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유철도12년계획'으로 한국의 간선철도망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킨 조선 총독부는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 하는 1930년대 후반부터 또 하나의 종관철도를 계획한다. 1936년에 5개년 계획으로 입안된 '조선중앙철도부설계획'은 동해중부선의 영천으로부터 경북, 충북, 강원, 경기도를 통과하여 경성근교의 청량리까지 연결하는 358.6km 의 내륙종관철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안동 - 영천 - 단양 - 제천 - 원주 - 양평을 통과하는 노선을 선정하였다. 이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은 4개도 27개 군으로, 연선의 인구가 188만명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노선의 건설을 경북, 충북, 강원, 경기에 걸처 오지의 풍부한 광산, 농산 및 임산 개발을 촉진하고 근래 발전한 경부축의 교통, 연락, 화물의 부담을 덜기 위함이라고 발표했다.
조선총독부의 말처럼 중앙선 연선에는 금, 동, 아연, 흑연, 석탄, 목재, 쌀 등이 풍부했다. 때마침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해 자원의 수탈과 전략물자의 확보에 혈안이 되 있었으므로 - 원문에는 '광분하고' - 이 철도의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또한 함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구간이 많은 경부선에 비해 내륙에 위치한 경경선은 함포사격에 의한 파괴의 위험을 안고 있던 경부선에 비해 군사적으로도 매력적인 노선이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5년의 시간에 6500만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경경선을 부설한다.
당시 건설된 경경선은 동해선 영천에서 북상하여 의성 - 안동 - 영주 - 죽령(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었던) - 단양 - 제천 - 치악 - 원주 - 양평 - 동경성(청량리) 에 이르는 345.2km의 노선이었으며 처음 계획에는 중앙선이라 불렸으나 영업을 시작할 즈음에 경경선으로 불리게 된다.
경경선은 1923년 이미 서빙고에서 이천 - 충주 - 단양 - 예천 - 안동 - 의성 - 대구를 연결하는 노선과 동경성 - 양평을 거쳐 장호원, 충주를 연결하는 노선을 중심으로 실측을 실시했으나 최종노선은 위에서 설명한 345.2km 의 노선으로 결정되어 1936년 죽령과 치악 두 터널 부근을 시작으로 전 구간에 걸쳐 동시에 실시된다.
경경선의 건설은 1936년도에 남북 양 기점과 죽령 및 치악터널에서 시작되었다. 경경북부선의 경우는 경원선 동경성(청량리)에서 시작하여 1939년 4월 양평까지, 1940년 4월 원주까지 108km 를 개통하였다. 치악 부근에서는 본선공사와 별도로 1937년 1월 착공하여 봉천과 제원가도 사이에 발전소를 설치 450마력 증유 발동기관 3대로 전력을 생산하여 양단에서 파고 들어가 1939년 5월 19일 완공하게 된다. 북한강 교량은 기초를 압기잠항공법으로 건설하고 특수교량에 대해서는 강구교각을 설계 시공하는 등 공기 단축을 위해 온갖 공법을 동원한다. 또한 1939년 8월에는 경원선과 연결을 위해 망우 - 연촌간의 노반공사를 착수한다.
경경남부선은 동해중부선 영천에서 북상하여 의성 - 안동 - 영주를 지나 소백산에 죽령터널을 뚫고 단양에 나가 북부선과 접속하는 노선이다. 1936년 12월 영천 - 신녕 간을 2 공구로 나누어 1938년 12월 우보까지 개업하고 계속 공사를 진행하여 1240년 3월 안동까지 모두 89km 가 개통된다.
공사 시공에 즈음하여 전시체제아래 레일의 입수가 어려워지자 일부구간의 개통이 연기되고 교량의 강형 제작이 늦어져 가교로 하였다가 나중에 재 공사를 하는 등 공사진행에 있어 무리한 점이 많았다. 또한 20m 장대레일의 시공에 있어 처음으로 장척레일 부설기를 사용하였으나 성과는 썩 좋지 못했다.
건설중에 중일전쟁이 가열되고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어 만주방면의 화물수요가 폭증하여 미개통 구간 62km 를 22개월 안에 급히 건설하는 공사도 강행되었다. 이러한 강행 건설때문에 죽령터널 남쪽 입구에 기관차가 핸드카가 충돌하고 제천 공사구에서 자갈열차의 탈선으로 수명이 사망하는 등의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경경선의 공사는 전시아래의 특수한 상황에서 급히 건설을 진행하느라 기계를 많이 사용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경선은 1942년 2월 8일 단양역 남쪽 입구 밖에서 남북 궤도의 연결이 완료되어 그 해 4월 1일 전 구간 개통식을 할수 있었다.
개통당시의 원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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