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원짜리 에쿠스와 현대차의 살길
원화강세와 엔화약세가 함께 오면서 현대-기아의 수출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고 연합뉴스가 13일 전했습니다. 현대는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여전히 일본차보다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시장을 확대해 왔는데요. 최근 엑센트(국내명 베르나) 쏘나타 아제라(국내명 그랜저) 같은 현대의 새 트리오가 모터트렌드(Motor Trend) 등 미국 자동차 권위지에서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받는 등 과거와 달리 틈새시장에서 본류로 진입하려고 분투 중입니다. 그러나 2006년 미국인들의 눈으로 볼때 여전히 쏘나타는 어코드 캠리보다 조금이라도 싸야만 가치가 있습니다. 설사 품질 성능면에서도 차이가 없다해도 현대라는 브랜드는 아직도 혼다나 도요타와 같은 명성을 얻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죠.
현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엑센트 쏘나타 그랜저를 통해 일본차와 싸워 이겨야 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급락(원화 강세)하여 오히려 가격인상 요인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반면에 엔-달러 환율은 꾸준히 오르고(엔화 약세) 있는 추세라 일본업체들은 미국시장내에서 차값을 올릴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습니다. 10일 국내 외환시장 종가기준으로 원-달러 환율은 967.80원으로 올 들어서만 벌써 4.3%가 떨어졌으나 엔-달러 환율은 117.98엔으로 작년 말(117.93엔)과 비슷하며 2004년말과 비교하면 14% 이상 상승하였습니다.
미국시장에서 쏘나타는 어코드 캠리보다 10%도 싸지 않습니다.(기본형 비교, 옵션 차이는 제외) 그래서는 생각만큼 팔려주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공식 판매가보다 할인해 파는 일도 많습니다. 이렇게 파는 가격은 2.4리터 엔진에 풀옵션을 넣는다해도 2만달러를 넘지 않는데요. 우리 돈으로 따지면 2000만원이 안됩니다. 국내 판매가격보다 많이 쌉니다. 그러나 현대는 미국시장에서 값을 올리고 싶어도 절대 올릴 수가 없습니다. 쏘나타보다 겨우 몇천불 비싼 가격에 캠리와 어코드가 버티고 서있기 때문입니다. 어코드의 명성은 식을줄을 모르고, 설상가상으로 캠리는 더 강력해진 최신형 모델로 쏘나타를 압박할 기세입니다.
게다가 원-엔 환율도 꾸준히 떨어지고 있어서, 국내 일본차 값마저 인하요인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 시판중인 렉서스나 혼다의 차량가격이 현재보다 10%만 떨어져도 국내시장 점유율이 큰 폭으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실제 혼다코리아는 올해 특별소비세 인하조치가 환원되면서 국내업체와 대부분의 수입차업체들이 일제히 차값을 올린 것과 달리, 어코드와 CR-V를 특소세 인상 이전의 가격으로 팔고 있습니다. 도요타코리아는 본사와의 자금 결제를 원화로 하기 때문에 엔화 약세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결국 본사가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렉서스 전차종에 대한 가격인하조치를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BMW 325i(6220만원)와 겨루어도 손색없는 IS250(4500만원)같은 차를 3900만원대로 한번 내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팔아도 도요타는 손해보지 않습니다. 한해에 10조원대의 순수익을 남기는 회사에서 한국시장 확대를 위해 그정도 결정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내릴 수 있습니다. 한일 FTA(체결시 일본차 8~10% 추가 인하요인 발생) 이전 상황에서도 고급차시장에 상당한 파괴력을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현대차는 지난 7일 “대형세단 에쿠스 리무진 VL450 2006년형 풀옵션 모델의 총 구입비용은 1억152만원에 달해 국내 차종중 처음으로 1억원 벽을 넘어섰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에쿠스 리무진 VL450은 차값 9078만원에 뒷자리 VIP시트와 텔레매틱스서비스인 모젠 등 옵션(158만원)을 달고 탁송료(20만1000원)까지 포함하면 총 판매가가 9256만1000원이고, 여기에 차량 취득·등록세로 896만원 이 들어 총 구입비용이 1억152만원에 이른다는 겁니다. 현대차 관계자는 인상요인에 대해 “세계최초로 지상파 DMB를 장착해 뒷좌석 모니터를 통해 주행시에도 선명한 TV화면을 볼 수 있고 고품격 우드그레인과 주름가죽시트 등을 적용해 가격이 올랐다”고 설명했습니다.
