슷한 이름의 C 클래스가 진작에 있긴 했었다. 2004년 연말 무렵 국내에 등장했던 C 230 K가 바로 그것. 하지만 직렬 4기통 1.8ℓ 192마력 엔진과 5단 자동기어를 결합한 C 230 K는 지금 내 곁에 있는 C 230 V와는 사뭇 다른 성격의 차다. 엔진 형식과 배기량, 출력도 모두 다르거니와 무엇보다 트랜스미션이 완전 딴 판이다. C 230 V의 V6 엔진과 손발을 맞춘 트랜스미션은 최근 벤츠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잡은 7단 자동기어(7G-트로닉). C 230 V는 이 7G-트로닉이 처음 쓰인 C 클래스라는 점도 기억해둬야겠다.
지금의 C클래스는 지난 2000년 4월 풀 모델 체인지를 거쳐 등장한 3세대. 그 이후에도 안팎으로 크고 작은 부분변화를 단행하긴 했지만, 큰 줄기로 볼 때는 아직 3세대의 카테고리 안에 있다고 봐야 한다.
C 230 V는 아이팟 패키지와 AMG 패키지의 두 가지 버전으로 선보인다. 두 가지 버전 모두 애플 MP3 플레이어 '아이팟 나노'를 기본장비로 달고 나온다. 아이팟이 기본장비라니! 드디어 아이팟이 차의 기본장비로 제공되는 시대가 도래한 거다. 그것도 벤츠에 실려서 말이다. 아이팟은 글러브 박스 안의 커넥터를 통해 차의 오디오 시스템과 연결된다. <톱기어> 편집부에 맡겨진 시승차는 아이팟 패키지보다 한 급 위인 AMG 패키지. 17인치 알루미늄 휠과 립 스포일러, 엠블럼 등 AMG 보디키트 액세서리로 스타일링을 한결 다이내믹하게 다듬어낸 차다. 엔진이나 흡배기 계통까지 손대지 않은 게 당연히 아쉽긴 하지만, 이 차의 립 스포일러는 지금껏 본 것 중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참하다.
매트에 새겨진 'SPORT EDITION' 문구를 빼면, 운전석 인테리어는 기존의 C클래스와 다를 바 없다. 빈틈없어 보이는 대시보드 짜임새도 여전하고, 한눈에 싹 들어오는 직관적 계기판 디자인도 그대로다. 고급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 오디오 시스템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용물은 7단으로 변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기어레버도 다르지 않다. 예의 단단한 가죽시트는 앉는 순간 특유의 신뢰감을 전한다. 조금은 두툼한 스티어링 휠 그립감도 벤츠 특유의 매력 포인트.
벤츠 인테리어는 보기에도 좋지만, 그보다 기능성이 한발 앞서는 편. 모든 계기류가 애써 찾을 필요 없이 그냥 손 뻗으면 닿을 자리에 차분하게 배치되어있다. 다만, 센터 콘솔과 기어 박스 주변을 마무리한 플라스틱 재질은 조금 아쉽다. 벤츠 라인업에서는 막내에 가깝다 할지라도, 프리미엄 세단인데다 '벤츠'라는 엠블럼을 생각하면 좀더 공들여 마감했으면 싶은 생각이다. 이는 벤츠뿐 아니라 다른 프리미엄 브랜드에서도 최근 흔히 발견되는 부분. 아무래도 비용 절감의 압박감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기어노브도 마찬가지. 디자인은 비할 데 없이 예쁜데, 손바닥에 와 닿는 질감은 100% 플라스틱이다. 너무 예뻐 가만히 쓰다듬다 보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환상이 하나 둘 깨어져 가는 기분이 든다. 만약 C 230 V를 구입한다면, 가장 먼저 교체하고 싶은 부분. 물론 벤츠 순정 부품 가운데 가죽이나 금속재질로 골라서 말이다.
V6 엔진답게 시동음은 무척 부드럽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게 벤츠 아이들링 음의 특징. 가속감이나 스티어링 감각은 모두 제법 묵직하다. 고회전 대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가벼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묵직한 맛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둔중한 느낌이란 말은 아니다. 저속에서는 든든한 신뢰감이, 고속에서는 안정감이 풍겨오는 묵직함이다.
