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내가 반론해주마.
먼저 5.18 관련단체들의 이권단체화와 위와 같은 전두환 비호세력들의 끈질긴 음해에도 현명한 대응을 못하는 어리석음을 개탄한다.
첫째, 5.18 직후 전두환 신군부는 칼빈에 의한 사망자는 양민으로 구분하여 보상금을 주고, m16에 의한 사망자는 폭도로 규정하여 보상금을 주지 않겠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이에 당시 검시관들은 억울한 희생자들이 보상금마저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m16사망자도 칼빈사망자로 기록하여 보상금이나마 수령토록 배려했다고 증언한다.
또한 시신중에는 m16탄환과 칼빈탄환이 난사된 시신들이 있는데, 이는 m16희생자의 시신에 칼빈을 다시 난사하여 계엄군에 의한 희생자를 시민군에 의한 희생자로 꾸미기 위한 시도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뇌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 잔인하게 살인당한 시신은 고 최미애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최미애님은 m16 근접사격으로 후두부를 맞아 머리가 박살난 형태로 희생된 임산부였다.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는 내가 본적이 없으므로 알 수 없으나, 내용이 신군부가 미국의 사주로 5.18 학살을 저질렀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 대사의 증언에 의하면, 신군부가 5.18 무력진압을 미국이 승인했다고 언론에 보도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이는 미국이 모르고 있던 일이며 허위보도를 당장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신군부가 이를 무시했다고 증언한다.
이는 미 정부의 공식문서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보고서에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당시 미국은 신군부의 어떠한 행위도 승인한 적이 없고 모두 신군부의 의도에 의한 사건이라는 증언이므로, 5.18 학살극이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므로, 북한이 이를 미국의 사주에 의한 사건으로 묘사하여 선전하고 있다면, 이는 5.18을 북한이 반미 선동용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증거일뿐, 5.18의 역사적 배경과는 다른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4·19 혁명을 남조선인민봉기로, 6·3 항쟁을 남조선청년학생봉기로, 6월항쟁을 6월 인민항쟁으로, 부마항쟁을 10월 민주항쟁 등으로 이름짖는 등, 대한민국내의 주요 민주화운동들을 자기네 북한체제의 선전용으로 제멋대로 악용하고 있다.
보수의 대표적인 논객이라할 수 있는 조갑제는 5.18 당시 보안사가 인솔한 취재진 중 한명으로서 가장 인상깊은 5.18 당시의 구호로 '김일성은 오판말고 물러가라'를 꼽으면서 5.18은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자칭)우익들의 5.18 북괴군 침투설 주장은 (타칭)좌파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니 지양해야 한다는 논설을 했고, 이에 지만원 등 자칭우파 인물들이 조갑제를 변절자니 뭐니 하며 비방하는 희극까지 보여주었다.
셋째, 광주교도소는 21일 오후 집단발포사건 이후, 저녁에 계엄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광주시 외곽을 봉쇄하는 임무에 들어간 것으로, 광주교도소는 담양으로 나가는 길목이고, 주남마을은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이며, 광주톨게이트는 장성으로, 송정리 공군부대는 나주로 나가는 길목이며, 이 장소들은 평소에 광주와 해당 시외를 드나드는 시민들이 많았는데, 계엄군이 출입을 못하게 통제하자 충돌이 있었으며, 이는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 송암동(나주로 나가는 길목 중 하나) 학살사건 등 다수의 양민학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운운하는 자들은 스스로 무식과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꼴이다.
넷째, 본자는 망월동 묘역을 수차례 다녀온 사람으로서 신원미상의 묘는 시신의 훼손상태가 심하여 신원을 알 수 없었던 것이나, 기술이 발전한 오늘날에 DNA 감식등의 방법으로 꾸준히 신원을 조사하고 있으며 현재 6~7명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참고로 5.18의 행방불명자는 60여명으로 이중에 해당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북한특수부대설의 근원은 임천용 등 5.18 시대에 십대의 어린 나이였던 탈북군인들의 실제 경험도 아닌 순전히 카더라 통신에 의한 주장으로서, 미 정보부 기밀문서의 머리가 길어 사복을 입혀 놓으면 군인 인지 민간인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보안사 606 부대와, 광주 505 보안부대 등 전두환 보안사 직속의 사복 군인들을 두고 하는 주장들이다.
