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비군 조교 (하) 》
간신히 교장에 도착하니
나무그늘 밑에서 하이바를 베고 누워 처자고 있는
윤상병과 양병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새끼들 도대체 뭐냐...-_-;
일단 예비군들을 강의장에 앉혀놓고
무거운 말통을 든 채로
자고 있는 두 녀석의 옆으로 가 앉았다.
수십명의 예비군들이 올라왔으니
시끄러울만도 했을텐데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잘만 처자고 있더라-_-
교관 : 생각보다 많이들 힘드시죠? 허허, 올라오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잠깐 숨 좀 돌리고 5분 뒤에 교육 시작하겠습니다.
선두에서 예비군들을 인솔한 내 걸음이 느렸던 탓에
수색매복 교장에 도착했을때 이미 교육시작시간을 30분이나 넘겨버렸건만...
교관은 참 속도 편하게 5분 쉬고 하자고 한다.
교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예비군들이 내쪽으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예비군 : 우르르르르르르~
알랑 : 커헉! 머 멉니까?!! 이러지들 마십시오!!
예비군 : 물줘 새꺄-_-
음...
내쪽이 아니라 물통 쪽으로 온거구나...-_-;
무더운 여름에 전투복을 입고 산을 올랐으니
갈증이 심하게 날만도 했다.
물론 제일 심한건 말통에다 깃발까지 들고 올라온 나였지만;;
나는 아예 물마시러 갈 힘조차 없어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제대한지 오래되어도 군복만 입으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딱 이분들이 그꼴이었다.
말통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들이 마치
폭풍저그 홍진호의 저글링 개떼들을 연상시켰다-_-
그리고...
그 소란 속에서도 양병장과 윤상병은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_-;
잠시 그렇게 앉아 쉬고 있는데
난데없이 한 예비군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예비군 : 얌마 조교 이새캬! 이리 좀 와바!!
에이씨...힘들어 죽겠구만...
알랑 : 왜그러십니까 선배님?
예비군 : 물없어 임마. 물줘.
알랑 : 그 그럴리가 있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말통 하나 가득 떠온 물인데...
그러자 예비군은 말통을 거꾸로 뒤집어 머리에 써보이며 말했다.
예비군 : 없는데?-_-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이 흥건히 젖은 걸로 보아
급하게 먹으려다 절반 이상을 쏟은것 같다.
달려드는 꼬라지가 심상치들 않더라니...
이런 씨바...-_-;
여긴 산꼭대긴데...
좀전에 올라왔을때도 뒤질뻔 했는데...
또 갔다오라구?
보아하니 저 예비군 하나만 못마신거 같은데...
그 한사람 때문에 절대 그 고생을 할 순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알랑 : 저... 물은 셀프입니다.
예비군 : 조-_-까
음...역시나 안통하는군-_-
알랑 : 저 선배님... 죄송하지만 곧 교육 시작할거 같은데 조금만 참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다시 내려가서 물떠오는건 조금 힘들거 같습니다.
거의 애원하다시피 얘기했다.
이렇게 얘기하니 옆에서 거드는 사람도 있었다.
예비군2 : 그래요. 아까도 말통들고 올라오느라 힘들었을텐데 조금만 참으시죠.
조교들도 군생활하느라 고생이 많은데 우리라도 도와줍시다.
그런가하면 이런 놈들도 있다.
예비군3 : 이 교육 두시간 짜리라며? 그럼 있다보면 또 목말라질거 같은데 그냥 한번 갔다와라.
날이 더워서 물 자주 안마시면 죽을지도 몰라.
씨박놈...-_-
그래도 역시 모든건 교관에게 달렸다.
교관 : 우리 조교들 안그래도 고생많은데 조금만 참아주세요^^;
교관님 너무 좋아요...-_ㅜ
그러나...
그렇게 순순히 말을 들어줄 예비군이 아니다.
예비군1 : 물줘 물! 안주면 교육 안할꺼야! 목마르단 말야 물줘!!