고속 주행감각은 말 그대로 파워풀하다. 거센 마파람을 뚫고 기운차게 뛰쳐나가는 애니메이션 속 영웅이나 사이보그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날렵한 발놀림으로 잽싸게 헤쳐 나가는 게 아니라 넘치는 기운으로 통렬하게 치고 나가는 느낌. 동급에서는 가장 남성적인 드라이빙 감각이라 할 만하다. 가속감은 무척 빠른 편. 꾸준히 가속하면 순식간에 시속 210km를 넘어서고, 그 이후에는 가속력이 조금씩 더뎌진다. 국내에 선보인 벤츠 승용 라인업에서 막내뻘이지만, C 230 V는 어떻게 보면 '가장 벤츠다운 주행성능'을 맛보게 해주는 차다. 후련하게 달리는 주행성능이나 마치 돌덩이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탄탄한 승차감,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핸들링 등 벤츠 주행성능의 미덕을 골고루 버무려 놓은 것 같다. 이게 다 컴팩트한 차체에 밸런스 좋은 V6 엔진을 조합해 넣은 덕분이다.
7G-트로닉의 변속은 정말 재빠르게, 순식간에 이뤄진다. 1단에서 시속 55km를 넘어서고 연이어 2단에서 시속 80km를 찍는다. 곧장 이어지는 3단에서는 120km에 도달하고, 바로 4단으로 바통을 넘긴다. 4단에서의 최고시속은 170km. 시속 200km쯤 가뿐하게 넘기는 가속력에 비하면 무척 촘촘하게 이뤄지는 변속이다. 짐작하듯 변속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반응 또한 정말 빠르다. 즉각적인 변속이 연이어 이뤄진다. 수동모드로 옮겨놓고 가속을 진행할 때도 D-레인지에 고정해두었을 때처럼 스테디한 변속감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시승 도중 몇 차례 테스트한 결과 0→시속 100km 가속은 평균 8.8초를 기록했다. 도로 여건이나 운전실력 등 여러 조건을 감안하면, 제원상 가속력(8.5초)에 거의 100% 근접한 기록이라 할 만하다. 트립미터에 새겨진 2박3일 동안의 평균 연비는 8.3km/ℓ.
하체가 너무 단단한 탓에 고속 코너링에서는 오히려 차체가 조금 튀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예의 레일을 따라 달리는 듯 정확한 핸들링 반응은 여전하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 시속 100~120km 정도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램프를 파고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로 해낸다. 고속에서의 풍절음도 그리 크지 않은 편. 시속 120~140km까지는 귀에 거슬릴 만한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론, 그 이상 속도를 올리면 풍절음이 커질 수밖에 없지만. 세계 최고 권위인 모터스포츠 전문잡지 영국의 <F1 Racing> 최근호는 "올해 그랑프리에 출전하는 F1 머신들 중 메르세데스 벤츠 팀의 에어로다이내믹 디자인이 가장 앞선다"고 평가했다. 똑같이 적용될 리야 없겠지만, 효율적인 공기역학 디자인은 비단 F1 머신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하라, 신형 S클래스의 공기저항계수가 0.26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C클래스의 에어로다이내믹 디자인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AMG 액세서리를 갖췄지만, C 230 V는 결코 고성능 스포티 세단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속으로 몰아대면 몰아댈수록 이 차의 매력은 더해간다. 바싹 긴장한 채 한계까지 몰아가고 있노라면 여기저기 숨어있던 이 차의 강점들이 스멀스멀 배어나온다. C 230 V는 처음 운전석에 앉을 때보다는 하루종일 운전하고 나면, 하루 꼬박 운전했을 때보다 며칠 계속 운전하고 나면 더 끌리는 차다. 5천만 원대 중, 후반의 차 값은 비슷한 성능의 BMW보다 싸고 렉서스보다는 비싸다. 성능 좋은 컴팩트 프리미엄 세단을 사려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행복한 고민만 늘어나게 됐다.
230 V AMG-PACKAGE
Verdict : 벤츠의 장점들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성능과 승차감 모두 흠잡을 데 없다. 벤츠 엠블럼을 무색케 하는 대시보드 재질감만 아니면 천하무적에 올랐을 차다
Price : 5,950만 원
Performance : 0→시속 100km 가속 8.5초, 최고시속 238km, 연비 9.1km/ℓ
Tech : V6 2496cc, 204마력, 25.0kg·m, FR, 1885kg
에어컨(O) 네비게이션(×) CD플레이어(O) 알루미늄 휠(O. 17) 가죽시트(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