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11년 (1811년) 11월 7일
해가 돋았다. 선실을 나가 문설주를 잡고 섰다. 사면이 바다다. 굉장하다. 세상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싶다. 온 우주에 사방에 물결만이 있다니, 과연 신은 존재하는구나 싶다.
순조 11년 (1811년) 11월 10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구경하는 왜인들이 산에 앉아 쪼그리고 우리를 보고 있다. 행색이 다르니 기웃기웃한다. 머리는 깎 았는데 뒤통수만 남겨놓고 고추상투를 틀어놓았다. 어떻게 여기 놈들은 하나씩 칼을 차고 있다. 여자들은 노소와 귀천 을 가리지 않고 고운 빗을 꼽고 있다. 소매가 남녀구분 없이 한가지이니 알아보기가 힘들다.
순조 11년 (1811년) 12월
여기는 교토이다. 이 도시는 오사카의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 왜왕이 사는 도시인지라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왜왕 의 성벽마저 사치스럽다. 아니다 사치보다는 아름답다. 나도 이 풍요에 길들여 져버린 것인가 더 이상 사치스럽다는 표 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왜국에 있고 왜국의 눈으로 이 풍요를 보기 시작했다. 강에 모인 아녀자들이 매우 아름답다 .
순조 13년 (1813년) 1월
나는 재작년 조선 통신사의 서기로 갔다 온 이후 아직 그 풍요의 충격에 있다. 일본을 무로서 대하던 관점을 탈피하여 문의 일본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 를 ‘실사구시’ 라고 한다.
순조 13년 (1813년) 2월
날이 추워진다. 백성들은 가난에 굶주리고 먹을 걱정만 하고 있다. 왜인들은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고 싶다. 나같이 역사적 통신사로서 일본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일본을 보고 배울 기회가 전혀 없다. 일본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오늘부터 내가 보고 배운 것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 록하고자 한다. 해사일기, 일본록, 승사록, 화국지 등 일본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수집하여 나의 관찰과 집대성하고 하고자 한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방대한 견문록이 저술되긴 하였으나 이들의 기술력을 제대로 언급한 적은 없었 다.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것은 고작 물레방아나 고구마 재배 등에 국한되었다는 것이 난 믿기질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일 본을 너무 성리학적 테두리에 가둬놓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이며 한계일 것이다. 왜놈들의 일본 경제상에 대해서 내심 경탄하면서도 우리는 왜 화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대체 알 수 없다. 문화적 우월감이 힘 앞에서 무슨 소용인가? 이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져와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외교를 하고 있었다. 가면을 써가면서 까지 왜 거기서 배우지 못했냐 는 말이다. 일본은 무에서 한국은 문에서 강세를 띠며 대등한 외교관계를 하고 있었다. 대일외교관계를 담당한 조엄이 라는 작자는 어떻게 이러한 발전상을 보고도 왜인들이 짐승과 같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하였는지 궁금 하다. 일본의 물레방아, 절구, 제방 공사 등을 견학하고 도입하려 했던 것은 높게 사나 그는 정말 현상을 볼 줄 모르는 인 물이다. 왜인들이 만들어 논 사회를 봤어야 옳다. 조엄 이놈은 역사에 남을 죄인이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박제가가 유배생활을 끝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한다. 팔을 걷어 올리고 일본을 따라잡아야 할텐데 조선은 대체 어디 로 흘러가고 있는가 모르겠다.
// 일본에 문물을 전파해줬다고 국사책에서 자위하던 조선통신사들의 실상
19세기 초 조선선비들까지 알던걸 21세기 살면서 제대로 못보고 제대로된 민족주의도 아니고
허황된 정치적 목적 반일로 역사를 보려고 하면 어찌하나
잘못된 말이 대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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