이새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여기저기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땡깡을 부려댔다;;
교관 : 조교야 얼른 갔다와라. -_-;
할수없이 말통을 손에 들고 힘없이 일어나는데
소란통에 시끄러웠는지 윤상병과 양병장이 깨어났다.
양병장 : 응? 랑이 언제 왔냐? 근데 또 어디 가냐?
알랑 : 아... 오긴 한 10분전에 왔는데 물이 떨어져서 또 물뜨러 갑니다.
양병장 : 뭐? 아니 물뜨러 또 내려간단 말야? 아 진짜 예비군들 너무하네.
윤상병 : 그러게 말입니다. 지네들도 다 군생활 했을텐데 정말 너무한거 아닙니까?
양병장 : 아 나 씨-_-발 진짜... 진짜 군생활 드러워서 못해먹겠네. 얌마 말통 이리줘봐.
이놈들... 나만 버리고 도망쳐서 처자고 있을땐 언제고
이제와서 분개하다니...-_-;
알랑 : 예 옙! 근데 말통은 왜...?
양병장 : 내가 직접 뜨러 간다. 넌 여기서 쉬어.
알랑 : 헉! 아 아닙니다 양병장님. 그냥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양병장 : 쉬라면 쉬어 새꺄. 갔다올테니 윤상병한테 좀 배우고 있어라.
침이라도 뱉어서 와야지 젠장...
그렇게 양병장은 말통을 들고 터벅터벅 산을 내려갔다.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중대 왕고라는 사람이...그것도 전역이 한달도 채 남지 않은 말년이
고생한 후임병을 위해 직접 물을 뜨러 가다니...
이것이 전우애란 것인가보다.
군대란 곳이 어찌보면 정말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인것 같다.
그리고...
양병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_-
윤상병 : 내참 양병장 이새끼 또 샜구만. 어째 지가 직접 간다고 할때부터 수상하더라니...안그러냐?
알랑 : 아 아닙니다!
윤상병 : 아니긴 뭐가 아냐 새꺄! 이새끼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거야?!!
알랑 : 아닙니다!
윤상병 : 이자식 계속 아닙니다만 하네. 넌 아닙니다밖에 모르냐?
알랑 : 아 아닙니다...;;
윤상병 : 오호...이놈봐라...이런 개념없는 이등병노무시키가 나한테 시비를 거네...
너 이번에도 아닙니다 할꺼지?
알랑 : 아...아닙...-_-;
위의 대화는 고참들이 막내들 데리고 놀때 자주 사용하는 대화법.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고 당하면 기분이 더럽지만
나중에 짬밥 먹고 직접 해보면 졸라 재밌다 낄낄-_-
알랑 : 저...그래도 고참인데 대놓고 욕하는건 좀...;;
윤상병 : 이를거야? -_-
알랑 : 아닙니다!
윤상병 : 이새끼 또 아닙니다네... 일러 새꺄..
알랑 : 예-_-
윤상병 : 씨박놈-_-
아닙니다 하지 말라며...-_-;
그렇게 조교임무에 대해 배우는건 쥐뿔도 없이
쓸데없는 대화를 하며 노닥거리다보니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맡은 수색매복 교육은 두시간짜리 교육으로
한시간은 교관이 강의를 하고 잠시 휴식한 다음,
나머지 한시간은 조교의 시범과 예비군 실습의 형태.
앞의 한시간은 대부분 쉬는 시간으로 다 날려먹었고
고작 10~20분 정도 간단한 설명을 한 다음
또 다시 쉬는 시간을 주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까 그 예비군이 또 땡깡을 부리기 시작했다.-_-;
예비군1 : 얌마 목말라 죽겠다. 물 왜 안떠왔냐?!
알랑 : 아...저... 뜨러 갔는데 아직 안왔습니다;
예비군1 : 시러시러. 물줘 물.
이놈 하는짓이 생각보다 귀엽다.-_-;
윤상병 : 랑아 니가 갔다와봐라. 양병장 분명히 어디 짱박혀서 자고 있을거야.
알랑 : 예..
그렇게 혼자 터벅터벅 산을 내려와 취사장으로 갔다.
아 그러고보니 말통을 양병장이 들고 가버렸지..
