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허(虛)하면 소유물에 집착한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 법정, ‘무소유(無所有)’에서
기원전 624년 오늘날 인도와 네팔 국경 지역에 있던 샤키야족의 소국에서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부족함이 없이 자라 미모의 왕자비를 얻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29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연 출가했다. 그리고 수행 6년 만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어쩌면 싯다르타가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출가한 자체가 이미 깨달음의 절반을 성취한 게 아닐까.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싯다르타는 모든 걸 누려봤기 때문에 그게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닫고 선선히 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필자처럼 평생 부귀영화 곁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그걸 동경하며 평생 살아왔기 때문에 혹 갖게 된다면 (사실상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빼앗기면 빼앗겼지 스스로 내놓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다 싯다르타처럼 초연해지는 건 아니다. 오늘날 재벌 2세, 3세들이 싯다르타의 조건에 해당할 텐데 자신들이 가진 걸 내려놓고 떠난 사람이 드라마에서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갖겠다고 피를 나눈 형제나 사촌 사이에 법적 다툼을 벌이곤 한다.
불안·애착형일수록 물건에 집착
필자는 얼마 전 미국의 월간과학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5월호에 실린 글을 읽다가 싯다르타의 출가를 새로운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겠다는 영감을 얻었다. 즉 싯다르타가 부귀영화를 선뜻 버릴 수 있었던 건 태어난 뒤 평생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심리와 행동 분야가 전문인 저널리스트 프란신 루소가 쓴 ‘우리 물건, 우리 자신(Our Stuff, Ourselves)’이라는 제목의 글로, 소유물을 마치 자신의 몸처럼 애착을 갖고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최신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소유물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은 어릴 적 애착 형성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심리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와 동료들은 훗날 ‘애착 이론’으로 불리게 될 유명한 심리실험을 수행했다. 즉 아기는 자신을 돌보는 사람 (보통 어머니)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데 돌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애착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한결같은 애정으로 돌봄을 받을 경우 ‘안정 애착형’이 돼 커서 친구나 연인과도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돌보는 사람이 변덕스럽거나 마지 못해 키울 경우 아이는 ‘불안정 애착형’이 되거나 ‘회피 애착형’이 된다. 전자는 애정을 과도하게 갈구하거나 변덕을 부려 상대를 힘들게 히고 후자는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보통 절반 정도가 안정 애착형이고 나머지를 불안정 애착형과 회피 애착형이 반분한다. 그런데 2014년 발표된 메타연구 결과에 따르면 1988년 49%였던 안정 애착형이 2011년 42%로 떨어졌다.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주의(narcissism)가 심화되면서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 수년 사이 연구 결과 애착 유형과 소유물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밀접히 관련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불안정 애착형이 소유물에 더 강한 애착을 보였다. 믿고 기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늘 한결같은’ 물건에서 심적 안정과 위로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 애착형은 소유물을 의인화하는 경향 (자가용에 말을 거는 행동 같은)이 더 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 같기도 하다.
미국 하버드의대 정신의학자 조던 스몰러는 저서 ‘정상과 비정상의 과학’에서 “보울비가 제시했던 가장 강력한 통찰 중 하나는 애착을 통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라며 “인간은 안전한 애착이 확고하게 존재하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세상으로 나아가 반드시 익혀야 할 내용을 학습한다”고 쓰고 있다.
그런데 설사 안정 애착형인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소유물에 대한 애착 정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예를 들어 설문 참가자들 한 그룹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함에 대해 쓰게 하고 다른 그룹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함에 대해 쓰게 한다. 그동안 참가자들은 진행자에게 휴대전화를 맡겨야 한다.
이 실험의 포인트는 글의 내용이 아니라 글을 마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즉 관계에 대한 불확실함을 쓴 그룹이 서둘러 글을 마무리해 제출하고 휴대전화를 찾아갔다. 평균 180초로 자신에 대한 글을 쓴 그룹의 평균 250초보다 훨씬 짧았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안정한 측면을 떠올리면서 소유물에 대한 애착이 커져 ‘분리 불안’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자기 물건뿐 아니라 타인의 물건에도 그걸 소유했던 사람을 투영한다. 매력적인 사람이 앉았던 의자에는 선뜻 앉는 반면 싫어하는 사람이 앉았던 의자에는 엉덩이에서 전달된 온기가 식은 뒤에도 앉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 의자에 앉으면 병원체에 전염되는 것처럼 말이다.
2016년 발표된 한 논문에서는 ‘역행 전염 (backward contagion)’이라는 흥미로운 현상을 소개하고 있다. 아이에게 동년배 동성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아이는 친구를 때리고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을 안 듣는 골칫덩어리”라고 말한 뒤 “너가 좋아하는 셔츠를 얘한테 줄래?”라고 물으면 다들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뛴다. 그러나 “셔츠를 빤 다음 주면 어떨까? 확실히 세탁해서”라고 물으면 “그렇다면...”이라고 한발 물러선다.
즉 아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에 자신이 연결돼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소유물이 나쁜 사람과 접촉할 것 경우 설사 떨어져 있더라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느낀다. 즉 세탁을 통해 연결이 끊어져야 이런 걱정이 덜어진다는 것이다.
꽉 찬 공허, 텅 빈 충만
소유물에 대한 애착의 극단적인 형태가 저장장애 (hoarding disorder)다. 일단 내 소유물이 된 물건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더라도 결코 버리지 않고 집안 어디엔가 쌓아두는 행동이다. 이렇게 집안에 물건이 점점 늘어나다 보면 나중에는 걸어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 되고 잠 잘 공간도 없어 쪼그리고 잔다.
연구결과 성인의 4~5%에서 다양한 정도의 저장장애를 보이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불안 애착형의 경우 비율이 더 높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면 중증이지만 사실 ‘경증’ 저장장애를 보이는 사람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쩌면 나 자신?). ‘양의 탈을 쓴’ 저장장애의 하나가 ‘책 저장장애(bibliomania)’다.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집안에 책이 많으면 ‘독서가 취미인 지적인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책장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거나 같은 책이 여러 판본 있다면 책 저장장애를 의심할만 하다.
저장장애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놀랍게도 고치기 어려운 강박증상으로 인지행동요법 등 다양한 치료법을 행해도 불과 35%에서만 뚜렷한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이 수집한 물건들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 날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를 버린다는 걸 견디지 못한다. 물론 그럴 날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저장장애가 있는 사람의, 온갖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 없는 방은 한 마디로 ‘꽉 찬 공허’의 공간일 뿐이다.
필자는 40대 중반을 지나며 소유물을 늘리지 않기 위해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는’ 방침을 정했다. 예를 들어 새 옷을 하나 사면 안 입는 헌 옷을 하나 버리는 식이다. 다만 책은 예외로 뒀는데 ‘언젠가는’ 글을 쓰는데 참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는 꺼내보지 않을 책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이제 50이 됐으니 앞으로는 책도 ‘한 권을 사면 한 권을 버려야’겠다.
예전에 어떤 책인가 잡지에서 법정 스님의 방을 본 적이 있다. 몸 하나 누일 작은 공간에는 서안(書案)과 책 몇 권이 있을 뿐 가구도 벽을 장식한 그림도 없었다. 창호로 들어오는 햇살로 환한 방을 보면서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텅 빈 충만’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