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압박이 있지만,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가슴아픈 역사가 아닌가 싶네요.)
대한민국 국민이라 눈물 흘린다
기사입력 2013-04-01 03:00:00 -동아일보
박정희 前대통령 통역관 백영훈씨에게 듣는다
“국민 먹여살릴 돈 빌려달라
”1964년 12월 8일 만찬장에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호소하는 박정희 대통령.
가운데가 백영훈 통역관이다.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에게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 우리는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며 울먹였다고 백 통역관은 증언하고 있다.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몰표를 던진
50대 이상 유권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딸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아버지 세대’가 이룬 경제 기적의 역사라는 과거를 보는 동시에
새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런 한편에서는 최근 법원의 긴급조치 위헌 판결 등 독재 시대 민주화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관통해 왔던 상반된 가치와 관점들이 한꺼번에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 갈등과 함께 성장이냐 복지냐, 안보냐 경제냐
하는 논란에 세대 간의 갈등까지 있다.
많은 사람이 사회통합을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화합만이 ‘통일시대’라는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는 말을 남겼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미래 역사로 전진하려면 과거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박정희 시대여야 할 것이다.
삼성이 소니를 이기고 현대자동차가 세계를 휩쓸고 문화 스포츠 한류가 세계를 강타 하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우리 내부에 있는 갈등은 무엇이고, 우리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정리할 때가 됐다.
우리는 거기서 얻는 교훈으로 미래로 가는 엔진의 힘을 재충전해야 한다.
전쟁 이후 잿더미라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려면 초심(初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동아일보는 창간 93주년 기획을 통해 이제 막 대통령이 되었던 ‘1964년 박정희’의 이야기를 싣기로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음’을 보았던 사람으로 1964년 말 서독 국빈 방문에 통역관으로 따라간 백영훈 당시
중앙대 교수(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사진)가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그는 가난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젊은 박정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 1000m의 갱도에서 목숨 바쳐 일했던 파독 광부들과 동양에서 온 천사라는 말을 들으며 헌신했던
파독 간호사들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초석이라고 말한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기획물로 이념의 잣대가 아닌 역사의 주역 국민의 관점으로 현대사를 정리할 것이다.
‘젊은 박정희’의 모습은 그 첫 회 격이다.
▼ 차관사절단 “돈 못빌리면 서독서 죽겠다” ▼
‘50년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 - 박정희 통역관 백영훈씨 증언
한국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서독 상업차관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백영훈 원장.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권 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 박대당한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 금융기관들도 야박하게 퇴짜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 ‘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 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서독 경제는 1950년부터 매년 연평균 8%대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의 모습을 보며 박정희는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
라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경제학 박사 1호
백영훈 씨 (83·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가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한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관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 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결국 매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시 백 원장의 말이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독일 최고훈장인 특등십자대공로훈장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
한국 정부도 서독 대통령 내외에게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
“못사는 나라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백 원장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과장은 다음 날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고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대 1의 경쟁률이었다. 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했다.
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1963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 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가짜 광산취업 증명서를 사서 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 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
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 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 생산(GNP)의 2%에 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차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백 원장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한 뒤 다시 중앙대 교수로 복직한다.
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년 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
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
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 라인강 기적 설계자 “고속道 깔고 車-제철-정유 육성” 조언 ▼
서독 방문길에 베를린 장벽에 서서 동베를린을 바라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옆 키 큰 이가 백영훈 통역관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독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북한을 보았습니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수고한 자유 베를린시의 공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갑
자기 취소해 버리고 만 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 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제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 에게 부탁하여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다.
최 전 사장은 독일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
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비행기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 운을 뗐다.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년 12월 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했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 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해외 경험이 없었는지는
비행기에 동행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이자헌 기자의 회고 (‘파독 광부 45년사’)에 잘 나와
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1등석에 타고 다른 일행은 이코노미석에 탔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로 포함됐던 한국일보
정광모 기자가 ‘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자들도 국제적 촌놈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였다.
기내의 박 대통령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 백 원장의 설명이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에 방영 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28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1964년 12월 5일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백 원장은 그날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보여 준
박 대통령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당시 마흔일곱이던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총리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 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 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 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
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다음 날은 박 대통령이 독일의 한 공과대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독일 사람은 교수가 강의하러 들어오면 박수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수차례 가볍게 두드리
는데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처 대통령께 전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야유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통역관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 양반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는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학생들이 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아. 무시가 아니라 경청의 의미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 안심하고 원
고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웃음).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박 대통령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농담조로 핀잔을 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한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강의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손수
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 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
서독에서 머문 일주일(7∼14일)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총연장 1만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은 박 대통령이 방독할 무렵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로 유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 비용과 건설 기간, 건설 장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결국 3년 뒤인 1967년 11월 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기에 이른다.
