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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님의 [복면부대가 외부에서 온 불순 세력임을 증명해 달라구요?]라는 제목의 글에 반론합니다.
복면부대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으며,
<- 복면한자의 정체가 수상하다는데는 일단 공감합니다.
그 불순세력의 침투방법은 먼저 잠수함을 타고 목포로 침투한 다음 목포에 대기하고 있던 시민군 차량으로 광주로 침투하였습니다.
<- 한마디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역사학도님의 글은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복면부대가 22일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왔다고 전제하고 서술하고 있는데,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는 19일 오전 9시 50분경부터 목포지역에 공수특전단 1개 지역대가 편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님의 주장데로라면 목포지역에 이미 공수 1개 지역대가 편성되어 있슴에도 불구하고, 간첩 300명 또는 600명이 잠수함을 타고 침투해오도록, 목포시민들은 커녕 경찰이나 공수부대 등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니, 대한민국 특전사가 그처럼 당나라 군대였던가요? 어떻게하면 최소 300명이 침투했다는 간첩이 단 한명도 적발되지 않을 수가 있답니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제부터 천천히 살펴봅시다.
역대 무장공비 사건들을 보면 하나같이 단 10여명만 침투해도 모두 적발이 되어 일망퇴진됩니다.
그러나, 당시는 비상계엄령 전국확대라는 이름으로 5.17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한국군이 초 경계태세에 있던 그야말로 간첩이 침투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시기입니다. 또한 CIA 한국지부에서도 당시 동향에 대해 북한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는 전문을 미 본국에 보냅니다.
만약 김일성이 미쳐서 이시기에 공비를 남파했다 치더라도, 이 간첩들이 당시는 물론이고 아직까지 단 한명도 적발이 안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1980년 5월 16일. 5.17 전날인 [5월 16일]입니다.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위컴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5월 20일]입니다.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한편 5월 22일. 님이 복면간첩 300 또는 600명이 침투했다 주장하는 [5월 22일] 입니다.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 전체가 초 경계 태세에 있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님이 한 서너명이 침투했다고 주장했다면 또 그럴수도 있으려니 치부하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님이 주장하는 인원은 무려 최소 300명에서 600명을 주장하고 있잖습니까?
자! 계속 봅시다.
복면부대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은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자 그럼 먼저 당시 카메라에 잡힌 복면부대 사진을 보시면서 김영택 기자의 증언 및 설명을 들어보도록 할까요?
시민군 편의 김영택 기자는 1987년 8월에 <「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이란 기사를 발표하면서 네번째 의문점에서 복면무장단체는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분명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이 기사에서 김기자는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이라는 의미심장한 언급을 합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
<- 이어서 나열하신 사진들 중 복면을 한 사람들 만큼은 분명히 수상해 보이는군요.
님과 같은 분들의 글들을 지금까지 쭉 보면, 5.18 당시의 광주시민들 전체가 마치 북괴의 선동에 광분하는 폭도들이라도 되는 양 묘사하며 5.18의 의의를 끈질기게 중상모략해 왔기에, 이에 깊이 분노하면서도, 위와 같은 이유로 도저히 상식적으로 그 시기에 간첩이 침투했다고 볼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이 광주시민들일 것이라는 전제하에 지난 4년간 글을 써 왔지만, 광주시민들이라고 전제하고 보아도 여전히 납득이 안되는 그 복면부대의 수상한 행동거지는, 그런 연유로 싸다만 똥처럼 늘 찝찝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계속 봅시다.
김영택 기자는 시민군 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무장단체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의심을 또박또박 말하였다.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를 보도하는 위의 동영상에서 MBC 김석진 기자는 그 증언을 이렇게 요약한다:
<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위 동영상 시작후 1분 5초부터 1분 22초 사이)
<- 1분5초부터가 아니고 3분부터 3분 20초 사이에 기자가 나레이션 하는군요.
흥미로운 동영상이고 영상 속 증언자들의 증언을 각종증거자료에 대입해보니, 300명설 이외에도 도청 앞 집단발포 및 시위대 조기무장론 등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만,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김영택 기자는 이미 1987년 8월에 그 증언을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남긴바 있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
<[복면부대]의 정체>
독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복면을 한 이른바 [시민군]들이, 탈취한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광경을 텔레비젼 화면이나 신문의 사진에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 [복면부대]는 18일과 19일의 시위, 특히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른바 [광주공화국]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 다른 것은 차치하고 분명한 것은 21일까지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 수중에 들어간 뒤부터 등장했다고 하는군요.
자! 이시기의 군 작전일지를 봅시다.