양병장부터 찾아야겠구나;;
여기저기 짱박힐 만한 곳은 다 뒤지고 다녀봐도
어디에 있는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말년이라 그런지 짱박히는데는 도가 텄다.
짬밥은 무시할 수가 없는거구나-_-
할수없이 내무반 뒤편에 화재대비용으로 놔두는 말통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내무반으로 갔다.
뭐 어때? 내가 마실 것도 아닌데-_-
내무반에 가보니...
양병장이 당당하게 침상 한가운데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이토록 대담할 줄이야-_-;
양병장 : 응? 랑이냐? 벌써 일과 끝났어? 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알랑 : 물통 찾으러 왔습니다.-_-
양병장 : 음...그러냐? 아직 보람이 덜찼구나...-_-;
말통을 들고 내무반을 나서려는데 양병장이 따라나왔다.
양병장 : 얌마 기다려 같이 가자.
알랑 : 올라가실 겁니까?-_-
양병장 : 어. 역시 교장에 있는게 제일 안전해.
특히 수색매복 교장은 너무 높아서 검열관 떠도 거기까진 안가거든.
역시 짬밥은 인정해줘야하나?-_-;
말통에 물을 한가득 떠서 다시 교장으로 올라가보니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알랑 : 헥...헥...헥... 어 어라? 여기가 아니었나?
양병장 : 여기 맞아 임마-_-
알랑 : 여기 아무도 없는데 말입니다?
양병장 : 두시간짜리 교육이잖아. 지금쯤이면 다른 교장으로 이동했을걸?
너없어서 윤상병놈이 인솔해서 이동했나보다 낄낄... 불쌍한 새끼.
이런 씹...
그럼 도대체 물은 왜 떠온거냐? -_-;
알랑 : 그럼 여긴 다른 교육받은 예비군들이 오는 겁니까?
양병장 : 아냐. 수색매복은 오전 두시간, 오후 두시간밖에 없어.
이제 점심시간까지 우린 노는거야. 만쉐이~ 캬캬캬
으음...
오전내내 물떠다나른거 외엔 한게 없는데...
반나절을 날로 먹었구나...-_-;
양병장은 아침에 누워자던 나무 밑으로 가더니 나를 불렀다.
양병장 : 랑아 너두 이리와서 누워라. 피곤할텐데 한숨 자라.
알랑 :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이야 고맙지만 나중에 고참들한테 무슨 갈굼을 당할라구...;;
양병장 : 괜찮아 임마. 비밀로 해줄테니까 이리 와서 누워. 어차피 나야 곧 제대하는데 뭘...
알랑 : 괜찮습니다. 그냥 앉아있어도 편합니다.
양병장 : 얌마 짬밥차이 많이 난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마.
나중에 학교에서 만나면 형 아우 할 사인데 뭐...
아참... 양병장은 울 학교 선배였지-_-
나는 그 말에 힘을 얻어 나무그늘 밑으로 가서 누웠다.
양병장 : 힘들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라. 내가 학교선배라고 해줄수 있는게 이거밖에 없다.
그래도 고참 중에 자신과 관련된 사람이 있는건 좋은 일이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고 힘들게 지나가서
미처 느낄 새도 없었지만...
정말로 많이 피곤했었나보다.
그렇게 양병장에 말에 따라 나무그늘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다급하게 나를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양병장 : 얌마 알랑아!! 빨리 일어나 새꺄!!
알랑 : 이벼엉!! 알! 랑! 왜 왜그러십...
양병장 : 우린 좃됐어 새꺄!! 빨리 말통들고 따라와!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나?
어쨌든 말통을 들고 양병장의 뒤를 쫓아갔다.
알랑 : 헥...헥...헥...헥...헥...
양병장 : 뭐해 임마!! 빨리 뛰어!!!
아무리 내리막길이라지만...
물이 가득찬 말통을 들고 뛰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몸에선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말통을 들고 있는 팔이 빠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간부가 불러도 결코 뛰지않는 저 말년이
저토록 좃-_-빠지게 뛰는 것일까...
