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연장 반대시위
▲ 군정연장 반대시위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63)
박정희 의장이 1963년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자 야당과 재야 정치인들 중심으로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3월 20일부터 일제히 벌어졌다.
굴욕외교 반대 시위
▲ 굴욕외교 반대 시위(1965) 일본과의 굴욕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서울 시민들의 시위.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눈빛, 1994, 42)
한일협정 조인
▲ 한일협정 조인(1965.6.22)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75)
한일협정 조인 후 6개월 후인 1965년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 김동조 한일회담 수석대표, 정일권 국무총리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월남 파병
▲ 월남 파병(1965)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눈빛, 1994, 55)
건국 이래 최초로 해외 파병되는 한국군. 1965년 해병 청룡여단 장변들이 수송선에 승선하기 위해 열차편으로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1965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월남 파병이 개시되었다. 맹호.백마부대가 각 1개 사단, 청룡여단과 그밖에 보급과 기술관계 인원을 포함해서 약 4만 명이 월남에 상주했고, 1973년 철수할 때까지 40여만 명이 월남전을 체험했다.
동백림사건
동백림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당시 철학박사였던 임석진 명지대 명예교수(74)가 1961년과 1966년 평양을 두 차례 방문한 후 1967년 귀국해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당시 중정은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례에 걸쳐 ‘동백림(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중정이 밝힌 사건 개요는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를 포함한 교수 예술인 의사 공무원 광부 등 194명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평양을 방문하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중정 발표에는 황성모 교수가 서울대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내란음모와 정부전복을 모의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중정은 당시 사건관련자 중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하는 등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법원은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피고인 가운데 간첩죄를 적용받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는 지난 1월 공개한 중정 문건 ‘동백림 및 통혁당 사건 증거보강 수사계획’을 통해 중정은 1968년 7월 30일 대법원이 사건 피고인들의 일부 혐의에 대해 법적용 잘못을 이유로 파기환송하자 검찰과 재판부에 대한 로비자금 성격으로 보이는 예산을 중정 예산담당 부서에 신청하기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건에는 ‘검찰 지원비’로 검사 3명, 검사서기 3명에 대해 1인당 5만 원씩 총 30만 원, 재판부 지원비로 판사 4명에 대해 1인당 5만 원씩 총 20만 원을 신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는 1968년 당시 부장판사의 월급이 5만6000원임을 감안할 때 이 돈을 단순한 밥값이나 유흥비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동백림사건으로 고초를 당한 유명인사 중에는 고 천상병 시인도 포함된다. 이 사건으로 ‘국사범’이 된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 당시 서울대 교수에게서 독일 유학 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듣고도 고발하지 않아 간첩으로 몰렸다. 천상병은 중정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 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천상병은 폐인이 되어 기인 같은 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 분신
▲ 전태일 분신(1970.11.13) 전태일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몸부림치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91)
1948년 봉제노동자인 전상수.이소선씨 사이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어린 시절 껌팔이 신문팔이를 하다 17살 때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는 평화시장 시절 열두 살짜리부터 열대여섯 살짜리 노동자들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하는 광경을 보고 그것을 개선해 보려고 69년 6월 '바보회'를 만들었다. 그 조직을 통해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관으로부터 묵살당하고 그는 해고되었다. 그후 그는 '삼동친목회'를 결성해 노동운동을 벌였으나 아무 것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온몸을 불사름으로써 그의 뜻을 알리려고 하였다.
광주대단지 사건
▲ 광주대단지 사건(1971.8)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45)
유신체제
▲ 유신체제(1972.10)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61)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를 발표했다. '10월 유신'의 선포였다. 그해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 유신헌법은 투표자 91.5%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1970년대 초 동아시아에 새로이 몰아닥친 데탕트가 냉전구조에 의존하던 박 정권에 압박을 가하고,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인 외채에 의한 고도성장.수출주도 경제정책이 파탄으로 치닫고, 독재와 수탈에 저항하면서 꾸준히 성장해온 민중들의 힘은 박정권의 절대권력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동아일보 광고해약 사태
▲ 동아일보 광고해약 사태(1974.12)- 백지광고
(동아일보, 1993.4.1)
동아일보의 유신반대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2월 광고무더기 해약이라는 보복조치를 가했다. 이들 광고지면은 독자들의 격려 광고로 채워졌다. 격려 광고의 내용들 가운데 일부이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된 뒤 두 해째인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개최하였다. 긴급조치 1,4호가 발동되어 군사법정에서 종교인, 문인, 언론인, 대학교수, 변호사, 대학생 등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15년 징역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을 때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 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고 천명하고 1)외부간섭배제 2)기관원 출입 거부 3)언론인 불법 연행 일체거부 등 3개항을 결의하였다.
