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배구계 다영 재영의 학폭으로 시작되었다.
축구계에선
기성용선수의 폭력을 주장하는 피해자들이
폭행가해자였음 실토하였다.
연예계도 학폭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에이프럴 나은
아이돌 수진
달이 뜨는 강의 배우 지수
등으로 이어지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덩치가 크고 운동을 잘해서
운이 좋게도
학폭을 친구로부터 당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학폭을 분명히 당했다.
나는 학폭의 피해자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한 피해자다.
그리고 학폭의 가해자는
바로 사랑의 매라는
적당한 핑계거리로 무장한 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던
학교 선생들이었다.
1. 초등 6학년 ㅡ 교장
내가 맞은 건 아니지만 가장 충격적인 기억이다
1988년 당시
머리가 희끗한 교장 선생은
자기 앞을 지나쳐 복도에서 뛰었다는 이유로
5학년 여자아이의 뺨을 때렸다.
그것도 뺨대기가 아니라
주먹으로 내리쳤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교장 뒤에 서있었던
교감 이하 예닐곱 명의 선생들이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구타가 만연하던 시절이라서 그랬을까
교장의 권력이란게 그랬던 거였을까
2. 중1 ㅡ 체육선생
본격적인 학폭은 중학교때부터였다.
정글이었다
선생이 학생들 두드려 패는건 일상이고
일진이 학생들을 패고
3학년이 2학년을 패고
1학년이 약해보이는 동급생을 패는
약육강식의 정글.
체육선생은 차렷자세에서
나의 눈알이 돌아갔다는 이유로
나를 앞으로 부른 다음
가슴을 발로 걷어차고
넘어진 나를 발로 짓이겼다.
just one of them
맞지 않는 게 다행인 하루가 그 시절이었다.
3. 중2 ㅡ 담임수학선생
내가 맞은 건 아니었다.
중3 두 명이 내 반 교실로 놀러와서
교실 뒷문을 걷어차는 바람에 문이 고장났다
반장이었던 나에게
담임선생이 당장 그들을 잡아오라고 외쳤다.
담임선생은 죄없는 문이 다쳤으니
너희도 다쳐보라고 외치며
미리 준비해둔 망치로
아이들 머리를 두 방씩 가격했다.
머리에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진 모습을 지켜보며
여자라도
선생은 자비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4. 고1 ㅡ국어선생
일본에서 소설이나 잡지 등을
보따리상으로 수입하셔서
헌책방에서 파셨던 아부지는
종종 나에게 일본잡지를 선물해주셨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교실에서 일본잡지를 본다는 이유로
국어선생은 나를 교실 뒤로 불렀다.
싸대기를 수십차례 당했다.
매국노새퀴라면서
잡지가 찢어질 정도로 얼굴을 맞았다.
나를 일본 앞잡이 취급했던 그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을 자퇴시킨 후 결혼했던 걸
자랑스럽게 수업시간에 말하던 놈이었다.
며칠 후 전국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후
국어선생이 찾아왔다.
당시 서울대 가장 많이 보내던 학교에서
반2등 성적인 걸 알고는 때린 거 미안하다고 하더라.
그러고보니 학창시절
성적이 나온 후 선생들이 온순해졌다.
공부를 잘해야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5. 고1 ㅡ 수학선생
겨울방학 보충수업이었다
고3수학선생이
짧은 방학 보충수업 알바뛰던 첫날이었다.
첫날 학생들의 군기를 잡고싶었나보다.
졸고있던 친구를 일으켜세우더니
빰때기를 시작으로
가슴 머리를 주먹으로 가격하더니
발로 허리를 걷어차는 거다.
당시 학교 3대 악마라 일컫던 이유를 실감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그 선생은 친구에게 사과했다.
그럴만도 한게
대구 명문 사학재단 이사장의 외아들이었던 친구를
그 어떤 선생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가 그 놈이었구나
라는 말을 하면서
순한 양의 눈빛이 된 그 선생을 기억한다.
돈과 권력을 가져야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사랑의 매라는 그럴듯한 핑계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했던
그 시절의 그 사람들..
선생이라는 권력의 힘을 가지고
신나게 두드려 패던 시절이었다.
맞아서 귀의 고막이 터지고
뼈에 금가고 그러던 시절
그런 학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은
딱 두 가지 였다.
선천적인 방법은
부자집에 태어나야 한다
후천적인 방법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
6. 고2 ㅡ국어선생
이유라면
그날 굉장히 더웠고
불쾌지수가 높았던 거였다.
책에 낙서를 하다 걸린 것으로
그렇게 맞을 수는 없었다.
뺨대기부터 시작해서
샌드백으로 맞듯이
나의 온 몸을 두드려 팼다.
거의 십분간 구타가 이어졌다.
어금니가 흔들렸고 코피가 터졌다.
그날 저녁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자신도 미안했던지
다시 나를 부르더니 악수를 청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화해마저 강요받았다.
별 시덥지 않은 다양한 이유로
선생들은
그렇게 그들의 화풀이를 했던 시절이긴 했었지만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최악의 학교폭력을 당했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렇다고 차마 선생을 때릴 순 없었다.
그래서 내가 교실을 떠났다.
나의 방랑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의 소중한 학창시절 1년이 사라졌다.
피해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고
가해자는 여전히 고액의 사학연금 받으며
잘 먹고 살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참 착하다.
그렇게 두드려 맞고도
군말없이 잘 참고 지내고 있다.
선생들의 학폭이 일상인 시대라서
단체 그루밍이라도 된듯하다.
올해
그 인간을 찾아가고자 한다.
왜 그렇게 학폭 가했냐고
기억이나 하냐고 꼭 물어봐야겠다.
교육청 홈페이지 검색부터 시작해야겠다.
p.s 진정한 학폭 가해자들
그들의 사과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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