이는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보안사 문건들을 근거로 보고서를 작성한 바, 보안사 홍성률 대령이 보안사 요원들을 이끌고 광주에 내려와 특수임무에 임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다섯째, 윤기권은 5.18 당시 고등학고 2년생으로서 5.18 학살극의 충격에 의한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알고 있었으며, 91년 보상금을 수령 하자 노모에게 건넨 뒤 유럽여행 중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18 당시 고등학고 2년생이었던 윤기권이 딱히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무리이고, 그의 정신병이 돌발행동의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추측 밖에는 할 수 없다.
지만원과 역사학도 김동문(이사람 알고보니 몇일 전 실비아가 들이대던 전남조은신문의 뭐 되는 사람이더군) 등은 이렇게 5.18의 진실을 어처구니 없는 근거들로 왜곡하는 자들로서 5.18의 피해 당사자들로선 당연히 분노를 금할 수 없게 만드는 자들이다.
5.18 관련단제들에게 당부한다.
저런 것들은 쥐어 팰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얻어 터지면 그것을 악용하여 이처럼 또다른 선동을 하는 파렴치한 들이다.
앞으로 그것들을 다룰 때는 분노를 잠시 잠재우고 논리와 증거로 쥐어 패라.
5.18 관련단체들의 자성을 촉구한다.
이상.
세탁질하난 쉬바 ㅋ
나쁜건 다 악용단체 ㅋㅋ라고 쓰셧자나여
쉬바 욕을 시원하게 해드리고싶은데 나이를생각해서 존중해드림 ㅇㅇㅁ^,.^
너 올해 초등학교 몇학년이냐?
보아하니 기초국어 교육도 못 받은 것 같구나.
글을 보고 이해를 못하면 찌질대지 말고 독해력을 길러라.
그러고나서 다시 찌질대라.
이건 뭐 뭐라고 답변해줘야 할지 난처할 정도로 멍청한 꼬마일세.
참석했음 . 검안 당시 폭도로 분류될 경우 보상을 받지 못하므로 최대한 비폭도로
분류시키려고 노력했것제. M16 총상 사망자는 폭도로 분류되니 가급적이면
M1이나 카빈 총상에 의해 사망자로 분류하려 한 것으로 역으로 추정 가능하지라 ~
존내 찌질대네. ㅋ
잘 아는구나 치타.
지 동네 주위에 얼마나 많은 정신병자들 보구 살았으면
니 동네에 '도가니' 같은 정신병자들 많다고 선전하는거여 뭐여 ㅋㅋㅋㅋㅋ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하지.
이데아님은 공수부대가 무작정 총기를 발사한것처럼 말하셨는데
과격시위대도 한몫을 했죠
그런데 그전에 님은 5.18의 역사를 얼마나 알지요?
최소한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사건 이전까지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하는 질문이겠지요?
그안에있던 지휘관이 총기를 발사한게 최초고요
21일 집단발포라하면 그렇게 믿어지십니까
군과경찰에게 버스로 달려드는데 그이전 군과경찰을 네명이나 버스와장갑차로 압사시켰으니 또다시 돌진하는 버스에 발포안하겠습니까
당시 가만히 서있는 장갑차에 군인이 없는 줄 알고 태우려고 했으나, 군인이 나와서 총기를 난사하자 놀라서 도망했고, 그 학생은 복부에서 엉덩이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인근병원에서 대장을 잘라내는 대수술 끝에 겨우 생명을 건졌습니다.
21일 집단발포는, 시민들이 계엄군이 철수를 약속했던 정오가 되어도 철수하지 않자 차량과 시위행렬이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앞에 운집하였고, 21일 오전 아시아자동차에서 복면조에게 탈취된 바퀴형 장갑차(계엄군은 무한궤도형)에
이것은 님이 두 사건을 지
집단거총 발포<화려한휴가처럼 >학살은 아니지않습니까
그리고 21일부터는 시위대에서도 탄환이 날아왔고 시위대와 공수부다간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집니다
화려한휴가는 내가 이미 과거에도 평한바 있지만, 영화적 요소에 치중한 나머지 고증이 매우 부실합니다.
고증은 부실하나 그 잔혹상에 있어서는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보다 더 심했다고 입을 모읍니다.
21일 이후 시위대와 공수간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21일까지의 일입니다.
집단발포 이후 흥분하여 복면조의 무장유도에 따랐던 시
이 당시의 사진들이 역사학도 등이 들이대는 사진들의 정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수의 강경파가 소지한 총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총기는 22일 모두 반납되었습니다.