계엄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것은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부터 조금씩인데,
21일 16시경에 7공수. 11공수를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지시하였다고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 기록되어 있고,
17시 30분경에 7공수가 조선대에서 주남마을(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18시 25분경에 3공수가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담양-순천으로 나가는 길목)로,
19시 30분에 11공수가 주남마을(화순으로 나가는 길목)로 철수 완료되었다고 특전사 전투상황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19시경 20사단 병력(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의 허락을 얻어 육군대장 이희성이 작전통제권을 이양받은 부대지요.)이 극락교 1개대대(광주상무대-송정리공군-나주-목포로 이어지는 길),
백운동 1개대대(광주-남평-나주-목포로 이어지는 길),
광주 톨게이트 1개 대대(광주-장성-전주-서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배치되었다고,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와 20사단 전투상황보고서 등의 군기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도청앞 집단발포 이후 광주시 중심은 비웠지만, 광주에서 시외로 나가는 길목은 실로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모조리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학도님의 주장에 의하면 [잠수함을 타고 목포로 침투한 다음 목포에 대기하고 있던 시민군 차량으로 광주로 침투하였다]는 그 최소 300명 이상의 복면간첩들은, 그야말로 전면전을 방불케하는 저 엄청난 병력에 의한 삼엄한 경계를 대체 어떻게 뚫고 들어왔답니까?
일단 님의 주장대로 최소 300명 이상의 간첩들이 목포에서 광주로 들어오려면, 목포->나주->송정리 공군부대->광주상무대(육군전투교육사령부)를 거쳐서 들어오거나, 아니면 목포->나주->남평->백운동을 거쳐야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쪽 경로 모두에 20사단 병력이 각 1개 대대씩 배치되어 있다고 군기록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거 어떻게 된거죠?
또한, 님이 제시하고 지목한 보도 영상에서 기자는 [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방송하고 있습니다.
님은 분명히 김영택 기자의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명이 분명 목포를 통해 들어온 간첩이라 확신하고 글을 쓰신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나라 군대는 전면전에 준하는 대병력으로 한 도시를 저렇게 완벽히 차단하고도, 간첩이 최소 300명이나 침투하도록 허용하는 당나라 군대였습니까?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려드리죠.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길 중 목포-나주-송정리 루트는, 당시 송정리 공군부대->상무대(육군전투교육사령부, 현재 상무지구로 개발됨)->보안사(상무시장 안쪽길)->국군통합병원(화정동 잿등)->중정부(화정동 사거리)로 직선코스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그때 그 시절에 산천초목을 떨게 만들던 살벌한 기관들은 집중적으로 죄다 다 모여있는 엄청난 길목입니다.
대체 역사학도님이 주장한 최소 300명의 간첩들은 과연 어떻게 이 살벌한 지역을 뚫고 광주시내로 들어왔을까요?
또한 님은 20일에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수상한 대자보를 보여주었는데, 상무대는 위와 같이 살벌한 국가기관들이 부근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곳인데, 어떻게 풋내기 대학생들이 그 살벌한 상무대, 즉 육군전투교육사령부에서 무기를 입수할 수가 있지요?
님도 상무대에서 총기를 탈취했다는 그 학생혁명위원회라는 조직은 실제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그 대자보는 추정하건데 신군부의 작품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계속합시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순수한 시위대원들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갖는 네 번째 의문이다.
학생데모대들은 처음부터 떳떳했다.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찍히는 것도, 붙잡혀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4, 15, 16일의 평화적 시위 때는 더더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20일 운전기사들이 차량을 몰고 나왔을 때나 21일 관광호텔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해 협상을 시도할 때도 복면을 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 학생데모대들은 처음부터 매우 떳떳한 사람들이었고, 21일까지는 소위 그 수상한 복면폭도들은 없었다는군요.
그런데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빠져나가고 학생들이 들어간 후부터 시위대원 중에는 복면을 한 사람이 부쩍 많이 눈에 띄었다.
<-21일 오후 계엄군이 도청에서 빠져나가고 나서야 복면한 사람이 부쩍 많이 등장했답니다.
그렇다면 위에 자세히 군기록을 제시한 바와 같이 계엄군이 시외곽을 엄청난 병력으로 철저히 봉쇄하고 나서야, 이 수상한 복면폭도들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참~ 생각할 수록 이상하지요? 역사학도님 주장대로면 잠수함타고 목포에 침투해서, 기다리던 광주시민군이 제공한 차를 타고 광주에 들어왔다는 이 간첩(?)들은, 왜 하필이면 광주시 외곽이 엄청난 병력으로 삼엄하게 봉쇄되어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어려운 이 가장 부적절할 때를 골라서 등장했을까요?