현대차가 아직까지도 얼마나 가격에 목숨을 거는 회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밖에서 싸게 팔아야 하는 설움을 국내에서 비싼값을 매겨 보상받으려는 것일까요? 외국에서 힘겹게 경쟁하면서 국내에서만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위성 DMB나 모젠 주름가죽시트 다는게 제품력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에쿠스 물론 좋은 차입니다. 에쿠스 리무진 딱 한번 타보았는데, 대형차에서는 핸디캡이라 할 수 있는 전륜구동형 차이면서도 주행안정성이나 정숙성 면에서 부족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에쿠스는 해외시장에서 국내 판매가격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갔을때 경쟁력이 전혀 없는 차종입니다. 확언하건대 전혀 팔 수 없습니다. 비슷한 가격에 끝내주는 대형차들이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를 1억원이라는 가격을 깼다고 자랑스럽게 보도자료를 내놓는 현대의 마음가짐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겁니다.
올 가을이면 렉서스의 대형세단 LS430의 후속모델 LS460이 등장합니다. 스피커만 18개가 달린 마크레빈슨 오디오에 초호화 고급편의사양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8단(7단도 아닌 8단입니다!) 자동변속기에 4.6리터 V8 380마력짜리 엔진이 조합돼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시간을 5초대에 끝내고 공인연비도 리터당 9Km 가까이 됩니다. (현대 에쿠스의 4.5리터 V8엔진은 최고출력 270마력으로 LS460보다 110마력이 적지만 공인연비는 리터당 6.8Km입니다) 구형보다 더 커지고 더 고급스러워지고 디자인 완성도도 크게 좋아졌습니다. 과거 렉서스 LS430과 달리, 현행 벤츠 S클래스나 BMW7시리즈보다 오히려 나아보일 정도의 스펙과 디자인입니다. 올 연말쯤 국내에 시판될 것으로 보이는데, 예상가격은 1억1000~1억2000만원대입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도요타가 맘만 먹으면 에쿠스 리무진보다 싼 9000만원대에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물론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때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만) 그 값에 내놓아도 도요타는 지금 환율추세로 봤을때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으니까요.
미국시장에서 참패하긴 했지만 폭스바겐의 페이톤 3.0 TDI 같은 모델도 국내판매가격이 8150만원입니다.(물론 디젤엔진 모델이기때문에 단순비교는 곤란합니다) 휘발유엔진인지 착각할만큼 조용하고 5리터급 휘발유엔진의 강력한 토크를 지닌데다 전체 완성도는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 못지않은 수준을 자랑하는 차입니다. 다만 폭스바겐 엠블렘을 달고 있기 때문에, 이 차가 국내에서 인정받는 가격이 그 정도인 것이죠. 그러나 이 차에 달린 TDI 엔진의 섬세함은 당장의 현대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만큼 뛰어납니다. 내외장의 마무리나 엔진과 트랜스미션과의 조화도 역시 업계 톱 수준이고요. 미국시장에서 페이톤이 철수한데는 물론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 역시 폭스바겐이 만든 럭셔리세단이라는것을 미국 소비자들이 인정해주지 않은 부분도 컸다고 봅니다.(물론 15년전 렉서스처럼 초기의 낮은 인식수준을 최고급 서비스와 품질로 이겨나가지 못한 것은 폭스바겐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국내시장에서는 어떨까요. 폭스바겐이 만든 이 럭셔리세단과 현대 에쿠스를 비교했을 때, 에쿠스가 페이톤 수준과 엇비슷하다고 현대가 주장할 수 있을까요? 에쿠스가 아무리 화려하고 거대하다 할지라도 페이톤 수준이 아직은 한두단계 위입니다.
현대차가 시장 안팎으로 가격에만 안주하다가는 미국시장뿐 아니라 국내시장도 위태롭습니다. 국내시장에서 에쿠스의 가격은 이미 세계최고 반열에 올라있는 렉서스 최고급세단에 맞먹을 정도가 됐습니다. 사정상 수입차를 살 수 없는 부유층들이 소비해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는 정상적인 판매라고 할 수 없겠지요. 현대 고급차가 렉서스와 동급으로 인정받기를 고대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습니다. 가격으로 ‘동급입네’ 해봐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역시 겉치레가 아닌 기본기로 승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