백 원장은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박정희’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경험이 나의 평생 삶을 이끌어 준 나침반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중간쯤 자동차를 전부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남편 때문에 울고 광부와 간호사 때문에 울고.”
백 원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박 대통령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 백영훈 원장 프로필 ::
△고려대 상대 졸업, 서울대 경제학 석사, 독일 에를랑겐대 박사
△중앙대 상대 교수, 상공부 장관·대통령경제고문,
한국방위산업학회 회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 역임,
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은탑산업훈장, 대통령 유공기념비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 독일연합공화국 대십자훈장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출처] 대한민국 국민이라 눈물 흘린다|작성자 고로쇠
글 맥락하고도 안맞는 그놈에 쪽빨차 타령 일본차 살 생각도없지만 님이 그러는게 일본차 타는사람보다 더 보기 싫다는건 생각안해보셨는지
님이 그렇게까지 안해도 안탈사람은 안타요
병..ㅋ
당시 민주주의 시대에 있는 국가와 지금의 우리나라 배경으로 보자면 반사회적임엔 틀림없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저렇게 살린 독재는 당시 불가피했다고 봅니다. 저 시대에 대해 평가해보고자 할땐 저 시대적 배경에 따른 사고를 해야 맞지 않을까요...?
이런게 과연 훌륭한 업적인가?
진짜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사기를 치지 않고도, 국가와 국민들을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일것이다. 결과를 가지고 말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발 착각 좀 하지 말고 역사 인식 좀 제대로 갖고 살자.
하지만 먹을거 입을거 걱정을 덜어준것도 사실입니다. 힘든시기였다고 들었습니다.
그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겠죠
4대강같이 다양한 국책사업 외국에 국민이 떠안을 빚내벌이면서 기본으로 5-10%꺽기로 돈받아 쳐먹던 놈이다.스위스은행에 쳐막아놧고 오죽하면 캐비넷에서 돈다발 나온거 당시돈으로 6억 닭근혜한테 주었을정도냐...거다 국민 피덩어리지....
앞에선 막걸리 쳐먹었지만 뒤에서는 20살 닭근혜 또래 연예인이나 창녀들 데려와 양주쳐먹으며 주물럭거리고 따먹다 오죽했으면 부하에 총맞아 뒤졌겠냐? 기쁨조 원조는 박정희잔아 요즘으로 말하면 아이유,현아 수지같은 년들 안가로 끌고와 따먹었단 예기잔아....
일베충들아 생각좀하라고 도덕성과 법치를 가지고 판단해야지...근거도 없는 경제한가지로 독제살인 색골친일 빨갱이 기회주의자 색휘를 영웅이라 빨아대냐??
박정희는 국민을 독재로 강간하고 유린한 놈이다.
헌데 일베충들은 그강간이 기분이 좋았댄다.후장좀 따여본거냐? ㅋ
경제를 살려?? 박정희의 강간으로 경제란 새퀴밴건데 지금의 썩은 재벌가 빈부격차 특권층을 야기한 재벌경제란 애새퀴가 마음에 든다는거냐??
여전히 널 등쳐먹고 호갱이라 여기는데.....ㅋ
일베충들을 보면 강간당해도 기분좋았으니 괜찬다 할놈들이쥐....ㅋ
니 우리민족끼리지?
저학력 저소득 약자들도 잘살수 있게끔 사회구조와 법..그리고 국가가 책임을 지고 다함께 잘살게끔 하는 역할이 이젠 필요합니다....강자위주의사회구조.유전무죄의 구조를 바꿔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을 것 입니다
니논리면 넌 김일성이도 영웅이겠구나 항일무장투쟁벌이며 식민조선 독립에 이바지했으니까 니 논리면 김일성이도 적용이 되는데??지금이만큼 사는것도 식민지배로 부터 벗어난게 시초잔아....ㅋ 같은 살인독재자 김일성을 영웅이라 해봐라 ㅋㅋ
하지만 제대로 역사 인식 박힌 사람치고 박정희, 이승만의 업적을 업적이라 표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의 노인분들 그 당시 못 배우고, 먹고 살게 해 준것에 박정희에 대해 감사한 마음 있는거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적어도 옳고 그름은 알아야죠...
전두환때도 깡패들 없어서 살기 좋았다고 평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의 업적?? 그게 옳은겁니까?
웃긴거 하나 알려 드릴까요?
전두환이 죽인 사람이 박정희, 이승만이 죽인 사람수보다도 훨씬 적었다는거?
단지 경제를 발전시킬수 있었고, 먹고 사는게 중요해서 사람 죽인게 정당화 되고,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유로 정당화 한다는게 옳은 일 입니까?
제가 이상에 가까운 소리 한다고 하시겠죠?
그 당시 박정희의 지지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고
앞으로 자신의 위기가 직면해 오자, 그 위기의 탈출구로 경제를 택한겁니다.
