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이거 참!
난독증인지... 본문에 썼던 내용까지 다시 읇어 드려야 되니 답답할 노릇이군요.
저는 '자동차산업 육성하고, 고속도로 깐다고 했을때 드러눕고 반대하던 자들'도 아니거니와, 그들과 눈꼽만큼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한국 자동차 산업이 32년씩이나 후퇴할 기술이 있었다는게 아니라, 기술자립의지가 꺾인 뒤 다시 기술자립을 하는데 32년이 결렸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시발' 이후 후발 업체들은, 시간이 오래걸리고 단기적으로 돈벌이가 힘든 기술자립보다는, 당장 힘이 덜들고 돈벌이가 쉽게 되는 방법을 택했고, 이처럼 외국 모델을 줄기차게 들여와 생산하다보니 완전 기술자립 모델이 나오는데 무려 32년이나 걸렸다는 말입니다.
왜 자꾸 왜곡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지금 건투하고 있는 국내 메아커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는 사람입니다.
지난 2005년 국산차사진 게시판에 '한국 자동차 산업 50년사'를 연제하다가 중단했는데, 그 때 '현대 엑센트'를 서술하면서, '개인적으로 참으로 반가웠던 차량이었다.'라고 기술했더니, 어떤 작자가 '현빠'라는 식의 헛소리를 해서 연제를 중단해 버렸었습니다.
마익홀님!
'우리 자동차역사가 이제...40여년도 않되었는데'라고 하셨는데, 우리 자동차 역사는 시발 이후 52년째 되었습니다.
'그나마 기술독립은 불과 몇년이고'라고 하셨는데, 한 차종만 놓고 이야기 했을때 '현대 엑센트' 이후 13년째 접어들었고, 전 차종을 따지자면 아직도 완전한 독립은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발자동차는... 재료는 드럼통 그리고 625때 버려진 미제 군용지프의 엔진과 구동장치로 만들어 졌지요...'라고 하셨는데, 이미 누누히 설명한 것을 전혀 읽지 않으시고, 엉터리 기사들이 떠드는 소리를 그대로 읇조리고 계시는 군요. 님이 읇조리신 것중 시발의 차체가 드럼통을 소재로 한것만은 맞았습니다. 본문을 다시 꼼꼼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자동차생활 1992년 8월호'에 '시발에 얽힌 진실을 이제 밝힙니다.'라는 특종기사가 실려있고, 여기서 창업주 최무성 옹과 당시 공장장을 지낸 오원철님께서 25년만에 해후하여 대담한 내용이 그 증거입니다.
설마 1992년에도 노빠가 있었다는 괴변이 나오지는 않겠지요?
최무성 옹께서 아직 생존해 계신다면 현재 101세가 되시고, 오원철님은 80세가 되십니다.
오원철님은 서울대 공대 화공대를 졸업하셨고, 공군의 진해 항공창 창설 멤버셨고 소령으로 예편하셨으며, 시발 자동차 공장장을 지내셨고, 3공화국시절 청와대 경제 제2수석 비서관을 지내셨으며, 92년 대담 당시 기아경제연구소 고문을 지내셨고, 현재 한국형 경제정책 연구소 고문으로 계십니다.
시발이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것은, 전쟁 직후의 그 참담한 시대에, 당시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크게 성장한 일본의 경제규모.산업기반.기술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설비와 기술인력.산업기반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미약하나마 우리기술로 개발.생산되었고, 기술자립의지가 매우 뚜렸했다는데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좋은 환경에서 시작한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각국 최초의 국산 승용차가 그 출발을 같이 했다는 것은 우리가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2차대전을 자신들의 전투기와 항모로 싸웠던 일본과 비교하는것 자체가 오류'라...
그래서 일본은 그러한 기술인력들이 많았으므로 단기간에 상당한 기술적 성과를 쌓을 수 있었다고 본문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일본과 우리가 기술력 차이가 없었다고 한적이 없습니다.
일본은 미군에 납품하던 군용차를 생산했던 노하우가 있었으나, 승용차를 만드는데는 맣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2차대전때 '제로 전투기'를 만들던 엔진기술자들이 많았기에 단기간에 상당한 성과를 쌓을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우리 자동차 산업은 이처럼 일본의 발전속도에 비해 한계가 있어 일본과의 기술제휴를 모색했고 3천5백만불의 차관까지 얻어 왔으나, 정치상황의 변화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예기했습니다.
1955 당시 한.일간 자동차 기술력이 종이 비행기와 F-22까지는 천부당 만부당이고, 쏘나타 2와 NF쏘나타 정도는 될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그 시작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정에 관한 것은 기회가 되면 다시 구체적으로 다루겠습니다.
1. 시발은 우리의 자동차 공업의 시발이라 보기엔...
90%부족한 면이 없지않고...
2. 당신의 기술이....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여....
우리의 자동차 산업이 후퇴 했을리 없다
라는 내용입니다.
나머지는 당신누구에게 한 말이므로 별로....
한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중고차가....
첼레나 못사는 캄보디아 같은데로 수출합니다.
엔진오일도 먹고 진짜 폐차 수준인데도..
우리나라에선 부속이 없어서 못고치기도하고...
차가 질이 좋고 그러니 고치려 생각도 않들고....
어잿던 그 나라가면...
가스켓이나...
