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충정공 민영환(1862~1905) 구한말의 문신. 한국 최초의 러시아 특사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렸으나 정세를
만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고
결국 자결을 택한
순국지사이다.
1905년 자결한
민영환 선생의 의복이 놓여있던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 1905년 11월 30일 자신의 명함에 유언을 빼곡히 적고 자결하였다.
이듬해 자결할 때
입었던 피묻은 의복이 있던 자리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이것이 바로 혈죽(血竹)리 불리는 대나무다.
1906년 7월
5일 대한매일신보 '어제 민영환 선생의 부인이 신문사에 와서 집에 녹색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충정공이 항상
생활하는 방의 바닥에서 녹색 대나무가 위로 솟아서...'
민영환의 유서
이천만
동포에게 드림
(생략)
나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謝)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라 이것이 지금 내가 나아가야 할 삶의 결론이
되리라...
민영환 순절
명부공사
大人輔國正知身 [대인보국정지신]
대인이 나라 위해 일함에 정히 자신을 알고 磨洗塵天運氣新 [마세진천운기신] 티끌세상 갈고 씻어내니 운수가
새롭구나. 遺恨警深終聖意 [유한경심종성의]
남긴 원한 깊이 경계하여 성상의 뜻을 다하고 一刀分在萬方心 [일도분재만방심] 한 칼로 몸을 가름에 천하 사람의
마음이 있노라.
그 혈죽은 현재까지도 보관되고 있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뽑혀진 대나무를 민영환 선생의 부인께서 보시다가
잎의 수를 세어보니 45개로,
바로 민영환 선생이 돌아가신 나이와
일치하였다.
당시 일본은 이
사건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많은 사람들이
혈죽을 보기위해 몰려 오자 독립의식이 고취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민영환 선생 가족이 조작했다고 생각하고 바닥을
뜯어내었는데 뿌리가 없고 줄기와 잎새만 있어 더욱 놀라웠다.
그게 동포에게 남긴 유명한 이
유서는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
홍만식 등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 자결했다.
조문객이 수없이
몰려오고, 하세가와 대장 등 일본
고관들도 달려와 조의를 표했다. 나라에서는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의정대신을
추증했다.
그가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지하실에 간직하고 그 방을 봉했는데,
순국하고 8개월이 지난 이듬 해 봄 그
자리에서 청죽(竹)이 솟아 올랐다.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의 충절을 말하는 혈죽(血竹)이라 불렀다 한다.
김은호 화백, 김우현 목사 등 청죽을
목격한 분들이 많았다.
민영환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이른바 혈죽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피어난 대나무의
잎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고,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마루를 뜯어 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가 확인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제는 혈죽의
조작 증거를 잡지 못하자 대나무를 뽑았는데 쑥 뽑혔다고 한다. 만약 뿌리를 통해 번식했다면 대나무가 뽑혀 나올 리 없다" 고 말했다.
일본 사람들은
유서가 적힌 명함과 이 혈죽을 내 놓아라고 졸랐으나, 부인 박씨는 혈죽을 뽑아 식물표본처럼 만들어 명함과 함께 감추고 없다고
버티었다.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 것은 광복 이후,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씨에
의해서다. 해방이 되던날 비로서 명함과
혈죽을 내놓아 가족들에게 보였다 한다.
그때까지는 가족들도
몰랐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충정공의 종손인 전 주불대사 민병기씨(丙岐)가 조모로부터 물려받은 유품들을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충정공 민영환은 '死而不死'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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