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독재의 길
19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도성장의 업적에 힘입어 박정 희는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치러진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극도의 혼탁상을 면치 못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부정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9월 14일 개헌·지지서명을 했던 122명의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3별관에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일요일 새벽 2시 30분,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3선 개헌안이 확정됨에 따라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선에서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즉 그는 1960년대에 이룩한 고도성장을 인질로 해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 장기 독재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대선의 마지막 장충단 공원 유세에서 박정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뽑아줄 것'을 눈물로써 호소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어린 호소는 얼마 가지 않아 거짓임이 점차 드러났다. 당시 닉슨 독트린 (Nixon doctrine)으로 인해 야기된 데탕트의 물결 속에서 남북 대화가 진척되는 가운데, 박정희는 영구 독재 체제인 유신 체제의 수립을 비밀리에 진척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 선언에 의해 현행 헌법의 효력을 일부 중단, 유신체제 등장을 위한 비상조치를 취했다. 다음은 유신 체제 수립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당시 대통령 특별 선언의 일부이다.
우리는 지금 국제 정세의 거친 도전을 이겨내면서 또한 남북 대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습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것은-남북대화를 더욱 굳게 뒷받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모든 체제의 시급한 정비라고 믿습니다. (「광복 30년 중요자료집」, 「월간중앙」1975년 1월호 부록.259쪽)
즉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 3선 개헌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다면,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남북 대화'는 유신 체제 등장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유신 체제가 등장한 후, 동시에 북한에서도 사회주의 헌법 개정에 의해 수령 체제가 등장한 후, 이제 별 필요가 없어진 남북 대화는 아쉬움없이 중단되었다.
유신 독재하의 사회는 남발되는 긴급조치와 빈틈없는 통제로 꽉 짜여진 숨막히는 사회였다. 그런만큼 그 틈새마다 민주화의 저항이 치받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회이기도 했다. 독재와 민주화의 대립은 그 충돌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거칠고 적나라해졌다. 백만인 개헌청원운동, 긴급조치 1.2호, 민청학련 사건 및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 서울대 김상진의 할복자살, 긴급조치 9호, 민주구국선언, YH사건,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과 제명 조치, 부마항쟁 등등. 그 중에서 박 정권이 취한 가장 야만적인 조치는 민청학련의 ‘국가변란기도'를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와 연관시키기 위해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의 관련자 8명을 대법원의 기각 결정 하루 만에 사형시켜 버린 일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장기 독재의 길에서 갈 데까지 간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의 대응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김재규의 표현대로 그것은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총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