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근무 》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자대로 가게 되면
전입신병대기기간이라고 해서
약 2주 동안의 부대적응기간이 주어진다.
이 기간 동안 신병들은
경계근무도 서지 않고 특별히 주어지는 임무도 없이
이것저것 하나하나 배워나가며
군생활의 요령을 터득해나가는 것이다.
이등병으로서 정말 편할 때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이때가 참 괴롭다.
그 2주 동안에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우선은 기본적인 행동요령과
청소하는 법, 내무반에서 이등병이 해야 할 일들..
직속상관 관등성명, 고참들 서열, 군가
간부들 관등성명과 차량번호,
경계근무 요령, 자신의 임무 등등...
외워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입대하기 전에 예비역 선배들의 충고에 의하면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A4용지 몇 장을 던져주며
거기엔 무언가가 빽빽히 적혀 있는데
그것을 3일안에 다 외우라고 한다고 들었었다.
그러나 마침 내가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쯤에
그것에 대해 부담을 느낀 한 이등병이
탈영을 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암기강요를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이전에 군생활을 하신 분들,
군대 참 좋아졌구나...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외우라고 주는 것들
전부 다 군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 아닌가..
어찌됐건 외워야한다는 얘기다. -_-
암기강요가 금지됐으니
물증이 확보되면 바로 영창으로 끌려가므로
A4용지를 던져주며 외우라고 강요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더라.
대신에 한번 들으면 그자리에서 다 외워야만 하는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해버렸다. -_-;
윗대가리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씨바...-_-
그나마 내가 있던 부대가 독립중대라
간부가 몇명 없고 따라서 차량이 몇대 안되기 때문에
다른 부대에 비해 외울 사항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아마도 연대급 이상의 큰 부대에서 근무하셨던 분들은
심히 괴로웠으리라 예상하는 바다. -_-
어쨌거나 이러한 것들을 외워가며
2주가 거의 다 지났을때
분대 맞고참인 오일병이 와서 물었다.
오일병 : 야 니네 근무서는 방법 배웠냐?
알랑&자이병 : 아...아직 못배웠습니다!
오일병 : 이런...클일났다! 니네 오늘 밤부터 근무 들어가있던데...내가 깜빡했나보다!
-_-;
멍청한 오일병놈이 까먹고 알갈켜주는 바람에
나와 자이병은 단 10분 동안 경계근무 요령을 배워야했다.
경계근무 요령이라고 해봐야 별건 없고
우선 근무명령서 확인과 근무투입과정,
초병이 무기를 사용할 시기, 경계구역,
야간수하요령 등등...
별거 없진 않았다. -_-;
특히나 강조해서 배운것이 바로 수하요령.
야간에 사람이 나타나면
호에 몸을 은폐하고
"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
라고 소리쳐 일단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나서 암구어를 대는데
일종의 암호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이쪽에서 "알랑!"하면
저쪽에서 "천재!"하는 식으로...
죄 죄송하다...-_-;
뭐 어쨌든 암구어라고 하여 매일매일 바뀌는
일종의 약속된 암호가 있는데
그걸 매일 확인하고 외워야만 한다.
암구어를 모를시 발포로 이어질 수가 있으므로
군인으로서 암구어를 숙지하는건
상당히 중요한 일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말년들은 몰라도 된다. -_-;
그렇게 서로간에 암구어가 확인되면
근무자 쪽에서
"누구냐?!"
"용무는?!"
이렇게 차례로 묻고
모든 사항이 확인이 되면
"보초전 6보 앞으로!"
이렇게 해서 상대방을 확인한 다음에
통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몇번 근무를 서보고 익숙해지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첫근무를 들어가는 신병에게 있어서
짧은 시간 동안 그 요령을 익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나의 첫근무는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무기고 경계였다.
사수는 중대 최고의 악질 조상병.
조상병.
우리 중대 최고의 악질고참이었으며
중대장의 블랙리스트에도 올라가있던
영창 1순위 폭력군인.