봅시다.
만약 복면부대가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나중에 검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18일부터 21일까지는 왜 없었을까.
<- 즉, 역사학도님의 주장과는 관계없이, 만약 이 간첩들이 21일 이전에도 미리 침투해 있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때는 카메라에 포착되도 상관없어서 복면을 안하다가...
왜 기자의 카메라조차 학생들로부터 의심받아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던 22일 이후에 복면을 한 사람이 많았을까.
<- 즉, 복면을 안해도 될 때는 왜 복면을 했을까? 혹시, 시민들이 얼굴을 알아볼까봐?
게다가 광주시민들은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 복면을 철저하게 한채 의기양양하게 갖은 포즈를 취하며 찍어댄 그 사진들은?
그 사진들은 당시 국내언론들이 연일 광주의 무장폭도들이라며 보도하던 것들이었지요.
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와 같은 지난 수일간의 학살극으로 극도로 흥분하여 무장을 했던 시민들이, 시민대표들이 달래어 분노를 삮인 뒤 무기를 반납하겠다는데도, 저 수상한 복면폭도들이 못하게 방해를 하면서 과격한 언사로 선동을 하고 다녔다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하는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 복면 안한 소위 광주 시민군과는 같이 어울리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고...
기자는 24일 오후 2시쯤 당시 도청 2층에 있던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종배씨(35)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을 때 학생측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위원장대신 부위원장을 만났던 것. 이대 김씨는 {우리는 총을 반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군이 들어와 질서를 회복하면 맨손으로 금남로에
나가 다시 민주화를 외치겠습니다}며 총을 회수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만 해도 김씨는 온건파였다. 이로부터 수시간 후 그는 조건부 강경파로 선회하게 되지만, 본심은 어떤 조건만 받아들여지면 총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 복면 안한 소위 광주시민군들은 이처럼 무기를 반납하겠다고 하고 있는데...
무기 반납 제지한 [복면부대]
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김씨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가로막는 이들 강경파의 거의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 이 수상한 복면폭도들은 이처럼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김씨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복면의 강경파들은 이렇다 할 수습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조건 반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불순세력]이나 [배후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당시 기획위원이었던 이양현씨(37)의 말을 들어보자.
'잘은 모르지만 뒤에 검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복면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불순세력이 침투해 들어와 복면을 하고 행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 대해 우리도 어느정도 대비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가려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 자! 소위 광주 시민군과는 분명히 그 의도나 행동거지가 전혀 다른 저 복면간첩들은 증거정황상 분명히 22일부터 등장했는데, 시외곽은 21일 오후부터 시내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엄청난 계엄군 병력으로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으므로, 역사학도님이 주장하는 목포와 같은 시외에서 들어왔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시내에 미리 들어와 있었을까? 그렇다면 왜! 촬영되어 수배당할 위험이 있어 복면의 필요성이 있는 21일까지는 복면을 안하다가,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해서 복면 안해도 상관없는 22일부터는 복면을 했을까? 그리고, 복면을 한채 의기양양하게 포즈를 취하며 마구 사진들을 찍어대고.
결국 분명히 시외가 봉쇄된 22일부터 등장한 사람들이 맞고, 그렇다면 이 수상한 복면간첩들은 계엄군측이 들여보내주었다는 이야기?
광주사태 이후 과격한 정치집회에는 으레 복면부대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5·3인천 시위에서 그러했고,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대회 난동사건에서 그러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복면을 했고, 손에는 각목이나 몽둥이가 들려졌다. 인천시위에서는 민주세력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었고, 민주당 창당대회에서는 열렬한 신민당원으로 자처했다.
<- 어라? 저 유명한 용팔이 사건에 저 복면간첩(?)들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이른바 용팔이 사건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원하는 김대중.김영삼 등 70여명의 신민당 의원들이, 전두환 정권의 내각제 개헌을 지지한 이민우.이철승에 반발하여 창당한 것으로, 당시 전두환 정권이 강력한 야당의 출현을 방해하기 위해, 장세동 안기부장이 책임을 지고, 신민당 이택희, 이택돈 의원에게 공작비 5억원을 주며 사주하였고, 이를다시 신민당 청년부 김용남(일명 용팔이), 이선준이 폭력을 청부받았고, 소위 호국청년연합 총제 이승완 등이 개입한, 그야말로 안기부가 조직폭력배들을 동원해 꾸민 대표적인 정치공작사건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5.18때도 용팔이 사건때도 등장했다는 그 복면간첩(?)들의 정체는?
물론 복면부대가 모두 그런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광주는 객관적으로 무정부의 상태였다. 이미 정부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엄격하게 [내란]의 상태다.
