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서 다룬바와 같이 극소수의 고정간첩이 있었다고 한다면 몰라도, 누가 주장하는데로 무려 600명 이상이나 되는 북괴군이 침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다면 수상한 복면부대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중 일부를 옮긴다.
<광주에서의 보안사 활동
5.18이 발생하고 상황이 악화되자 보안사령부는 광주 현지로 보안사 요원들을 파견했다. 5.19. 09:00경 보안사 참모회의에서 광주상황에 대한 토의가 있은 뒤 당시 보안사 기획조정처장인 최예섭 준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최예섭 기획조정처정은 광주에 도착, 전교사령관 부속실에 기거하며 상황 파악을 했고, 주요 회의에 참석했다.
한편, 보안사에서는 이외에도 합동수사본부 치안본부 조정관으로 파견중이던 광주일고 출신 홍성률 대령을 광주로 파견했다. 홍성률 대령은 '10.26'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노태우 9사단장에게 소식을 알리는 서신을 전달한 인물이었다. 그는 5.19. 15:00경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으로부터 광주로 가서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5.20경에 광주에 도착했다.
홍성률 대령은 광주시내로 잠입, 정보수집 및 특수활동을 벌였다. 그가 남긴 보고에 따르면, 그는 광주시 사동의 친척 집에 비밀아지트를 설치하고 전남도경찰국 정보과 소속 경찰과 505보안부대의 정보과 요원의 지원을 받으며 광주시내에서 활동 중이던 정보조를 통합 지휘했다. 보안사 상황보고에는 "(5.23.) 18:30 시내에 잠복하여 특수임무를 수행중인 당 부대 홍성률 대령의 보고에 의하면, 극렬 폭도들의 약탈과 강제 동원 등으로.............(중략)............." 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특수임무'라는 것이 관심을 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 보고서의 상황보고는 '5.18'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광주 시내에서는 군경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범죄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는 광주시내로 잠입해 5.21. 09:00경부터 '지하정보' 활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505보안부대 정보과 소속 상사 박OO과 전남도경 정보과 정보 2계장 경감 김OO의 지원을 받으면 활동했다. 그는 경찰의 정보기능을 통합해 3개조의 정보조를 통합 지휘했다. 이후 5.24. 광주 시내를 빠져나가 송정리 비행장에서 대기하다 5.27. '상무충정작전'이 끝난 뒤 전남도경을 지휘 감독한 뒤 6. 초순경 상경했다. 그 뒤 그는 6.10.경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도영 보안처장 앞에서 '5.18'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설명했다.>
이와 같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가 도경 정보국 등 경찰의 정보기능을 통합해 3개조의 정보조를 통합 지휘했다고 한다.
홍대령이 20일경 광주에 도착.
21일 09:00경부터 '지하정보' 활동을 전개했다고 하는데, 바로 09:20분경 아세아자동차에서 APC 장갑차가 털리기 직전이다.
(참고로 이 장갑차는 KM-900 기종으로 계엄군의 M-113 기종과는 달리 무한괘도 타입이 아니라 차륜타입이며, 운전방법은 일반 자동차와 동일하다.)
어떤 증언자의 수기를 보면 이때 벌써 카빈 무장을 한 사람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다.
김영택 기자도 도청 앞 집단발포 전에 3~4명 내지 1~2명의 카빈 무장한 사람을 보았다고 했다.
어떤이의 수기에도 어디서 누군가가 카빈을 가져다줘서 집어들자 곧바로 옥상에서 발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교사 작전일지에 1시경 광산 하남파출서에서 카빈이 털렸다는 둥의 기록도 수상하다.
도청 앞 집단발포 직전까지 일반 시민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도청 앞 집단발포 후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무기를 탈취하게 되는데 이때 무기탈취를 주도했던 자들이 증언들에 의하면 복면조였다.
그 소수의 조기 무장자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목격자들도 모두 모르고 있다.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21일까지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이들이 22일 즉, 계엄군이 외곽봉쇄에 돌입한 시점부터 부쩍 많이 나타났다는 하는데, 자! 이시기의 군 작전일지들을 보자.
계엄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것은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부터 조금씩인데,
21일
16시경에 7공수. 11공수를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지시하였다고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에 기록되어 있고,
17시 30분경에 7공수가 조선대에서 주남마을(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18시 25분경에 3공수가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담양-순천으로 나가는 길목)로,
19시 30분에 11공수가 주남마을(화순으로 나가는 길목)로 철수 완료되었다고 특전사 전투상황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시경 20사단 병력(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의 허락을 얻어 육군대장 이희성이 작전통제권을 이양받은 부대지요.)이 극락교 1개대대(광주상무대-송정리공군-나주-목포로 이어지는 길),
백운동 1개대대(광주-남평-나주-목포로 이어지는 길),
광주 톨게이트 1개 대대(광주-장성-전주-서울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배치되었다고,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와 20사단 전투상황보고서 등의 군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도청앞 집단발포 이후 광주시 중심은 비웠지만, 광주에서 시외로 나가는 길목은 실로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모조리 봉쇄하고 있다.
