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멀다보니 아침밥을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다. 특히 해가 짧을 때는 더 바쁘다. 반찬 씹을 시간조차 아까워 뜸도 덜든 밥에다가 간장만 조금 넣고 비벼서는 그것도 다 먹지도 못하고 나설 때가 많았다. 거기다가 뛰기까지 하니 배가 고파 중간에서 도시락을 다 까먹어 버린다.
점심시간에는 강냉이 죽이 나왔다. 미국 구호품인 우유가루와 강냉이 가루로 학교에서 죽을 끓여주었다. 등교 때 장작을 한 갠가 두갠가를 갖다 주고.. 강냉이 죽이면 강냉이 죽이지 거기다가 우유는 왜 넣어가지고...
어릴 적 우유나 쇠고기, 돼지고기엔 알레르기가 있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밥상에 오르는 날이면 같이 밥을 먹기도 힘들어 내가 좋아하는 구운 생선이 올려진 내 밥상은 따로 차려져 다른 방에서 혼자 밥을 먹을 정도로 알레르기가 심했다.
점심시간에 나오는 강냉이 죽도 우유를 넣는 바람에 장작만 갖다 줄 뿐인지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학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찐빵을 팔았다. 남들 죽 먹을 때 난 호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락거리며 망설인다. 정문으로 나갔다 오자니 너무 멀고.. 뒷문으로 가면 가까운데 뒷문으로는 학교에서 다니지를 못하게 했다. 죽도 못 먹는데 배가 고파 혼자 찐빵사먹으러 나갔다 온들 벌이야 주겠냐만 얌전한 순딩표다 보니 바보같이 학교에서 하질 말라는 건 하지를 못했다.
내가 얌전한 순딩표라니까 지난 번 글을 읽으신 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실진 몰라도 6년 동안의 통신표 생활기록난을 보면 한결같이 '온순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어쩌구 저쩌구..' 로 시작되었으니 순딩표는 확실....
남들 죽 먹을 땐 난 혼자 우물물로 배를 채웠는데 너무 배가 고파 하교 길에 찐빵을 몇 번 사먹은 기억이 있다. 같이 몰려가면서 도저히 혼자 먹지는 못하겠고 우리 동네 녀석들만 하나씩 나눠 먹더라도 14개.. 그것도 눈치가 보이고...
우리 팀들 전체 한번, 우리 동네 녀석들만 한번, 두 번 사먹으니 모아두었던 용돈이 딸랑거렸다.
찐빵 값을 대자면 집안 일을 도와줘야 하는데 농번기 때나 매일 도울 일꺼리가 있는 것이고, 집에 도착하면 해질녘이라 시간도 안되고, 아버지와 내기 장기로 충당이 가능하지만 평일은 어림도 없다.
배고플 때마다 돈을 만지락거리기도 싫어 아예 돈을 안가지고 다녔더니 오히려 그것이 편했다.
그 시절엔 용돈이란 명절에 받는 세뱃돈.. 어쩌다가 친지들에게 받는 게 전부였지만 아버지는 내가 집안일을 도와주면 도와준 만큼 용돈을 주셨다. 어쩌다 형님들도 조금씩 주기도 했으니 다른 녀석들에 비해 용돈은 넉넉했던 편이다. 근데 이 용돈들이 새끼를 친다.
당시 우리 동네엔 장기가 유행이었다. 우리 동네 하수가 다른데 가면 고수대우를 받을 정도였으니 꽤나 수준이 높았던것 같다.
특히 우리집은 대문밖을 나서면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버지를 비롯, 형님들이 장기를 잘 두셨다. 덕분에 나도 학교에 들어갈 즈음 일찍 어깨너머로 장기를 배워 형님들과 자주 장기를 두다 보니 실력이 늘어 동네 어른들과 자주 장기를 두곤 했었다.
아버지와의 내기 장기는 3학년 때부터 시작했지 싶다. 한가할 땐 아버지가 장기를 두자고 하신다. 그냥 두면 이기던 지던 대충 두게 된다고 꼭 돈을 걸어 놓고 두자신다. 처음 얼마 동안은 번번히 깨졌다.
'아부지한테 니 돈 다 털렸재?' 어머니가 슬쩍 채워 주긴 하셨지만 힘들게 일 도와주고 번 돈을 도로 다 빼앗아 가시는 격이니 아무리 부자지간이라지만 장기에 지고...돈 잃고...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러니 장기를 둘 땐 아무 잡념없이 장기판에만 최선을 다 하게 된다. 그랬더니.. 언제부터인지 두기만 하면 연전 연승이라 이기는 만큼 용돈도 차곡차곡 쌓여가니 아주 신이 났었다.
불패의 기록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날.. 아마 6학년 때? 그날도 아버지를 코너에 몰아 놓곤 기분이 좋아 싱글거리며 룰루랄라하는데.. 돋보기 안경을 연신 닦아 대시는 아버지의 검은 머리 사이로 자리 잡은 흰머리카락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영 편치를 않았다.
그때부터 연전연승 불패 기록은 깨어졌다. 내 용돈이 축 안날 만큼만 이길 때는 이기고 질 때는 지고..
'이상하다...니가 실력이 줄어들진 않았을테고..' 그때쯤 동생도 장기판에 끼어 들었다. 아버진 내게는 이기셨지만, 동생에게는 지시고, 그 동생은 내게 깨진다. 초딩을 졸업하고 부모님 곁을 떠날때 까지 이런 묘한 승부는 계속되었다.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더 기분이 좋을 수도 있다는걸 난 일찍 안 셈이다.
아버진 한번도 내게 이래라 저래라 시키신 적이 없으셨다. 스스로 하게끔 만드셨고 그 속에서 뭔가를 깨닫게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나 역시 아들 세놈 대학졸업 때 까지 한번도 공부하라고 한 적이 없다. 내 스스로 책을 끼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
고3때도 빨간 날은 오락으로 시간을 때우던 막내, 수능을 치르고 오던 날, '빨간 날도 공부를 할 껄' '괜찮다. 잃은 것 이상으로 얻은 것도 있을테니...'
나에게 많은 걸 스스로 깨우치게 해주시고 가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못난 자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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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아버지는 줄거주시고 막판에 졸 다섯개를 한발한발 전진시키면서 저를 압박하셨던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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