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에 김일성이가 만들어준 작품들
서울과 부산에 김일성이가 만들어준 작품들
부산 동광동의 판자집촌.
당시 피난지에는 화재가 많이 났었다. 목재건물도 많았고, 피난민의 집이란 것이 불이 쉽게 붙을 수 있는 것들 이었다. 또 가뭄도 심해서 불이 자주 났으며, 물이 모자라 배급을 주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폐허 속에서 살 집을 마련해야 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집이란 비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것이면 족했다. 포탄껍질로 굴뚝을 만들고, 미군들의 씨레이션 박스로 지붕과 벽을 만들었다. 이것이 일명 하꼬방이라고 불리는 판자집, 이런 집 외에도 가마니로 만든 집이 있었고, 천막으로 만든 집,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이 있었다.
서울 중심부 청계천의 판자촌
판자집도 지을 형편이 못되는 피난민들은 움막집에서 기거하였다.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님의 60년대 부산 판자집 사진(1962년) 중에서.
청계천과 중량천의 뚝방촌 사람들과 그 추억
6.25전쟁후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약40여년 전 까지 여기 저기 개천이 흐르는 뚝방가에서 바람을 피해 서울이라는 삶의 꿈을 안고 상경한 곳곳의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무허가 뚝방촌이 만들어지고 애환 속에 서울에 꿈이 자라고 희망이 샘솟던 곳들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하루의 태양이 기울어 밤이 되면 어두운 밤하늘에 은하수 물결 넘치고 별들이 속삭이는 사랑과 정이 넘치는 고단함 중에서도 미래가 보이는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개발이 되고 도시계획의 정비로 그 옛날 모습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이 높은 빌딩들이 키 자랑이라도 하듯이 곳곳에 솟아오르고 있다. 중량천 사람들은 서울에 대한 마냥 부푼 꿈을 안고 상경을 했지만 막상 시대적인 어려움과 빈곤의 돌파구를 근처 밭을 일구고 하여 각가지 농사일로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올리며 살아가고 청계천 사람들 역시 거리의 좌판을 펼치고 미군수품이라든지 시레이션, 등 미제 중고 물품들을 좌판에 놓고 하루하루 생활을 연명하며 살았지만 내일이라는 부푼 꿈의 끈이 놓이질 않는 가운데 우리 서울 중심의 동맥선인 상가가 형성이 되었던 것이다. 고작 몇 백 원 정도의 수입에도 파장이 되면 골목집 선술집에 모여 고단한 하루를 풀면서 흥을 잃지 않으며 지금껏 반세기 가까운 시절의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빈곤하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지금은 일각이 지체할 수 없는 바쁜 시간의 돌림 앞에 숨 쉴 사이 없이 살아가는 생활의 전쟁터로 변해 버린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발전과 변혁의 물결이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지만 우리의 정신세계마저도 급변하고 여유로움을 찾기 힘든 기계적인 삶으로 변해 버리고 여기서 한 치만 늦추어도 그 대열에서 이완된 치차처럼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자연발생의 삶의 논리가 만들어지고 이론이 성립되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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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가슴에 허허로운 마음을 열고 정을 나누는 진정한 참모습의 아름다움이 다시 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고 또한 서울의 하늘에서도 밤하늘의 맑은 별들이 속삭이는 낭만의 거리가 더욱 더 정겹게 이뤄졌으면 하는 희망이다.
▲ 40여년전 청계천변 뚝방촌의 모습들
▲ 위 그 자리에 고가도로가 생겼다가 철거된 후 현대화한 요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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