옳고 그름은 확실하게 알고 말 해야 됩니다.
박정희를 욕 하는 사람들도 박정희가 결과론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킨건 압니다.
전두환이 깡패를 몰살시켜 국민들이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줬다는것도 압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훌륭하다고 말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박정희가 존경 받지 못 하는 이유입니다.
좀 더 공부 해 보시면 박정희가 왜 경제를 택했는지 이유를 아시게 될 것 입니다...
괜한 고생 마세요. 벌레들이 왜 엽유게시판에 ㅎㅎ
1. 난 역대 대통령중에 하나도 맘에 드는 넘이 없었다. 다 맘에 안든다. 혹은 경제고 뭐고 원칙적으로 불한당 같은넘들 난 그냥 독재했던 넘들 중 하나인 박정희가 싫다. ---> (A)
2. 난 역대 대통령중에 xxx가 젤 맘에 들어서 그외 반대되는 대통령 옹호하는 꼬라지 못본다. -> (B)
3. 빨갱이니까 그런 얘기하지 넌 그냥 친일파지? -> (C)
(A) 전세계 다른 대통령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업적 비교분석해서 글하나 올려주시길 .. 같이 알고 같이 욕하고 왜 우린 이런 인물이 없었나 같이 한탄해 봅시다.
(B) 윗글처럼 그 인물에 대한 번듯한 글 한번 게시 해주셈. 장단점 꼬집어 봅시다.
(C) 애초에 이런 마인드 갖고는 국개의원들 같은 꼬라지 밖에 안남 대화 불능.
-----끝-----
걍 그러려니 해요ㅎ
전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존경함.
나머지는 말할가치도 없는 떨거지들이고..
지금쯤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어를 쓰며 일본인과 똑같은 행세를 하고 있겠죠..
비자도 일본 비자고... 외국 나갈때 일본인 대우 받으며 풍요롭게 살고 있겠죠..
또한, 독일이 세계를 지배했다면?
우리는 독일제 자동차를 타고, 더 빨리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겠죠?
참고로 그 당시의 제국주의는 먹고 사는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강대국에서 일으키는 법이죠...
전쟁이란 절대 먹고 살기 힘든 국가가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법 제1항이 뭡니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목숨만큼 중요한게 있나요? 자유와 평등 이 보다 더 중요한게 있나요? 왜 박정희가 박정희가 업적에 가려져 독재자로 몰릴수 밖에 없는지 세월지 지나면 지날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혹독해지고 냉철해 질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진행중이구요...
일제시대 반자이만 외치면 먹고 사는거 다 해결되었고... 개명하면 더더욱 삶은 풍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독립을 위해 싸웠고, 희생되고 지금의 우리가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 독재시절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들이 싸운것이 독재하면서 이룬 경제와 비교가 될 수 있는건가요?
정말 개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일본이 우리나라 경제를 한단계 발전시켜 줬다는게 맞는 말이랑 정말 다를바가 없습니다...
지금의 국방부 장관이 권력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성공했다고 칩시다...
이게 민주주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겁니까?
먼 훗날 이 장관의 업적이 박정희 보다 더 훌륭하다고 가정한다면?...
그래도 이 장관은 훌륭하다고 평가해야 되는 겁니까?
박정희를 결과론적으로 훌륭하다고 한다면 이 장관도 훌륭하다고 평가해야 되겠죠?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독재를 막았던 이유는?...만약 지금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지금의 국민들 마음과 똑같을 겁니다.
박정희가 가장 원했던 것의 결과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였죠...
본인의 잘못은 덮고 결과를 가지고 자신이 후대에 평가 되기를 바랬던...
잘 돌아가고 있네요...지금의 쿠데타라면? 여러분들 받아 들일수 있을런지 묻고 싶네요...
민주주의는 다져지고 다져져서 높은 문화시민을 만듭니다...
단기간에 경제력을 갖췄다고 시민의식이 높아지나요? 아님 삶이 풍요로워 져서?
그렇다고 시민의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그렇죠? 중국은 더 그렇죠? 졸부들만 넘쳐나고 개념이 없어지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요소 때문에 그렇습니다...
독재정권... 언론탄압...
현실에서 벗어났다구요? 그럼 어떻게 유럽의 국가들은 2차대전의 황폐화 속에서 그렇게 다시 일어났을까요? 지금 님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어요...
민주주의가 후퇴될 수 밖에 없었던 요소 중 하나가 박정희 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자행한것도 박정희구요...근데 어떻게 미국의 시민의식과 유럽의 시민이식을 여기에 비교를 합니까?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걸 망쳤던 첫번째 인물이 바로 박정희인데요?...
그런데 거기에 국민들 탓을 하다뇨? 박정희가 국민들이 뽑아 준 대통령입니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되고, 국가를 이끄는 사람은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해야죠...