경영진이 이 내용의 기사화를 거부하자 기자들은 제작거부로 맞서 10월 24일자 신문은 나오지 못하고 10월 25일자에 실리게 되었다. 이후 여러해 동안 금기로 되어 있던 데모, 인권회복기도회, 노동자들의 쟁의, 야당의 체제비판 발언, 개헌문제까지도 기사로 다루었다. 그러자 74년 12월 30일부터 정권의 압력을 받은 대광고주들의 광고철회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광고지면이 백지로 나가자 세계 광고 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언론 격려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학생.지식인.종교인은 물론 주부까지도 참여하여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이에 대해 정권과 경영주들은 기자를 비롯한 언론인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맞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축출된 자유언론의 주역들은 동아자유언론소호투쟁위와 조선자유언론투쟁 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유언론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80년 해직언론인협회를, 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기관지로서 '말'을 창간하였다. 87년 6월항쟁 뒤 자유언론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이들이 주축이 되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인혁당사건
▲ 1975년 4월 8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 등을 확정하는 판결문을 읽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으로 밝혀졌다 .
긴급조치9호
▲ 긴급조치9호(1975.5.1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29)
긴급조치 9호 선포를 보도한 1975년 5월 14일자 조선일보. 긴금조치 9호는 유언비어 유포, 학생의 정치 관여 금지 및 위반 사실을 보호하는 언론사도 정.폐간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다.
명동사건 구속가족 시위
▲ 명동사건 구속가족 시위(1976.5.4)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4)
1976년 5월 4일 명동사건 피고인 가족들이 대법원 후문 앞에서 '공개 재판, 민주인사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검은색 테이프로 입을 십자가로 봉하고 침묵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기념미사 후에 마무리 기도 형식으로 이우정이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함세웅, 이우정, 정일형, 윤반웅,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문정현,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은명기 등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였다. 3월 2일부터 연행이 이루어지기 시작, 정부는 기도회가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발표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은 1)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고 하는 세부문으로 이루어졌으며, 결론에서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착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 묻고 "민주주의 만세"로 끝을 맺고 있다.
함평 고구마피해보상운동
▲ 함평 고구마피해보상운동(1976-78년)
(노금노, 땅의 아들 1, 돌베개, 1986)
함평에서 포대에 담겨져 농협의 수매를 기다리는 고구마가 길가에 방치된 채 썩어들어가고 있다(1976년 12월).
1976년 여름 농협의 임직원들이 함평군 내 7천여 고구마 생산농가를 상대로 출하희망 전량을 전해에 비해 17.4% 인상된 고시가격으로 수매하겠다고 선전을 하였다. 농민들은 농협의 약속을 믿고 상인에게 판매할 계획도 다른 저장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수확한 고구마를 농협에서 공급해 준 포대에 담아 쌓아 놓고 농협 차가 오기만 기다렸다.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어도 농협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고구마는 눈비를 맞고 추운 날씨에 얼어 썩어가기 시작하였다. 농협수매가 진전이 없고 농민들이 불안해 하자 상인들이 1포에 1317원짜리 고구마를 600원에서 200원까지 헐값으로 사갔다. 썩은 고구마를 추려내야 되니 농민들은 이중삼중으로 막심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에 몇명의 농민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1976년 11월 23일 함평에서 농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대책위를 수립하여 피해 농가들을 조직하였다. 경찰과 농협의 방해공작을 피해가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피해 보상운동을 78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
▲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1976-1978)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 돌베개, 1985)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YH사건
▲ YH사건(1979.8.)
(한길사, 한국사-19, 1994, 25)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농성과 김경숙의 사망을 보도한 1979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YH무역주식회사는 1966년 1월 자본금 1백만원과 10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종업원 4천명에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하였고 수출실적 1백만 달러를 달성하여 국내 수출순위 15위를 기록하였다. 회사 순이익이 12억 7천만원이나 된 이 해에 상당액의 외화를 도핀시킨 장용호 회장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동서인 진동희 사장은 장부상 10억원을 사원들의 상여금으로 지급했다고 해놓고 그 돈으로 1973년 대보해운을 설립하였다. 와이에치 노동자들은 하루 13-14시간씩 근무를 하였고 일요일도 격주로만 쉴 수 있었다. 일체의 수당과 상여금도 없었다. 와이에치 무역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국내의 와이에치 무역에서 수출한 가발대금 3백만 달러를 미국의 장용호 회장이 갚지 않아 1974년에는 은행빚이 6억 3천만원으로 늘어났다. 사세는 급속도로 기울어졌고 1979년 4월에는 폐업을 단행하였다.
7일 동안 농성 끝에 공장문은 다시 열렸으나 미국으로 빼돌린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7월 30일 2차 폐업 결정이 났다. 기숙사에서 농성하던 와이에치 여성노동자들은 8월 9일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8월 12일 새벽 2천여명의 경찰력에 의해 1백 80여명의 18세에서 23세에 이르는 나이어린 노동자들은 강제로 끌려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추락하여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부마항쟁
▲ 부마항쟁(1979.10.16) 부산 지역의 확대된 통금시간을 알리는 서울역장의 안내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53)
최후의 만찬
▲ 최후의 만찬 - 10.26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98)
김재규는 앉은 자세로 오른쪽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먼저 왼쪽에 앉아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행해 1발을 쏜뒤 곧바로 마주 앉아 있는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다. 박정희가 왼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박정희 살해 현장인 궁정동에서 1979년 11월 7일 현장검증을 찍은 것이다. 당시 보안사에서 조간 조선일보와 석간 동아일보에 사진기자 한명씩을 배정하여 두명이 현장검증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찍은 사진을 보안사령부에서 인수하여 7장을 선택, 각 신문사에 보도하도록 나누어 주었다.
자료제공:역사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