더구나 시위대는 무장을 했다. 정부가 있을 때 그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는 것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복면을 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차이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다.
<- 복면폭도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는 이 시점에서는 글쎄?
그러나 계엄군의 철수 후 사태의 수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강경하지 않았다. 무기를 반납하고 시의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계엄군과 협상할 것을 시도했다.
<-소위 광주 시민군들은 이토록 무기의 반납을 원했는데,
복면부대는 이 수습노력을 저지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격렬한 선동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군요.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계엄군은 시외곽으로 물러나 광주시를 외부로부터 철저히 봉쇄했는데, 다음날 22일부터 수상한 복면폭도들이 시내에 등장하여 무장을 해제하겠다는 소위 광주 시민군들을 방해하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과격한 선동질을 벌였다. 이들의 정체는?
다름아닌 역사학도님이 제시한 김영택 기자의 진술을 조목조목 역사적 사실관계를 따져 추적해보니, 저 유명한 정치공작 사건인 용팔이 사건의 주동자들과 매우 닮은(?동일한) 자들이라는 것.
자, 이제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민군과 별도로 정체가 수상한 복면부대가 등장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요?
<-예! 사실 확인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그들이 어디서 온 누구였는지를 살펴 봅시다.
<- 조직폭력배와 같은 자들로 구성된 신군부의 프락치들이었군요. 더 볼 것도 없네요.
5.18자료들과 탈북군인 증언들이 신기하게 일치하는 점은 외부에서 온 불순세력은 300 명씩 두 떼로 600명이었으며, 목포를 경유하여 광주로 침투하였다는 것입니다.
<- 후후. 2006년 년말에 뜬금없이 등장하여 북괴개입설을 주장한 탈북군인들은, 이미 이런 시나리오와 미리 입을 맞춘것 같고, 300명 설은 김영택 기자의 서울에서 온 대학생 300명 설에서 가져온 듯 하고, 이것이 서울.목포 두 경로로 들어왔다며 600명이라는 것일테고, 상식적으로 진짜 간첩부대였다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을 잘 훈련된 대부대가 지키는 철통같은 경비를 뜷고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계엄군 스스로 이 프락치들이 진입할 길을 터줬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되는군요.
지난 4년간 도저히 상삭적으로 납득이 안되었던 의문이, 님과의 이번 의외의 끝장토론으로 풀리게 되는군요.
5.18자료는 이른바 가짜 연고생이 300명씩 두 떼로 광주시민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목포에서 광주로 들어왔다는 설을 제시합니다.
<- 그랬군요. 조용한 평시에 간첩 10여명만 침투해도 모조리 일망타진되던 그시절에, 하물며 비상계엄령 전국확대라는 이름으로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여, 최정예 공수특전단과 전방 20사단 병력까지 몰려와 있는, 그야말로 한국군이 총출동한 광주에, 어찌그리 미련스럽도록 부적절한 타이밍으로 300명씩 2조로 도합 600명이나 되는 그 무장간첩(?)들이, 그 철통같은 경계를 뚫고 단 한놈도 안잡히고 구렁이 담넘어가듯 들어와서 선동질을 하다가 귀신같이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탈북군인 역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300명씩 두 떼로 잠수함을 타고 남한으로 침투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목포를 경유하여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어떻게 300명씩 두 떼거리의 무장단체에 대한 증언 혹은 기록이 5.18측 자료와 북한 자료가 일치할 수 있는지 연구해보실 흥미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 이미 다 알아버려서 흥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위에도 정황을 증거해 드렸듯이 애초에 신군부가 광주에 내려올때는 비상계엄령 전국확대라는 명목이었지 무장공비섬멸이라는 명목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었으며, 5.18 당시 도청 독침프락치 사건이나 간첩 홍종수 사건 등 5.18을 북괴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기 위한 조작간첩 사건 몇개는 주장됬었으나, 모두 조작임이 밝혀진 뒤로는 두번 다시 북괴개입설이 안나왔었는데, 뜬금없이 지난 2006년 년말에 등장한 임천용을 필두로한 탈북자들이 어째서 그런 얼토당토 않은 북괴특수부대 600명 침투설을 주장했는지.
여기 이 사진을 보세요. 계엄군 사진이 아닙니다. 광주경찰 사진도 아닙니다. 광주경찰은 5월 21일자로 없어졌아요. 아래 사진은 시민군 작전 사진입니다. 그리고 목포를 경유하여 침투한 무장단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있는 이 시점에서 이 사진만으로는 우리기 이 무장단체가 광주시민들이라고 판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광주사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진도 연구 관심거리입니다. 시민군 각부대 지휘관은 누구였는가요?
