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누구인가?
시민운동가와 평화운동가의 전형
솔직히 인정하자. 안중근 의사는 '일반 국민 대중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일부 우익 보수 속의 안중근'으로 축소된 채 박제화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 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만 집중적으로 부각돼온 측면이 크다. 일종의 '고독한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나마 일부 시민들이 차량 뒤에 붙이고 다닌 안 의사의 표식(약지가 잘린 손바닥 도장과 '대한국인'이란 글씨)도 국수주의적 기호(記號)로 읽혀진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안중근 재발견'이라는 창을 통해서 제대로 보면, 우리는 안 의사가 진정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평화운동가이자 시민운동가의 전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안 의사의 위대성은 무엇일까. 몇 가지 특징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 의사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고 있는 남과 북에서 동시에 칭송 받는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이다. 둘째, 그가 민족정기의 표상으로서 널리 존경받는 애국자임은 순국 후 불과 3주 만에 전기가 출간되어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진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셋째, 박은식 등 우리나라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손문, 양계초, 원세개 등 중국의 지도자들까지 안 의사의 의열(義烈)을 칭송하는 글이나 저술을 남겼을 만큼 동북아 차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히 '안중근 신드롬'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러한 현상은 일제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2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안 의사 순국 36주년 추모식에는 무려 1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시 남한 인구가 1천만명을 조금 넘겼을 때임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안 의사가 일제시대부터 해방정국에 이를 때까지 지식인과 민중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안 의사의 위대성은 역설적으로 '평화주의자'이자 '문명사상가'로서의 면모에서도 곧바로 드러난다. 이와 관련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안 의사가 '법정투쟁'과 <동양평화론>을 통해 밝힌 주장과 정신은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정신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안 의사의 유업이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 윤치영, 이은상 등 박정희 쿠데타 정권을 지지하던 친일 경력을 가진 일부 수구·기득권 세력에 의해 1963년 설립된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