기타 구동축까지 만들어서 다시 환생?()을 시킨답니다.
그럼 그정도의...기술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동차 공업이란는
범주에 넣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제가 지프니의 경우를 예로 들었듯이....
필리핀가면....일제픽업 일색입니다.
하지만 지프니란 차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공장을 보면...
우리나라 1급 정비소 수준입니다.
그것을 자동차 공업이라 하시겠습니까?
엔진도 구동부품도 만들지 못하는 공업사정도의 회사가...
자동차 공업 우리가 이야기하는 수준의 공업은 아닐껍니다.
그리고 시발
시발은
그 출발이 미군지프의 엔진 이 맞습니다.
거의 모든 부품을 재생에 의존한것도 맞고....
그 후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처음의 시발은 미제엔진에 미제 구동부품이 맞는것으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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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국산자동차.
1955년 8월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혜성,순성씨 3형제가 미군으로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차축 등을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첫 지프형 승용차.
우리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인 始發은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으며, 국산화율이 50%나 되어 긍지가 대단했으나, 한 대 만드는데 4개월이나 걸려, 始發차의 값이 8만환으로 사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을 기념하여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때 최무성씨가 始發차를 출품하여 최우수 상품으로 선정됨과 동시에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을지로 입구에 있던 그의 천막 공장에는 始發차를 사가려는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이로인해 가격도 하루 아침에 30만환으로 뛰어 올랐다.
대통령상을 받은후 한달도 못되어 1억환 이상의 계약금이 들어와 이 돈으로 공장도 사고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서 양산 체제로 돌입 했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높아서 생산능력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얼마후 始發투기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부녀자들 사이에선 "始發계"까지 성행하여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차 개발에 많은돈을 썼고 5.16혁명으로 정부 보조금이 끝난데다가 1962년 산뜻한 "새나라"자동차가 쏟아져 나오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차는 1963년 5월까지 3천여대를 만들어 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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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우리 능력이 거기까지인데./.
그게 왜 박통의 잘못인가요?
그럼 자식에게 기업을 되물림하는...
다시 얘기해...
대대로 농사지으며...
땅은 자손에게 물려주는것이다.....라는..
민족적 정서도 박통의 잘못인가요?
그럼 님들...
만약 회사를 하신다면....자식에게 물려주지마시면되겠습니다.
우익과 좌익도 구별 못하시는 양반이...ㅎㅎ
일전에 말씀드렸죠?
그러니 님의 말하는 좌파 얘기나 들어 봅시다..ㅎㅎ
(중략)
55년 3월에는 실린더헤드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어 8
월에는 4기통 엔진을 완성해 9월에는 지프형으로 된 최초의 국산차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 그 해 10월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가 열릴 예정이어서 종업원
들의 의견도 듣고 숙의한 끝에 차의 이름을‘시-발’이라고 지었다.
(중략)
김성운씨는 시발의 국산화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내 기억으로는 엔진의 실린더 헤드, 실린더 블록, 메탈, 가이드 등과 클러치 디스
크, 삼발이, 배터리, 브레이크 라이닝 등이었지요.
하나 하나 깎고 녹여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또 기어부분도 만들었
는데 디퍼렌셜 기어는 너무 만들기 어려워 여러 번 실패했지요. 겨우 만들어 시험해
보면 부서지곤 해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머지 부분은 폐차된 미군용 지프의
부속품을 이용했습니다. 처음 만들 때는 한 대 만드는 데 무려 4개월이나 걸렸어요.
요즘 같이 커다란 공장에서 완전 기계화된 시설로 만들어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
지요.”
즉 차근차근히 국산화에 송공한것이지...
바로 엔진을 만들어 내지는 못햇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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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의 외관이 '짚'과 유사하며 설계에 참고한 것은 사실이나, 가장 핵심부분인 엔진과 차체를 모두 자체 생산하였고, 당시로서는 국산화할 수 없었던 '카뷰레터'와 하체의 '미션''디퍼렌셜 기어'만 사다가 조립하였다는 당사자들의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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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 후의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출처 : 한국자동차 공업협회
제게 박통의 똥 운운하는자에게 한 이야기를 가지고 왜 제게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않되네요..
그럼 님이 당신누구에게 한말슴을 하시던지요...
CRS등의 부품은 국산화를 전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소성가공을 모르던 시절...
밸브또한 그랬고요...
시발자동차가 국산차의 시조라는것은 인정합니다만..
원문에 있듯..
나머지 부품은 미군짚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네요...
미션은 만들었다고 나오네요...
결국엔...
글을 읽어보아도 연대기적인 서술이 아니라..
좀 모호하긴 합니다.
재생 자동차에 관하여/.
국제 자동차가 재생자동차를 만들었고...
또한 실린더헤드와 실린더 블록(피스톤에대한 언급은 없더군요...
더 중요한것 아니던가요?)
등을 생상하긴 했습니다만..
내구성이 2개월이고(본문에 있더군요)
당시 미제엔진으로(완성품) 바꿨다더군요...
그리고 자동차 보유대수 제한은..
박통이 집권하기 이전인...
59년도인가 실시해서
목탄차 같은것이 나왔답니다/.
즉 박통이 보조금을 삭감한것은 맞으나..
이미 당시..
자동차는 매우 사치품이였어서...
그런 조치들이 있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