국민이 멍청하다고 해서, 국민을 억압하고 탄압하는게 국가가 해야 될 일은 아니죠...
장애인, 노인, 사회적 약자 이런 사람들을 보호하는게 민주주의 국가 아닌가요?
그때는 사람들이 무식했고, 못 배워서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고 독재를 하는 것이 국가가 할 일 입니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 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게 맞는것이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 나라를 떠나야죠... 쿠데타가 민주주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입니까? 그리고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반하는 쿠데타를 단지 경제발전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님이야 말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인 이 나라에 왜 살고 계십니까??
무슨 민주화니 독재니 이따구 말을하노!
박정희 대통령 계셧기에 차 몰고 댕기고, 이만큼 산다
굶어본적 없는 것들은 그냥, 글이나 읽고 조용히 나가라
무슨 댓글을 다노 니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가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 수 없었다고요?
일본의 침략과 근대화가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수 없었단 말 같네요
독재와 강압이 없으면 발전 할수 없다고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노예 입니까?
"조선인은 맞아야 정신차린다" 이건 일제가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스스로 노예근성에 빠지게 하기 위해
세뇌했던 말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를 그당시 언론이 많이 미화 했지요
지금의 언론도 개판인데 그때는 오죽했을까요?
그 그릇된 언론보도를 아직도 믿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 입니다.
정말 제대로 알아보고 미화 합시다
독재라는것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독재자가 득세하는 나라 치고 잘사는 나라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세계가 독재국가 겠네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 잘못했다는건 아닙니다 물론 잘한것도 있지요 예를 들어
국민건강 보험같은건 다른 나라에서도 부러워하는 제도입니다
박 전 대통령때 시행되어 자리 잡았죠
단지 그가 쿠데타, 독재까지 하면서 한 업적이 너무 미화 되었다는 것이죠
마치 박 전 대통령이 없었으면 이 나라가 아직도 기아에 허덕이고 있을거 같이 말이죠
우리 스스로를 너무 비하하지 맙시다 강압과 독재가 아니어도
우리는 충분이 가능성있고 발전할수 있는 위대한 민족입니다
쪽바리들이 심어준 "노예근성"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렇게 해 봅시다...
님 말대로...
노무현, 김대중 평가? 당신과 의견 똑같습니다.
박정희 경제발전 시킨거? 당신과 생각 똑같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공포된 이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재를 했습니다.
이건 사실이니 부정은 안 하시죠?
님은 이게 잘 했다고 보는거고 저는 잘못 했다고 보는겁니다.
만약 님도 지금이 아닌 그 시대에 살았다면 저랑 생각이 똑같을 겁니다.
여기까지가 끝 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명예를 쫓게 됩니다.. 그들에겐 아주 쉬운일이죠..
하지만 정말 훌륭한 사람은 명예를 먼저 얻게 됩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명예를 먼저 갖지 못 했습니다.
경제개발 계획도 장면이 다 해 놓은거라고 그러고...
월남전 참전은 그냥 국민 목슴 판거라 그러고...
박정희가 없었어도 우리나라는 잘 살았을거라고 그러는데...
2002년 월드컵에 히딩크 없어도 잘했겠네? 그러면 아니라고 그러고...
잘한거 이야기 해보라면 추상적인 이야기만 나열하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은 엄청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빨아대는데...
지네들 주장대로라면 히딩크 김대중 노무현 없었어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다 잘알아서 축구4강.나라 발전 시킬거 아니였니?
게임 하나를 만들어도 기획이나 총 관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수있는데..나라가 대통령에 상관없이 국민들이 알아서 알아서 잘 굴러가며 발전할수 있었을거라 주장해대는거 보면 뭔 생각을 하고 사는건지....
결과론적인 경제발전? 그럼 지금도 그렇게 해서 대통령 되면 괜찮습니까?
당신이 든 예는 이 글과 전혀 맞지도 않는 엉뚱한 글을 왜 쓰시는지?
지금 무엇을 말 하는건지 포인트를 전혀 모르시네요..
히딩크가 느닷없이 와서 축구협회 협박해서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됐습니까?
여기서 누가 노무현, 김대중을 찬양했습니까?
총관리자? 지도자? 리더? 당연히 중요하죠...
하지만 그 자리에 앉게 되는 방법이 정말 그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앉은 것이냐...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그 자리에 앉은것이냐...지금 이걸 말 하고 있는데...
뭔 소리를 하시는건지...이해를 잘못 하고 계시네요...
박정희를 욕 하면 노무현 김대중을 찬양한다는 개념부터 버리셔야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됩니다...여기서 박정희가 경제발전 시킨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되죠? ㅋㅋㅋ
글 보니 내가 쓴 글이 다 부질없다는 걸 지금 알게 되었네 ㅋㅋ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입니다..
볼일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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