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신흥무관학교에 관하여 내 기억과 자료를 참고, 소개해 본다.
우리나라 독립(무력)투쟁사는 그 산실인 신흥무관학교(=강습소)의 역사와 돌일하다고 말할 정도로, 신흥무관학교의 위치는 대단한 것이다. 국사책에 한 두 줄 나올 정도의 것이 아닌, 말하자면 무장독립 운동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 커리큘럼과 강의시간표를 보면 매우 전문적이고(예, 중국어, 총검술, 구급의료) 합리적인 것이라 과목명만 바꿔 해석하면 지금의 사관학교 교과목이랑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거기다가 모든 과정 그러니까 먹고 자고 입는 것들이 모두 무상으로 실시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총 졸업생은 4,000명에 육박했고 이들은 모두 무장투쟁, 교관 등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 명단은 300명정도 밖에 전해지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외지에서 투쟁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그 밀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독립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국내에서 투쟁하는 것의 한계를 느끼고 영역을 옮겨 만주에 근거지를 삼으려한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이동녕, 이회영 등을 파견, 우선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 추씨 지단촌)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들(원래 대부호였음)이 준비했던 40만원(현재가치 600억)으로 땅을 겨우 구입하고 1911년 강습소를 설치하는데 이는 당국의 감시를 피할 목적이고 실은 군사학교였다.
지석규(지청천, 이청천)는 정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다. 그런데 뜻을 가지고 신흥무관학교에 교관으로 온다. 이런저런 소문으로 전국 각지에서 뜻이 있는 젊은이들이 만주 신흥학교로 모이게 되자, 그 인원을 감당치 못하여 유하현 고산자가 등 몇군데에 분교를 설치한다. 졸업생은 의무적으로 2년정도 학교에 봉사하는데 분교의 교관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1920년 일제의 탄압, 중국의 압력 등으로 폐교한다. 그러나 지청천은 300여명을 이끌고 홍범도, 김좌진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한다. 지청천등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교관, 교리, 전술에 주력하고, 김좌진부대는 무기를 넉넉히(러시아의 자유시에서 무기구입이 수월) 가졌으므로 합당한 연대였다. 1920년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대파한다.
일본측은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러시아(자유시, 自由市)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국경지대에 모인 독립군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이 탄생하였다. 이때의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다. 1921년 자유시 일대에 주둔, 치타에 있는 레닌정권의 완충정부와 공동작전 및 상호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소련의 원조를 받아 장비를 보강하여 본부를 이르쿠츠크(바이칼호 서쪽, 상당히 먼 거리)로 이동, 주둔하고 지청천을 교장으로 하는 고려군관학교를 개설하여 사관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일본과 소련은 캄차카반도연안의 어업문제에 관한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일본측은 소련 영토내의 한인혁명단체 육성에 위협을 느껴 이의 취소를 요구했다. 혁명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고 1921년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를 내렸으며 이에 완강히 반대하는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독립군의 수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유시참변-
신흥무관학교는 대략 1910년대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조선갑부의 돈으로 설립된 만주의 사관학교다. 대략 10년간 존속하였지만, 그 출신들은 만주, 연해주, 중경(충칭, 중국 중남부 깊은 내륙)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고, 1940년대 대일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제시대 대일무장 항거의 본거지는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 등이 있다. 군정서(軍政署)- 경찰서, 소방서 처럼, 서(署)는 관청부서를 말한다. 군정서는 군정(군사정책)을 보는 관청부서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