생긴걸 봐선 비리비리한게
밖에 있었을땐 한 좁밥하게 생겼지만
군대에선 마치 사회에서 건달이었던양 깝죽대며
일이등병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알고보니 진짜 좁밥이었다. -_-
저런 악질과 첫근무를 서게 되다니
나로선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근무나가서 무슨 짓을 당할 지 몰라
그 동안 배운 고참들 서열과 군가 등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보고
암구어와 근무요령을 필사적으로 외웠다.
참고로 그날의 암구어는
피자 - 수통이었다.
아직까지도 첫근무 때의 암구어를 기억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_-
시간은 흘러서
한참 곤하게 자고 있는데 불침번이 깨웠다.
" 근무 "
" 이벼엉! 알! 랑! "
-_-
이등병 땐 고참들이 지나가다 툭 건들기만 해도
저렇게 관등성명을 대면서 후다닥 일어났다.
깨울 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툭 치면서 작은 소리로 "근무"라고만 말한다.
저렇게 해서 안일어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므로
이등병 땐 긴장하고 있는게 좋다. -_-
잽싸게 일어나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근무복장을 갖춘 다음 조상병과 함께
무기고 근무투입을 했다.
" 정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
" 피자! "
" 수통! "
" 누구냐?! "
" 후번근무자! "
" 용무는? "
" 근무교대! "
" 보초전 6보 앞으로 "
다행히도 근무투입은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사수가 악질 조상병이었던지라
계속 긴장하며 속으로 외우고 또 외운 보람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근무투입을 하고
한동안은 아무 일 없이 그냥 근무만 섰다.
한 10분 정도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조상병이 조용히 말했다.
" 뒤로 돌아 "
원래는 서로 등을 맞대고
반대방향을 보면서 근무를 서는데
야심한 시각에는 서로 마주보고
서로의 경계방향을 봐주면서
근무를 설때가 더 많다.
두 시간 동안 앞만 쳐다보면 심심하잖아.
그리고 밤에는 무섭단 말야. -_-;
물론 이등병 땐 마주보는 이유가
고참들이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중대 최고의 악질답게 조상병 역시도
나를 괴롭히기 위해 뒤로 돌라고 했다.
굳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조상병은
이내 조용히 한마디 내뱉았다.
" 연대장 "
" 넵! 연대장님의 관등성명은 대령 이개똥 님이시고 차량은 에쎔 다섯 육공 2007번이며...
-_-
저렇게 한마디 툭 던지면 이등병은 좔좔좔 쏟아내야만 한다.
조금이라도 막히거나 기억이 안나면...
엄청 혼난다. -_- (알아서 상상하시길...)
첫번째 질문을 가볍게 통과하자
조상병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무시하는거냐 씨박새캬...-_-;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질문...
" 00년 6월 "
저 질문은 고참들 중 00년 6월 군번들 관등성명을 읊으란 얘기.
" 넵! 윤재학 병장님, 이은석 병장님, 김창덕 병장님, 정태윤 병장님... "
두번째 질문도 간단히 통과. -_-v
" 여기에 섰다 "
" 해뜨는 고지에서~ 바라본 하늘~♪ "
" 초병의 무기사용시기 "
" 자신의 신체를 보호함에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 내일 아침메뉴? "
" 네! 무맑은국, 오징어좃, 깍두기... "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해줬다.
씨바 난 천재인가? -_-
철모 밑으로 조상병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훗, 괴롭겠지.
나름대로 한번 괴롭혀볼라고 했는데
내가 다 대답하니 섭섭하지? -_-
잠시 말없이 조용히 있던 조상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뭐...뭐지?
뭔가 다른 대책을 강구한거냐?
으음...불안하다...-_-;
" ...P.X 납품차량... "
-_-
P.X 납품차량...
정기적으로 P.X에 물건을 갖다주는 차량으로
한달에 한두번 정도 온다.
고정출입차량이긴 하지만
오는 날짜가 일정한데다
그냥 보기에도 P.X 납품차량인지 알기 때문에
굳이 차량번호를 외우지는 않는다.
물론 근무를 서다보면 자연스레 외워지지만
첫근무인데다 P.X 한번 제대로 안가본 신병이
그런걸 어떻게 알아? -_-
" 자 잘못 들었습니다? "
" P.X 납품차량 차번호 대 이새키야! "
-_-
이 쉬발럼아...
