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 앞집에 특별한 아주머니가 새로 이사왔습니다.
언제나 멋진 모자에 화사한 스카프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다니는 아주머니입니다.
이웃과의 왕래도 없고 가끔씩 만나도 눈을 아래로 깔고 혼자 다니는 아주머니의 소문이 아파트 안에 무성했습니다.
"무슨무슨 극단의 연극 배우라더라."
"어디어디 밤무대에 선대."
"손에 물 한 방물도 안 묻히고 여왕처럼 산다나 봐."
"모자와 스카프만 한 방 가득하다지 뭐야, 글쎄."
그 아주머니가 실제로 누구와 마찰하거나 피해를 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날마다 곱지 않은 시선만 늘어갔고, 같은 통로에
사는 아주머니들은 차 모임이 있어도 그 아주머니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괜히 그 아주머니가 거북하고 싫었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오다가 문 앞을 쓸고 있는 아주머니와 마주쳤지만 나는 피하듯 얼른 집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엄마 엄마, 그 아줌마 정말 웃겨요. 배우면 다 저렇게 티를 내야 하는 건가. 현관 앞을 쓰는데도 모자를 썼더라구요.
너무 웃겨요. 그치요?"
함께 웃어 줄 엄마의 맞장구를 기다리는데 엄마의 얼굴이 다른 때 같지 않았습니다.
"그 아주머니 연극 배우 아니다!"
"그으럼?"
"불이 나서 큰 화상을 입었다더구나.
얼굴은 성형수술을 몇 번이나 했대.
손가락은 살점이 많이 떨어져 나갔고 머리 위쪽은 아예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는다더라."
"네에? 정말이요?"
"낮에 은행에 갔다가 앞집 아주머니를 만났어. 돈을 세는데도 장갑을 끼고 쩔쩔매기에 도와 주었다.
같이 돌아오게 되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어렵게 대답해 주더구나.
모습이 너무 흉해서 외출이 두렵대. 한 번 나가려면 너무나 신경을 써서 식은땀까지 쏟는다더라.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까. 여름엔 또 얼마나 괴로울까.
소문에 눈이 멀면 강아지도 여우로 보인다더니, 공연히 가엾은 사람을 ..."
강아지와 여우...
나는 갑자기 정미 생각이 났습니다.
눈동자 깊숙이까지 슬픔이 고여 휑해 보이던 정미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콱 막혔습니다.
하루 종일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가끔 슬며시 교실 밖으로 나가곤 하던 정미.
말끔한 인상이 깍쟁이처럼 보여 왠지 친하기 힘들 것 같았던 정미는 2학기에 들어와 같은 실험조가 되면서 속을 알게 된 아이입니다.
나직나직한 목소리에 가만가만 웃는 정미는 잔잔하지만 속이 깊었습니다.
내가 "가슴이 작아 걱정이야"라고 은밀한 고민을 털어놓았을 땐
"가슴과 머리는 반비례한다"며 나를 기분 좋게 추켜 주었고,
내가 정미 보다 토끼 꼬리만큼 더 성적이 좋았는데도 공부 잘 하는 친구가 있어 든든하다고 겸손해 했습니다.
정미와 나는 점점 가까워져 갔습니다.
둘이 똑같이 영어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유치한 사실조차 우리를 이어 주는 끈이 되어,
영어 시간이면 둘이서 남모르게 눈길을 주고받으며 쿡쿡거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일로 정미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정미 어머니가 연거푸 몇 번 학교에 다녀가신 뒤 선생님들의 관심이 유난히 정미에게 쏠리자 몇몇 친구들이 수군거리며 공공연히
정미를 따돌렸습니다.
우연히 영어 선생님이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는 것을 보았던 나 역시 한 마디 말도 없이 정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방학하던 날 정미는 머뭇머뭇 무언가 나에게 말하려 했지만 나는 모른 척 지나가 버렸습니다.
앞집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정미 어머니가 학교에 다녀가신 즈음부터 그 애의 교복주머니에 매일 들어 있던 자그마하고 네모난 약 봉투가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그것으로 인해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이 정미에게 더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영어 선생님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아니면 내가 정미같은 따돌이가 아니라는 다행스러움에 급급해,
눈먼 소문에 묻혔을 정미의 진심을 한 번도 헤아리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이 막 밀려왔습니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정미의 말간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습니다.
"눈이 와. 올해는 눈이 참 많이 온다. 하늘도 덮어 줘야 할게 많은 걸 아나 봐.
저 눈들이 가슴으로 내리면 상처들이 덮어질 수 있을까?
정미야, 네 이름 부르기가 미안해. 용서해 줘. 이번 겨울엔 우리 서로의 가슴으로 눈을 내리자.
포근하게 쌓인 사랑 밑에서 상처마다 부드럽고 하얀 새살이 돋아 나도록."
나는 수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정미의 이름을 찾는데 가슴이 떨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은희구나. 은희 맞지? 눈 보면서 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고 싶었던 말들이 눈이 되어 가슴으로 하얗게 쌓여 갔습니다.
- 신난희 님 / 동화작가 -
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