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수백번의 원균에 대한 욕이 나온다.
특정 인물에 대해 섭섭하고 아쉬운 표현은 있었으나
대놓고 경멸하고 욕했던 유일한 인물이 원균이다.
뜻이 안맞았어서 라기 보다는 원균의 성정과 악행
그자체에 대한 내용이 많고 사람 취급을 포기한 듯 기록되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 보면 원균을 중용하려는 선조에게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하고 간한다.
이원익이 아뤠기를, "원균은 전공(戰功)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하고,
김순명(金順命)이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의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원균을 탐오하다 하여 대론(臺論)이 있었다.
원균은 지극히 청렴한데 탐오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김수(金?)가 아뢰기를, "전에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있었을 때는 어사(御史) 성낙(成洛)이
장계하여 포장(褒奬)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이 어찌 지극히 청렴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고,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종성(鍾城)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도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장수는 많이 얻을 수 없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이후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
임진란 발발시 조선 수군 에이스는 경상우수영이었다.
당시 수영은 7개 본영이 있었으며 경상 좌,우수영
전라 좌,우수영 그리고 충청,경기,황해이다.
조정 수군 예산의 대부분이 경상 우수영에 집중되었고
판옥선 만도 70여척이었다.
그런 곳에 선조는 원균을 부임시켰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겨우 고니시 1군과 가토 2군
몇만명의 상륙을 막기는 커녕 함선을 모두 좌초시키고
판옥선 1대만 남겨 도주했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징비록)
몸무게가 100Kg 초비만이었다고 하니 무인이 맞나 싶다.
머리가 안되어 문과는 포기하고 문과에 급제하나 아비의 빽임이
탄로나서 취소된 기록도 있다.
원씨는 거의 원주 원씨 단일본이다.
현재 인구는 13만명 정도이고 지씨와 비슷하다.
한반도 유사 이래 나라와 민족에게 도움이
되었던 원씨가 있었던가?
흥미로운건 일본에도 원씨가 있다.
미나모토씨라고 소위 겐지라 하는데 가마쿠라 막부 초대쇼군이다.
유력 가문인 미나모토씨는 중국에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갈라진 듯 보인다.
한중일 삼국에서 가장 성공한 원씨는 일본인거다.
수천년 오랜 세월 한중일이 섞인건 대다수 성씨에서 부인할 수는 없다.
단지, 내 조국 ....내 민족이라 귀히 여기고 진심이었던게 중요하지 않을까?
스스로들 무시하는 민족을 어느 타민족이 존중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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