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호
강원도 화천군과 양구읍에 걸쳐있는 호수
본래 대붕호 혹은 화천저수지라 불렸는데 1955년 파로호로 명칭이 바뀌어버림.
바로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용문산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내고
패주병들을 여기 파로호까지 추격해 모조리 수장시켜버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이 승리를 기념하여
破 ( 깨트릴 파 ) 虜 ( 오랑캐 로 ) 즉 오랑캐를 깨트린 호수로 명명함.
파로호 전투당시 사살,익사,수장된 중공군의 수는 24,000명에 달한다함.
이와 같은 전과를 올린 부대는 바로 상승불패의 청성 부대 입니다.
용문산 전투 당시 어떠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결사" 철모
현리전투 패배를 잊지않고 칼을 갈던 장도영 장군
신화를 창조한 6사단 청성 장병들
중국의 압력으로 파로호 이름을 바꾸자는 일련의 행동들이 있는데,
절대 있을수 없는 일 입니다.
그로 인하여 한국군은 재정비및 유엔군이 한국에 올 수 있는 시간을 벌었죠.
그로 인하여 한국군은 재정비및 유엔군이 한국에 올 수 있는 시간을 벌었죠.
전라도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한 사람이 그런 것이다
그래 따지만 경상도 사람이라 광주사람 총쏴 죽였냐?
참고로 난 경상도 토박이다.
이런 짓이 대한민국 병들고 약하게 하는 매국 짓이다..
구닥다리 정치적 술수 부리지 마라 그러고 싶으면 정게로 가~~
여기서 더러운 술수 부리지 말고...
개전초기 상황을 보면, 개성,문산의 1사단 과 강릉 8사단, 춘천6사단 모두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어느정도 전선을 고착화 시킬 정도로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철원-의정부-서울 방면 7사단이 앞도적인 병력,화력차 그리고 병력의 축자 투입 등 연이은 전술적 실수로
붕괴 되면서, 좌우에서 선전하고 있던 1,6,8 사단들도 전선유지를 위해 밀려났다고 보는게 정확한 겁니다.
나중 참모총장이 된 장군
맞나요?
탤런트 노주현 님이 맡았던 인물이내요
썩는 냄새가 나서
본인은 바지사장이란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조선 노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야마토숙 출신, 일제 식량수탈기관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야마토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최승희 -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김달삼 - 조선 노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 소위)
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로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
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하 검찰총장)
정준택 -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 -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6사단~ 6사단~ 대한의 6사단~"
유엔군은 푸른별 마크를보면
겁쟁이들이라고 침까지 뱃어댓다고함
가평전투에서 영연방군이 틀어막음
용문산전투에서 몇배로 되갚음
여세를 몰아 파로호있는 화천까지
영토확보 명예회복
육본명령이 아니라 사단장 명령으로 한거지만요.
그건 3사단이요
양양에서
3사단은 육본명령으로 공식 돌파구요.
38선에서 고착됐을 때 6사단에서 38선을 넘어 점령하라는
사단장 명령으로 점령한 곳이 저 파로호거든요.
이후 육본이 3사단에게 돌파명령을 내렸고 뒤따라
유엔군도 북진을 시작했구요.
그래서 공식기록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3사단이지만,
38선 첫 돌파는 6사단이 가지고 있어요.
의외로...6사단의 38선 최초돌파는 모르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3.8선돌파는 50년10월1일
용문산전투결과 전과확대로 파로호까지
진출한건 51년5월28임
아마 공식적으로 구만리 발전소 점령한 것도 10월 6일로 나올 겁니다만,
10월 1일 돌파명령 이전에 이미 화천 파로호 구만리 발전소는 6사단
7연대 2대대가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이 부분은 당시 6사단장이던
김종오 사단장의 기록에 나와있는 거구요. 굳이 최초라 하지 않는 이유는
육본의 공식명령에 의한 돌파가 아니고, 돌파를 유도하는 명분으로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6사단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최초라 안하죠. 국군의 날도
10월 1일로 정해지고 최초 부대도 3사단으로 올라 있는데 굳이 시끄럽게
안하려 한것도 있구요.
3사단이 38선 최초 돌파 부대다.....하고,
공식적인 돌파는 3사단, 비공식적인 돌파는 6사단...이라 발견해주는 것도
후대가 할 일이기도 하구요.
님이 말하는 51년 파로호는 중공군 남하로 밀려 내려갔다가 다시
치고 올라가면서 3번씩 주인이 바뀐 전투입니다. 여기서도 6사단, 해병 12연대
그리고 미군들의 지원을 받아 그 호수에 중공군 3개 군을 수장시켰네요.
중국이 호수 이름 바꾸라고 개지랄 떨었다죠?
한 번 더 수장되고 싶은가 봅니다.
6.25당시는 1연대 하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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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이었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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