출처 ↓
시민들이 19일 오후 3시에 무기고를 탈취했다는 것은 김동문의 주장일 뿐, 어디에도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시민들이 무장한 것은 21일 오후 3시경이고, 이는 1시경의 도청 앞 집단발포 사건 직후이며, 눈앞에서 60여명의 시민들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흥분한 일부 시민들을 각지의 무기고로 인도한 것은 모두 복면조였습니다.
복면조의 정체는 이미 말했다시피 보안사의 특수부대로 이들은 19일경 광주에 내려와 20일부터 광주시내 곳곳에서 과격시위를 선동
이곳으로 가보시죠
아!
그리고 돌진한 시위대의 바퀴형 장갑차에 탑승했던 태극기를 흔들던 학생은 돌진 직후 바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턱이 떨어져나가 즉사했으며 이 장갑차는 그대로 도청 뒤 학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작전에투입돼었는지요
제가알기론 m-16소총각개메고 곤봉만들고 충전작전을 펼친걸로압니다
<충정작전은> 아시겠지만 시위대에 먼저맞아도 돌이날아와도 묵묵히전진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작전이지요
공수의 충정작전이 돌을 맞아도 묵묵히 전진하며 시위를 해산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증거 기록에 입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앞 충돌때부터 공수는 학생들이 돌을 던지자 돌격 앞으로의 구호와 함께 곤봉 진압을 시작했고 머리에 곤봉을 맞아 피를 흘리는 학생들이 속출했으며 이때부터 학생들이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가두행진을 시작합니다.
이는
님은 아무도없는 장갑차가 서있어 불질러버리려했다고하셨는데
사실은 시민군에 포위당해 꼼짝못한 장갑차였지요
http://www.reportworld.co.kr/report/data/view.html?no=616436&agentid=naver
짚단에 불을 붙여 태우려 했다는 장갑차는 도청이 아닌 20일 저녁의 광주고등학교 앞의 혼자 가만히 서있던 장갑차입니다.
내가 왜곡하는게 아니라 님의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추정하건데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이나 역사학도의 토론글방 뭐 이런데 맞습니까?
저는 진실과 바른정의를 바라는거구요
증언자들은 한둘이 아나랍니다.
그분은 몇일에 투입된 몇공수 소속의 대원이고 어느 현장들을 목격했다고 하던가요?
시위대가 포위고립시켰지요
그리곤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바퀴사이에 집어넣었죠
http://blog.naver.com/huangguihe?Redirect=Log&logNo=140145707309
우발적이었건 명령에의해서였건 많은사람들이죽고다친 비극의역사입니다
그래서 그 공수부대원이었던분도 제가물어봐도 자꾸만 함구하십니다
중요한것은 공수부대가 집단거총해서 시민군을 학살하지않았다는겁니다
최초발포역시 자위권발포이고 공포탄발사후 비조준사격이었지만
그로인해 비극이시작돼엇고 시민군도 너무나 격렬한저항이
과잉진압을 부른요인입니다
이데아님도 한쪽에치우쳐계십니다
중심을잡으시고 있는그대로만 5.18을 평가하였으면좋겠습니다
저번<인동초구랴> 2차진주성전투 이후 두번째 토론이네요
그때 제가 게시물지운건 사과드렸습니다
18일부터 21일 집단발포 사건 이전까지만 17명의 시민들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연행자만 2000명이 넘었습니다.
당시의 외신들도 시위과격화의 원인은 공수의 과잉진압에 있다고 평가하며, 이는 보안사의 문건에서도 과잉진압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 대원이 시위 전체의 상황을 다 알 수 없으며, 이는 시민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의 결론은 모든 증인들과 증거기록 등을 취합하여 정리된 것이죠.
18일 투입된 병력은 7공수였고, 19일에 1
19일 투입된 공수들은 시민들이 흥분한 영문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경찰이나 20사단 병력은 항쟁기간내내 그러한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첫 투입된 7공수에서 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7공수는 전북 금마에 주둔한 부대로 18일 새벽 1시경 광주역에 도착하기 이전인, 17일 심야 이미 전북대에 들러서 철야중이던 대학생들을 연행하던 중 1명의 학생을 추락사하게 만들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심한게다친 시위대를 병원에 실려보낸일도있지요
시위대와 시민군 사망자보다 군경찰 사망자가 먼저 더 많이 발생한것또한
광주입니다
유난히 과격해지는 것도 원인중하나입니다
부안 방폐장 시위를 보면 명확하게 알수잇습니다
당시 군의관이었던 분이 위계룡님입니다.