<- 뭐! 이제 더이상 알 필요도 없군요. 결론이 이미 나왔으니. 진실을 깨닫게 되니 모든 의문점도 함께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다시 복면부대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복면부대는 제일 먼저 목포에서 출현하였는데
<- 그렇지요.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시민군을 지휘휘했던 북한군의 내연의 처 탈북여성의 증언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광주사태 아지트가 목포에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 그래요? 그 탈북군인도 정체가 궁금하지만, 내연의 처라는 탈북여성의 정체는 더욱 궁금하군요.
광주사태가 목포는 아무 관련이 없다구요? 천만에 말씀. 큰 관련이 있습니다.
<- 강조 안해도 다 압니다.
광주사태의 어원이 목포사태였습니다. 목포를 장악한 북한군이 5월 22일 처음으로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용어를 그대로 받아 그날 서울대 학생회가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제작한 것이 광주사태라는 명칭의 어원이었으니까요. 그때부터 비로서 언론들이 광주사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 뭐! 좋으실데로.. 어차피 신군부가 편할데로 부르는 것이니, 부마항쟁도 부마사태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목포가 광주사태 아지트였다는 탈북여성의 증언을 입증하는 남한 문건 중 하나가 바로 아래의 당시 취재일지입니다.
<- 정체모를 탈북여성은 관심없고, 옮기신 정황 이전에 먼저 박홍서 기자의 취재일지는 물론 아래와 같은 정황들이 있습니다.
21일 14시 30분경, 목포경찰서 산하 대부분의 경찰이 광주지역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고요.
또한, 그 월간조선 85년 7월호에 [목포 MBC 방송국에 광주 학생들을 실은 버스 1대 도착, 안으로 들어갔으나 부수지 않고 그냥 나옴.]이라는 기사가 실려있고.
현대사연구소 조사기록에 [목포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진 날은 21일부터였다. 오후 3시 30분 이후 광주에서 무장시위대가 버스 4대와 소형 승용차 1대를 앞세우고 목포에 진입했다. 그날 밤 목포시내 각 파출소의 무기를 빼내 시민들의 무장이 시작되었다.]라는 기록이 있고요.
18시경 [목포. 버스 1대 '계엄해제' 등 외치며 시내 돌아다녀. 연도엔 3만여 명이 나와 박수로 환영. 목포학생(고교, 대학) 시내버스 7대, 시외버스 1대 탈취.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 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음.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아직 파괴는 없다. 서울, 광주 시외전화 불통.] 기록이 있습니다.
즉, 바다에서 잠수함타고 온게 아니라, 육로를 통해 광주에서 왔다는군요. 그리고, 목포시내 각 파출소에서 무기를 털었다고 하고요.
이러한 정황하에 다음날 22일 비로소 님이 제시한 박홍서 조선일보기자의 보고 내용이 있군요.
위의 조선일보 취재일지에서 박홍서 기자는 5월 22일 새벽의 목포 상황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
*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보여.
[시민호응 안해.]는 원본에는 [대다수 시민 호응 안해.]라고 써있고, [군대는 안보여.]라는 대목 다음에 [학생들은 마이크로 '자중하자'며 질서지켜.] 라는 대목이 월간조선 1985년 7월호에 나오는군요.
자! 잠수함타고 온게 아닌 광주에서 차량을 통해 왔다는 1백여명의 복면폭도 일당들이 목포시내 전역에서 난동을 피웠는데, 정작 목포시민들은 이에 호응을 하지 않았고, 데모학생들 1천여명도 마이크로 자중하자며 질서를 지켰다고 박홍서 기자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차암~ 수상한 복면폭도들입니다. 그렇지요?
이렇듯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5월 22일 오후에 복면부대를 발견하기 한참 전이었던 그 날 새벽 목포에 먼저 북면부대가 출현하였습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불순세력이 새벽 두 시 목포를 장악함과 거의 동시에 복면부대가 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가 본 복면부대를 조선일보 기자도 보았습니다.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 22일자 취재 메모에서 기자는 저 복면부대의 정체성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무장한 시위대가 탄 지프·트럭·버스 등은 주택가를 계속 누볐다. 어떤 청년들은 경찰데모진압용 철모에 군복차림이었으나 차량을 운전하는 어떤 청년은 눈만 남긴 채 복면을 하기도 했다. 트럭에 LMG를 장치한 중무장도 보였다. 시민들은 동이 트면서부터 대문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웅성댔다.'
<- 역시 행동거지가 수상한 복면폭도. 아니! 신군부의 프락치들이로군요.
