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의 인물, CIA 비밀요원 유일한 박사(유한양행 창업주)를 아시나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기업인으로 칭송받는 유한양행의 창업자이자 독립운동가.
그는 미국 CIA(미국중앙정보국)의 전신인 OSS(미육군전략처)의 비밀요원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과 회사를 버리고 헌신해 주목을 받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의 이름 '유한(柳韓)'과 세계로 통한다는 뜻의 '양행(洋行)'을 합친 말이다.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들표'는 유박사의 성에 착안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박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한국 기업인이다. 그는 1971년 사망 전 "주식은 전부 학교에 기증하고 아들은 대학까지 공부시켜줬으니 이제부터 자신의 길은 스스로 개척하라"라는 유서를 남겼다.
실제로 유박사는 1969년 회사를 전문 경영인에게 물려줬다. 다만 당시 7살이던 손녀에게는 학자금 1만 달러(한화 약 1100만원)을 주고 딸에게는 묘소 주변 땅 1만6000㎡를 물려주고 나머지 재산은 모두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부 ~.
이 재단은 1977년 우리가 아는 유한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한킴벌리 이종대 초대 회장은 유일한 박사가 가족보다 민족을 우선시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딸이고 아들이고 회사에 개입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공한 기업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부자라는 호칭외에도 유박사에게는 독립운동가라는 닉네임이 하나 더 있다.
사실 유박사는 청소년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길을 걸었다. 유박사는 일제 강점기인 1905년 10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나라를 구할 인재가 돼 돌아오라는 아버지 유기연 씨의 선택으로 유일한 박사는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유박사는 14살 때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고 24살 때에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에서 서재필, 이승만 박사와 함께 결의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또 재미 한인들이 참여한 군사조직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것은 유박사가 미국 CIA(미국중앙정보국)의 전신인 OSS(미육군전략처)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다. 유일한 박사는 한반도에 침투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는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미국의 비밀 군사작전의 특수공작원이. 유박사는 당시 성공한 사업과 가족을 뒤로 하고 작전에 참여한다. 이 사실은 CIA의 비밀문서가 공개돼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독립한 후에도 유박사는 민족의 발전을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한다. 1964년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팔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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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분이고.
독재자들... 이승만 박정희에게 굴하지 않고 정치 한금 1원도 안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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