시위대 사망자보다 군경 사망자가 먼저 더 많이 발생했다고요?
지금까지와는 달리 아주 무식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군경 첫 사망자는 20일 저녁 노동청 건물 앞에서 시위대 버스에 전경 4명이 치어 죽은 것이 최초입니다. 이제보니 20일 버스에 치인 전경들과 21일 도청 앞에서 궤도레일에 깔려 압사한 공수대원도 구별하지 못하는 군요.
광주에서의 첫 시민 희생자는 18일의 고 김경철님이고 17명의 사망자는 20일 전경 4분의 희생을 제외
지금 님이 한 발언들은 내가 여태껏 소귀에 경을 읽었다는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군요.
결국 부안방폐장시위에 결부시키며 속셈을 드러내고야 마는군요.
수고했습니다.
그딴식으로 할거면 애초에 논쟁을 걸지를 마세요.
토론의 바른자세는 자신의주장을 논리적으로 상대에게주장하여 이해의폭을 최대한 좁히는데 있지요
제가 부안 방폐장을 연관시킨건 그만큼 호남지역의 시위가 과격하다라는걸 보여주는 단초란 말입니다
부안방폐장에서도 광주처럼 경찰을 차량으로 밀어버렸습니다
경찰10여명이 부상 당했죠
과격은 결국 과격을 낳은셈입니다
저는 가까히 있었던 비슷한 사례를 님에게 설명하기위함입니다
그딴식이란 표현은 좀 거칠군요
이곳을 비롯한 자칭우파 정치쓰레기들이 5.18을 끈질기게 음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옹호할 수 밖에 없군요.
자칭우파 정치쓰레기들이 진심으로 중심을 잡을 때, 저또한 중심을 맞춰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 나는 5.18과 직접 관련도 없는 사람이고, 광주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그러한 정치쓰레기들의 음해를 보고있자니 분노를 금할 수 없어 매우 깊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5.18 재단까지 찾아가서 자료협조를 요청하고 했습니다만, 그분들은 이러한 음해들을 적극적으로 대
그래서 5.18 단체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거듭 이야기한 것이지만, 나는 시민들도 피해자요. 계엄군도 피해자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들을 그런 상황으로 내몬 전두환을 비롯한 야심가들이 원흉이지요.
광주사태는 발포명령이전 우발적이었다는것이 사실입니다
그점만 사실관게를 확고히하면 조금이나마 5.18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할수 있을겁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5.18관련부분을 구해서 보시기를 또한 매우 강력하게 권합니다.
그전에는 님이 중심을 잡기란 요원할 것 같습니다.
5.18을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다 폭동이다
규정하고싶지도않구요
다만 5.18을 부정하는측과 5.18을 옹호하는측에서
사실왜곡은 하지말았으면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관이 자리매김할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5.18을 깊이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어설픈 양비론은 필요없습니다.
사실왜곡을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뒤늦게라도 꼭 깨달으시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취침해야겠습니다
오늘토론 잘했습니다
다음에 또 봽죠
주무십시요 꾸벅 ~~10+
어디 공수부대들인지 아시겠네요???
몇몇 공수부대 사람들이 이야기 했던건 거짓말이 되는거구요.
저도 그 당시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출신들을 지인들을 통해
몇몇 압니다. 그날의 이야기를 하면 간혹 피하시는 분들이 많구요.
제대로 이야기 하시는 분 별로 없더군요.
어물어물 이게 제가 들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거의다가 몰라 그냥 이랬어 또 한가지 난 국가에 충성했어.
이게 주된 답변으로 돌아오기가 많았죠.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기에 말이죠.
그런줄만 알았던 저도 5.18 자체가 민주주의 운동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것 역시 불과 13년 전 일입니다.
제가 지금 39인데, 그당시 모래시계란 드라마가 있었죠.
그것을 보다가 5.18을 알게되었죠. 그래서, 알아본 결과
5.18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무었이였고. 또한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지
그걸 알게되었습니다.
폭동으로만 알고있던 5.18이였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렇게 바뀌더군요.
화려한휴가에서도 시민군편향 영화입니다
세상의모든일이란 양쪽이야기를 모두 들어보고 평가해야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이런걸 보면 역시 라도와는 영원한 평행선을 가고 있는거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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