알랑 : 헥...헥...헥...양병장님...헥...무슨...헥...일입니까...헥...
양병장 : 닥치고 언능 뛰어! 점심시간이 벌써 20분이나 지났단 말이다 새꺄!!
-_-
그... 그래서...?;;
양병장 : 오늘 점심메뉴 갈비찜 나오는 날이란 말이다!!
이 개념없는 노무 새키들, 내꺼 안남기고 다 처먹었으면 죽여버릴테야!!!
이런 씨-_-발;;
그럼 굳이 나까지 말통들고 뛰어오게 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그렇게 팔이 빠지도록 말통을 들고 뛰어 취사장에 단숨에 도착했다.
갈비찜은...
없었다. -_-;
양병장은 오열했다.
양병장 : 야 이 씨박 좀만생들아아!!! 갈비찜 다 뱉어 이 십색기들아아아아!!!
제길...
어째서 저런 놈이 나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지...
아주 쪽팔려죽겠다 그냥-_-;
그렇게 취사장에서 난동-_-을 부리던 양병장은
행정보급관한테 뒤통수 두대 맞고 쫓겨났다.
양병장 : 흐윽...흐윽...갈비...갈비찜...흐으으으윽...
알랑 : 그만 잊으십쇼 양병장님...-_-;
양병장 : 으흐흐흑...내가 그 갈비찜 먹을라고..흑...얼마나...흐흐흑...
근데 너 말통...졸라 무거워 보인다...흑흑...
알랑 : -_-;
양병장 : 바보같은 녀석... 어차피 취사장으로 올거였는데 물은 버리고 빈통만 들고오지 그랬냐?-_-
제기랄...;;
그럼 우리는 지금 갈비찜을 사수하러
취사장을 향해 뛰는거라고 진작 좀 알려주지 그랬냐? -_-;
양병장 : 에이...이왕 이렇게 된거 P.X나 가자. 내가 꽁꽁떡갈비 쏠께.
그날 점심은 양병장에게 P.X의 각종 냉동식품들을 잔뜩 얻어먹었다.
진짜 배터지게 원없이 먹었다.
토하기 직전까지 먹었다.-_-
양병장 : 꺼억~ 배부르지? 나중에 너 제대하거든 학교에서 나한테 한턱 쏴야된다?
과연 그때가 올지는 모르겠지만...후훗...
알랑 : 네-_-
배부르게 먹고 다시 교장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윤상병이 혼자 누워자고 있는 중이었다.
양병장 : 이런 시-_-발 배신자새키... 혼자 갈비찜 잘 처먹고 와서 처자는구나-_-
윤상병 : ZZZZZ
양병장 : 에이 나도 잠이나 잘란다. 랑아 이따 교관 올라오거든 깨워라.
알랑 : 예.
양병장과 윤상병은 자버리고
나만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렇게 혼자 앉아있으려니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입대한 친구녀석들의 얼굴과...
술마시며 놀던 기억이며...
맘속에 묻어둔 그녀와의 추억과...
아버지...그리고 엄마...
그러고보니 입대를 한지도 벌써 두달이나 지났다.
너무나도 정신없이 보냈기에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고작 두달의 시간이 아주 오래 전의 일로만 느껴지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와버린 것만 같다.
지금은 이등병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언젠가는...
다시 그들을 만날 수가 있을까...
문득 시끌벅적한 소리에 잡생각을 떨쳐냈다.
산 아래로 예비군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점심시간이 끝났나보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자.
지금의 난 대한민국 육군 이병 알랑이다.
현재에...충실하자...
" 자 선배님들 본 조교 바라보시고 한줄에 10명씩 차례로 강의장에 착석하십니다!!"
난... 예비군 조교다.
" 닥치고 물!!-_- "
쳇...폼 좀 잡아볼랬더니...-_-
어라? 그러고보니 말통이...
젠장...아까 P.X에 놔두고 그냥 왔나보다-_-;
" 선배님들...물은 셀프...-_-;"
" 조까 씨-_-발 언능 가서 떠와!! "
후방부대의 예비군조교들도 나름대로 군생활 존나 힘들다. -_-
By. All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