이 복면부대의 모습은 탈북자들이 묘사하는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 어련하시겠습니까? 입을 맞췄을데니...
여기서 먼저 목포에 출현하였던 복면부대의 정체성의 문재는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던 목포에 백 명 정도의 복면부대가 출현하여 해안경찰서를 파괴할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의 질문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다...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는 19일 오전 9시 50분경부터 목포지역에 공수특전단 1개 지역대가 편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제가 도입부에서 설명해 드렸지요.
또 바로 위에 21일 14시 30분경, 목포경찰서 산하 대부분의 경찰이 광주지역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제시해드렸고요.
즉, 경관과 군인들이 없었다면 이것은 광주에 동원되는 등의 이유로 일부러 목포를 비웠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리고, 그 직후에 곧바로 1백여명의 복면폭도들이 목포에 난입하여 난동을 피웠다는 것이고요. 맞지요?
그리고 이 질문은 당시 북한군 잠수함이 북한군 특수부대를 침투시키고 있었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에 썼던 글과 동영상 자료들을 아래에 그대로 올려놓겠습니다.
<- 글쎄 올시다로군요. 그리고 역사학도님이 링크해놓은 글과 동영상 또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읽어보고 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입습니다. 그래서 좀 답변이 늦었습니다.
제가 님의 다른 질문들과 답변들도 읽어보아야 하니까요.
<- 예! 기다리고 있습니다.
탈북군인들은 광주사태에 대하여 우리가 몰랐던 사실, 즉 북한군잠수함을 타고 침투하였으며, 정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을 때는 자폭하였다는 것입니다.
<- 후후. 위와 같은 정황으로 그 수상한 복면폭도들은 북괴 잠수함을 타고 목포로 들어온게 아니지요.
22일 새벽의 목포의 복면폭도들은 차량으로 육로를 통해 오히려 광주에서 목포로 들어왔다는 정황이고.
22일 광주에 등장한 서울에서 왔다는 300명 가량의 복면폭도들은 계엄군이 시외곽을 완전봉쇄한 뒤에 시내에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데아님은 물으실지 모릅니다. 과연 잠수함으로 침투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그리고 설마 북한군이 자폭하였겠냐고.
<- 조용한 평상시는 가능합니다. 무장공비 10여명만 침투해도 일망타진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평상시도 아닌 신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한국군이 총출동하여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고, 미 태평양 함대가 조기경보기와 항공모함까지 띄워논 상태에서, 김일성이 미치지 않고서야 무모하게 공비를 투입할리도 없거니와, 당시 CIA 한국지부에서도 미 본국에 북한의 이상동향은 없다고 보고하였음이지요.
그런데, 김염삼 대통령 시절이었던 1996년에도 실제로 그와 매우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었으며, 그때는 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하였으며 체포 직전 자폭하였음을 입증하는 영상이 그대로 촬영되었습니다.
<- 안보여줘도 압니다. 그러나, 5.18 당시 복면폭도들과의 유사성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오히려 대표적인 안기부의 정치공작 사건인 용팔이 사건의 복면폭도들과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여론몰이로 5.18재판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는지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으나, 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무장공비들이 잠수함 타고 침투한 사건이었다.
<- 후후. 역사학도님이 김영삼 대통령을 문민독재자 운운하며 싫어하는 이유를 알겠군요.
87년 당시 무마된 저 유명한 안기부의 정치공작사건인 [용팔이 사건]을 재조사시켜 그 전모를 밝히도록 지시한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이었으니.
5.18재판 여론몰이에 묻혀 국민에게는 잘 보도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14명과 싸우기 위해 우리 편에서는 십만 배가 넘는 무려 150만명이 동원되어 장장 51 일간 걸린 대간첩 작전이 있었다.
<- 1996년 당시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기도 하지요. 그들이 무장공비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시점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위 동영상을 보면 북한군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6개월 전 잠수함 타고 목포로 침투하였을 때 (74~75쪽), 그리고 광주사태가 끝난지 두 달 후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을 때 (88쪽),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다.
<- 그 정체불명의 탈북여성의 주장이란 말이지요?
위에도 설명했다시피 복면폭도들이 6개월 전부터 미리 침투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의 행동거지를 보면 앞 뒤 정황으로 설명이 안되지요.
분명히 엄청난 규모의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던 시점에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그 난동을 피우고 님 주장대로 600명이 유령처럼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으니.
아! 망월동 5.18 묘역에 묻혀계신 분들은 2~3명의 신원미상자를 제외하면 모두 신원이 분명한 광주시민분들이시니 애시당초 그분들을 님이 주장한데로의 600명에 이르는 복면폭도와 동일인물들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북괴특수부대도 못됩니다. 위와 같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신군부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기 위해, 고의로 항쟁을 악화시켜 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 투입한 프락치들이지.