그런데, 전사모의 주장에 의하면 [잠수함을 타고 목포로 침투한 다음 목포에 대기하고 있던 시민군 차량으로 광주로 침투하였다]는 그 최소 300명 이상의 복면간첩들은, 그야말로 전면전을 방불케하는 저 엄청난 병력에 의한 삼엄한 경계를 대체 어떻게 뚫고 들어왔다는 것일까?
일단 최소 300명 이상의 간첩들이 목포에서 광주로 들어오려면, 목포->나주->송정리 공군부대->광주상무대(육군전투교육사령부)를 거쳐서 들어오거나, 아니면 목포->나주->남평->백운동을 거쳐야만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양쪽 경로 모두에 20사단 병력이 각 1개 대대씩 배치되어 있다고 군기록은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전사모가 제시하고 지목한 보도 영상에서 기자는 [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방송하고 있다.
분명히 김영택 기자의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명이 분명 목포를 통해 들어온 간첩이라 확신하고 글을 쓰신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 군대는 전면전에 준하는 대병력으로 한 도시를 저렇게 완벽히 차단하고도, 간첩이 최소 300명 이상이나 침투하도록 허용하는 당나라 군대였나?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길 중 목포-나주-송정리 루트는, 당시 송정리 공군부대->상무대(육군전투교육사령부, 현재 상무지구로 개발됨)->505보안부대(상무시장 안쪽길)->국군통합병원(화정동 잿등)->중정부(화정동 사거리)로 직선코스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그때 그 시절에 산천초목을 떨게 만들던 살벌한 기관들은 집중적으로 죄다 다 모여있는 엄청난 길목이다.
대체 전사모가 주장한 최소 300명의 간첩들은 과연 어떻게 이 살벌한 지역을 뚫고 광주시내로 들어왔을까?
군 기록에 의하면 외곽봉쇄는 이미 20일부터 계획되었다.
복면조들은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하고 다니며 무기를 반납하겠다는 시민들을 방해했고.
23일 국방부 출입기자단 21명이 국방부 대변인의 안내 아래 광주를 방문 취재했는데, 이들이 촬영했던 장면은 5.18을 폭도들의 행위로 부각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다는 것이었다.
복면조들은 이 사진기자들 앞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철저히 가린채 갖은 포즈를 취하고 어용언론들을 위한 사진 모델이 되어주었다.
보안사가 [광주소요사태 언론인 취재 유도계획]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계획된 촬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작성한 모든 보고서들은 광주의 진실과는 다르게, 대놓고 시민들을 용공으로 몰고 폭도로 모는 내용들이었다.
즉, 용공과 폭도로 몰기 위해 그렇게 보이기 위한 작업을 했다는 말이 된다.
홍대령이 24일 광주 시내를 빠져나가 송정리 공군 비행장에서 대기했다는 것도, 23일의 폭도 연출 사진 촬영을 위해 22일 들어왔다가 24일 나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들이 빠져나간 24일 이후 25일과 26일 양일 동안은 시민.군 양측에 아무런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것도 이들의 역활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7일 안병하 전남도경국장님이 체포 위주가 아닌 해산 위주의 시위진압을 하는 등 직무유기를 했다는 구실로 합수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겪은 뒤, 자진사표를 조건으로 석방되어, 1988년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것도 뭔가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이러한 진실들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가 감춰져 있는 것 같다.
홍대령은 27일 '상무충정작전'이 끝난 뒤 전남도경을 지휘 감독한 뒤,
6. 초순경 상경.
6.10일경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도영 보안처장 앞에서 '5.18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설명했다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자료는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의문들을 언젠가 누군가는 꼭 진상규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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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ON 편집위원 이흥환님의 글라이스틴 대사 비밀전문 및 89년 미 정부 공식 성명 분석글 중...
[이 문서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은 특전사 소속 606대대가 별도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이것을 미 국방정보국(DIA)이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606대대로 밝혀진 1개 대대가 모종의 특수한 훈련을 받고 있었음. 이 부대의 특이점은 소속 병력 전원이 머리를 기르고 있어 군복을 입고 있으면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것임. 606 부대원들이 대학 구내에서 활용된 병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음.』
606부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의 문서 여백에는 ‘미국(국방정보국)이 이 특전사 부대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음’이라는 수기 메모가 기재되어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비밀 전문 중, 미 국방정보국이 관찰한 특전사 606대대의 수상한 점. 이는 소속 병력 전원이 머리를 기르고 있어, 군복을 입고 있으면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것.
이는 임천용이 군인들의 머리가 길므로 북한특수부대라 주장한 사진과, 행동거지가 수상한 복면부대에 대한 중요한 단서임.
특전사 606부대는 박통의 지시로 창군되었던 부대로서 특공무술의 근원지이며, 12.12 직후 보안사 서빙고동으로 이동,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친위 임무를 맡았던 부대이며, 이후 27부대로 명칭이 바뀌었고, 김영삼 정부 시절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뒤, 이 부대의 후신이라할 707특임대가 생겨남.
이로서 보안사 파견 홍성률 대령이 지휘한 3개 공작조의 구성원은 보안사 파견요원, 보안사 505보안부대원, 전남도경 정보과 요원 이외에 특전사 606부대원이 투입됐을 가능성이 드러남.
요청이 있다면 606부대를 취재한 기사를 별도 게시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