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이회창씨는 명석한 분으로 정평이 나있다. ‘원칙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리(事理)에 밝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처럼 원칙에 충실하다는 사람이 오는 12월 대통령선거에 뒤늦게 출마할 것이라고 해서 온통 세상이 시끄럽다. 이씨는 요즘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다.
이회창씨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사리로 따져 볼 때 그가 출마하면 야당성향, 즉 우파·보수 층의 표는 분산되기 마련이고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비록 그가 가져갈 표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여·야의 판세가 갈수록 좁혀지는 경우 ‘작은 이탈’도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회창씨의 선거참여는 그 방식과 절차에 있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처음부터 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막판에 끼어들어 야당 후보의 약점을 극대화하거나 대체(代替)후보의 허상을 과장하는 식의 기회주의적 행태는 한국정치의 치부를 드러내는 졸렬함의 극치다. 그 스스로 그런 악성(惡性) 정치모략의 희생자로 자처했던 점에서 그의 처신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이회창씨가 그런 이치와 사정과 세론(世論)을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출마는 상식이 아닌 다른 초(超)상식의 잣대로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 이씨는 근자에 몇 지인(知人)들에게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정권교체의 질(質)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 말은 이명박 후보의 정권교체자로서의 자질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범여권(구체적으로는 이해찬씨)은 이명박씨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선거판에 흔히 나도는 유언비어성, 모략성 제스처라고 믿는다. 과연 ‘한 방’이 있기는 있는 것이며 있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지 알려진 바 없다. 그런데 어쩌면 이회창씨는 그 ‘한 방’의 실체를 알고서 저러는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말하자면 대선 후보의 등록(11월 26일)이 마감된 후, 범여권이 ‘한 방’을 날려 이명박 후보가 치명상을 입게 된다면 우파·보수 세력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정권교체는 물 건너 간다는 식의 ‘논리’ 말이다.
사실 친야적 유권자들은 이명박 후보에 대해 어느 정도 불안감을 느껴 왔다고 할 수 있다. 경선과정에서부터 제기된 도곡동 땅 문제 그리고 새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BBK 사건 등에 대해 “또 무슨 폭탄적 요소가 터져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특히 BBK사건의 주범 김경준씨가 선거를 앞두고 귀국하게 되면 있을지도 모르는 ‘폭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또 이명박씨가 당내 경선과정에서 경쟁했던 박근혜씨 세력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고 이로 인한 불협화음이 여기저기서 표출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씨의 지도자로서의 포용 능력에 의문을 품고 있다. 또 간헐적으로 보여지는 그 참모진들의 오만한 언행을 보며 이씨의 통솔능력에 실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씨는 연초 경선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경선은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미 본선에 대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호언했다고 한다. 그 후 그가 얼마나 호된 경선 신고식을 치렀는가를 보면서 그의 상황을 얕잡아 보는 태도에 경솔함이 느껴진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유권자들은 그래서 이회창씨의 출마설에 더욱 날카롭게 반응한다. 이명박씨의 문제점만으로도 걱정인데 이 틈새에 이회창씨가 끼어들어 표를 갈라 가면 상황은 끝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회창씨는 아마도 표가 분산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문제는 범여권의 ‘한 방’과 이명박씨의 ‘문제’로 인해 표가 구원투수 격인 자신에게 모아지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있다. 이런 추정이나 추론이 아니고서는 이회창씨의 출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이씨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비판과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이회창씨가 염두에 둘 것이 또 하나 있다. 오는 26일 후보등록을 하고 나면 도중 하차와 상관없이 선거법상 이씨의 이름은 투표용지에 명기될 것이며, 이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찍은 표는 모두 무효로 처리된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이 나라의 대선은 장난도 아니며 요행수의 게임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