이제 이해 되십니까?
탈북여성의 증언의 수확적 정확성은 잠수함 타고 침투한 북한군은 11영씩 한 조였다는 증언으로 확인된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 (74쪽);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75쪽).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76쪽),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
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81쪽).
<- 후후. 모든 정황이 북괴가 잠수함을 타고 목포로 침투했다는 가설 자체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이시점에서, 이런 끼워 맞추기식 주장을 제가 계속 들어줘야 합니까?
위의 동영상은 1996년 김영상 정부가 한창 5.18(인민)재판을 진행시키던 무렵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는데, 잠수함 타고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명씩 한조가 되어 움직였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 5공비리의 주역들을 단죄하는 시점에 터진 것이로군요.
역시 5.18 당시의 복면프락치들과의 연관성은 눈을 씻고 다시봐도 찾아보기가 힘들고요.
우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또 하나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은 광주에 침투하였던 북한군들 중 자폭한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탈북여성도 "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고 증언했다 (76쪽).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반신반의한다. 그러나, http://cafe.daum.net/issue21/5304/110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아래의 동영상은 1996년 9월 17일의 강릉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11명의 북한군이 자폭하였다.
<- 자! 이제 5.18 당시에 자폭한 간첩을 증명해 주세요. 검찰 사망자 부검기록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군요.
당연히 망월동 묘역에 뭍혀계신 영령들 중 그런 분들도 없고요.
내가 더 이상 이런 가정부터가 전혀 엉뚱한 끼워 맞추기식 주장을 계속 읽어야 하나요?
과연 잠수함으로 침투한 북한군이 있었으며, 침투한 북한군 중 일부가 자폭한 사실이 있었는가?
<- 적어도 5.18 당시에는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군요.
만약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제목의 지난 해 11월의 조갑제 기자의 글의 관점만을 전제로 한다면 이 증언은 허황된 이야기로 부정된다.
<- 조갑제 영감님이 의외로 현명한 분이시로군요. 제가 봐도 북괴특수부대의 광주개입은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와 같이 전혀 증명이 안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역사학도님과 같은 분들이나 2006년에 년말에 뜬금없이 등장한 탈북자 임천용과 같은 이들에 의한 얼토당토 않은 입맞춰 끼워 맞추기식의 전제 자체가 틀려먹은 주장이 전부지요.
그러나, 역으로 "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한 사실이 없으며, 그 어느 북한군도 남한에서 자폭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1996년 9월에도 실제로 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자폭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래의 두 뉴스 동영상은 1996년 9월 18일 MBC가 방송했던 영상 뉴스이다:
<<오늘새벽 1시를 전후해 이곳 해안으로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20명 가운데 11명은오후 2시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강릉시 강동면 청학산 정상부근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잔당 가운데 한명인 31살이 강수는 인근 지역에서 생포되고 8명이 현재 계속 군경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숨진 채 발견된 11명은 침투조가 아닌 승무원으로 추정되며, 비무장의 광부복장으로 머리에 총살을 입고 있어서 자살했거나 도주한 잔당들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체발견에 앞서 오전 10시 20분쯤 청학산 부근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교전으로 한때 오인이 됐지만 이때 11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5_6172.html)
● 신상길 준장(합참 작전차장): 금일 17시경에 육군 68사단 173연대 수색병에 의해 최초 침투지점으로부터 서남방 5km 떨어진 청학산 부근에서 북괴 무장간첩 11명이 자폭한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1명을 생포, 조사 중이며 우리 軍은 나머지 잔당을 계속 추적 중에 있습니다.
● 기자: 또 생포된 간첩의 신원은 최종적으로 인민 무력부 정찰부 소속 이강수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9_6172.html)
<- 자! 위와 같이 조용한 평상시에 무장공비 10여명만 침투하여도 모조리 일망타진이 되는 시대에, 어떻게 한국군이 총 출동하여 엄청난 병력으로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던 광주에, 10여명도 아닌 역사학도님이나 임천용이의 주장대로라면 무려 600명에 달하는 간첩들이 그토록 어처구니 없이 손쉽게 광주에 들어와서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을까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________________
자, 위의 보도대로 1980년대에도 일년에 10 여건 북한군 침투 사실일진대, 광주사태 때만 침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요?