니가 왜 악질인지 알겠다. -_-
" 저...그건 배우질 못했는데... "
" 뭐얌마?! P.X 납품차량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모른단 말야?!! 이새끼 이거 완전 꼴통이네 "
그때부터 한시간 정도 갈굼을 당한거 같다.
근무시간 두시간 중에 10분 정도 질문하고
한시간을 갈구다니...치사한 새끼..-_-
그렇게 한참을 욕을 먹고 있는데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저벅...
" 앗 누가 온다. 얌마 은폐엄폐해. "
호에다 몸을 숨기고 전방을 바라보니
희미한 사람그림자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 아무래도 당직사관이 순찰도나 본데 너 이새끼 수하 똑바로 해라. "
" 네...넵..."
첫근무에다 처음으로 하는 수하였다.
게다가 제대로 못하면 이 악질놈한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껏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피자...누구냐...용무는...보초전 6보 앞으로...'
'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피자...누구냐...용무는...보초전 6보 앞으로...'
'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피자...누구냐...용무는...보초전 6보 앞으로...'
그렇게 속으로 수도없이 뇌아리며
사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발자국 소리가 다가올수록 내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 소...손들어 움직이면...손들어...손들어...'
마침내 사람의 형체를 완전히 알아볼 수 있을만한 거리만큼
다가왔지만 차마 떨려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첫근무라 긴장했던 탓이 컸던 것이리라...
조상병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 이...이새꺄...언능 수하 안대? 가까이 오고 있잖아! "
" 아...저...그게..."
" 야 이 새꺄 계속 온다구! 빨리 해!! "
가뜩이나 긴장해있는데다 조상병 녀석이 자꾸만 재촉하는 바람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수하를 할 수밖에 없었다.
' 그래...별거 아냐...손들어 움직이면 쏜다...피자...'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수하를 확인하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 꼬 꼼짝마!! "
-_-
-_-
꼼짝마?
그게 뭐냐? -_-
이쪽을 향해 다가오던 사람의 형체는 우뚝 멈춰섰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_-;
그리고 조상병의 작은 목소리...
" 이 이런 씨박새키가...꼼짝마가 도대체 뭐야?!! 언능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해 멍청한 새꺄!! "
" 네...넵! "
사람의 형체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 소 손들면 움직여서 쏜다?"
-_-;
이런...
말이 헛나오기 시작했다.
" 이런 또라이같은 새키가...진짜 뒤지고 싶냐?"
" 그...그게 아니라..."
" 언능 암구어나 확인해 새꺄!! 이런 꼴통같은 새끼..."
-_-
그럴수도 있지 쉬발러마 -_-;
" 아...저...소 손들어 움직이면..."
" 걍 암구어 확인하라고 새꺄!! "
" 피자 쏜다!! "
-_-
손들어 움직이면 피자 쏜다?
손들면 움직여서 피자 쏜다?
이런 씨버럴...-_-;
말이 잘못 나와도 한참 잘못 나왔다.
잘할 수 있었는데 조상병 새끼가 끼어드는 바람에...
수하랑 암구어랑 섞여서 나와버린 것이다. -_-;
" 푸 푸하하하하하핫 "
이쪽으로 다가오던 사람이 배를잡고 웃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냐 넌? -_-
더 이상 수하를 할 의욕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데
녀석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당직사관 완장을 차고 있는 소대장이었다.
" 와하하하핫, 신병이구나. 오늘 첫근무 들어간거냐? "
" 이벼엉!! 알!!랑!! 네 그렇습니다!! "
" 그래.. 첨에는 실수할 수도 있지. 앞으로는 실수하지마라. "
" 네...넵!!"
" 아...조상병이 사수구나. 신병이라 실수한거니 너무 뭐라고 하지마라. 덕분에 진짜 웃겼다. 푸하핫"
당직사관은 그렇게 웃으면서 떠나갔다.
남은 근무시간은 약 30분.
내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토록 긴 30분은 첨이였다.-_-
그후 난 두고두고 중대에서 화제거리가 되었고
그 얘기가 나올때마다 고참들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요즘도 가끔 전화해서 그 얘기하는 동기놈들...
걱정마라.
니들 얘기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써주마. -_-
By. All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