<- 자, 위의 보도대로 1980년대에도 일년에 10 여건 북한군 침투가 모조리 일망타진된 것이 사실일진대, 왜 다른 조용한때 처럼과는 달리, 한국군이 총 출동하여(심지어 미 태평양 함대까지 주시중이던) 시외곽을 엄청난 병력으로 봉쇄하는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도 무려 600명이나 된다는 간첩이 침투하도록 막지도 못하였으며, 10여명도 아닌 역사학도님과 임천용이의 주장에 의하면 무려 600명이나 된다는 간첩들이 어떻게 그 삼엄한 경계 속에서 단 한마리도 안잡힐 수가 있었습니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무장공비 사건들은 애초에 군대가 투입될 때 [공비 소탕]을 목표로 투입되는 사건이고, 5.18은 CIA 한국지부가 북한의 동향은 전혀 없다는 보고까지 미 본국에 전한, [서울의 봄] 시기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비상계엄령전국확대]라는 명목으로 5월 17일 자정을 시작으로 이루어진, 또한 미리 16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전방 20사단 병력에 대한 작통권을 요청하여, 그야말로 한국군을 총 출동시킨 군사쿠데타였으며, 항쟁 이후 무려 26년 동안이나 북괴개입설은 나온 적도 없었던, 뜬금없이 2006년 년말 등장한 임천용과 같은 탈북자들을 내세워 전사모와 같은 일당이 북괴개입설을 새삼스럽게 주장하는, 이 5.18의 비극이...
저 단순 무장 공비 사건과 엮는다고 엮이는 사건입니까?
그리고 위의 뉴스는 무장간첩단의 침투 저지를 위해 해안경찰서가 얼마나 큰 기여를 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 왜 목포에 출현한 복면부대가 제일 먼저한 일이 해안경찰서 파괴였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 광주사태 연구사료
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
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광주사태 관련 최근 토론글들
<- 위에도 명시했다시피, 21일 14시 30분경, 목포경찰서 산하 대부분의 경찰이 광주지역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되었고,
또한, 님이 말한 박기자가 쓴 월간조선 85년 7월호에 [목포 MBC 방송국에 광주 학생들을 실은 버스 1대 도착, 안으로 들어갔으나 부수지 않고 그냥 나옴.]이라는 기사가 실려있고,
현대사연구소 조사기록에 [목포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진 날은 21일부터였다. 오후 3시 30분 이후 광주에서 무장시위대가 버스 4대와 소형 승용차 1대를 앞세우고 목포에 진입했다. 그날 밤 목포시내 각 파출소의 무기를 빼내 시민들의 무장이 시작되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18시경 [목포. 버스 1대 '계엄해제' 등 외치며 시내 돌아다녀. 연도엔 3만여 명이 나와 박수로 환영. 목포학생(고교, 대학) 시내버스 7대, 시외버스 1대 탈취.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 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음.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아직 파괴는 없다. 서울, 광주 시외전화 불통.] 기록이 있는.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대다수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수. 군대는 안보여. 학생들은 마이크로 '자중하자'며 질서지켜.
즉, 바다에서 잠수함타고 온게 아니라, 육로를 통해 광주에서 와서 목포시내 각 파출소에서 무기를 털어 난동을 피웠으나, 목포시민들은 호응도 하지 않았고, 데모학생들은 자중하라고 말린, 이 신군부의 프락치들이...
님은 아직도 북괴특수부대라고 생각됩니까?
참고자료라고 링크하신 것도 모두 차분히 읽어봤으나, 북괴특수부대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정황이 이들이 신군부의 프락치들이었다고 설명해주고 있고, 유령처럼 들어왔다가 유령처럼 사라진 이들의 선동에 의해, 신군부는 무력진압의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었고, 이에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이들의 농간으로 무참히 학살된, 6.25 이후 가장 비극적이었던 역사라는 확신만을 강하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 앞으로 역사학도님이 어떤 소설을 쓰시는지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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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확할 겁니다..
왜 북괴군 침투가 어불성설인지 더욱 구체적인 증거는, 제가 금일 00:50경 게시한 미 정부 성명 본문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북괴군 침투설은 거짓이라고 생각함...
간첩이면 몰라도...
타고 왔다고 주장하는지...
최소 당시 북한잠수함의 정원으로 봤을때 잠수함 20대 이상은 이동한것 같은데...
어떻게 모를수 있냐는 것이죠.
쟤네들은 생각이나 하고 사는지 모르겠군요.
말이 안되는 사실을 사실인양 주장하는 쓰레기들 의견은 볼 필요도 없음..
북한넘들이 대거 침투해서...
광주에서 총들고 계엄군과 상대했다면....
계엄군 사상자 엄청 났을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나요...
정말 한심한 주장이 아닐수 없네요....
전 게시물은 모두 읽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