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바오 섬을 사이에 두고 말다툼하는 중소 국경수비대. 왼쪽이 소련군이고 오른쪽이 중국군이다.
흰 위장복이 소련군, 짙은색 군복이 중국군, 얼어붙은 강에서 벌이는 싸움이다. |
결국 전바오 섬에서 양국 수비대의 신경전은 육탄전으로 번졌다. 패싸움으로까지 발전된 이 난투극에서 승자는 소련측이었다. 무엇보다 체구면에서 중국군은 소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군들은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마주친 소련군과 패싸움을 벌였다. 이번에도 역시 승자는 소련군이었다. 일련의 패싸움에서 중국군 사병 일부가 사망하기도 했다.
체면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중국군은 새로운 반격을 시도했다. 일반보병인 경비대원들을 최정예 특수부대원들로 모두 교체한 것이었다. 교체된 병력은 동북지역을 관장하는 제49야전군에 배속된 특수부대원들이었다. 난투극을 촬영하기 위해 파견된 기자 역시 특수부대 소속 교관요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소련군은 마주친 중국경비대원들을 놀려대기 시작하면서 양측간에 다시 패싸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달랐다. 체구만 믿고 주먹을 휘두른 소련군들은 민첩한 중국군 특수부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 소련군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퇴각했다. 갑작스런 패배에 당혹한 소련군 경비대장은 퇴각한 부하들로부터 정황을 보고받았다. 격투술 솜씨 등을 검토해본 결과 새로 교체된 중국군이 일반 보병이 아닌 특수부대원들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이를 상부에 보고하면서 소련군경비대장은 자신의 휘하에도 특수부대원들을 배속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상부에서는 경비대장의 이런 요청을 군말없이 받아들였고 보고한지 며칠도 되지 않아 극동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이 경비대에 배속됐다. 바야흐로 소련과 중국군 특수부대가 맞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중국군에 대한 복수극을 위해 구성된 소련군 특수부대의 지휘관은 겉보기엔 정상인이 아니었다.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군들은 그를 '절뚝발이 중위'로 놀려댔다. 훈련 도중 발목근육을 다친 그는 겉보기엔 정상인의 걸음걸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법.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최정예특수부대에 근무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뭔가 비상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절뚝발이 중위'의 등장은 전세를 역전시켜 놓았다. 그에게 달려든 중국군은 하나 같이 온전히 코뼈를 유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군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유행했다. "절뚝발이 중위와 맞짱을 뜰 수밖에 없다면 아예 마누라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은 버리라"는 조크였다. 그러나 이런 조크는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 복싱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그는 무엇보다 상대방의 안면부에 대한 잽이 탁월했다. 왼팔은 공격에, 오른팔은 방어에 사용하라는 무술을 익혀온 중국군으로서는 불시에 날아온 '절뚝발이'의 주먹공세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이후 중국군 특수부대는 호신술교육 내용 중에 복싱을 추가했다.
만만하게 본 상대방으로부터 묵사발이 된 중국군 특수부대는 자존심이 이만 저만 상한 것이 아니었다. 상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장애인이 지휘하는 오합지졸들에게 중국군 가운데서도 최정예로 소문난 제49집단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줄을 예상치 못했던 상부로서는 노발대발한 것이 당연했다.
상부의 불호령을 받은 제49집단군 지휘부는 서둘러 묘안 찾기에 나섰다. 묘안은 의외로 가까운데서 발견됐다. 산동성 출신으로 '산동꼬마'(小山?)라는 별명을 가진 특수부대 소속 초급장교였다. 산동성은 옛부터 무술의 본고장으로 정평이 난 곳이었다. 그런 출생지에 걸맞게 그 역시 무예가 출중했다. 적어도 공포의 대상인 '절뚝발이 중위'와는 일대일로 맞붙여도 상대가 된다는 판단을 내린 집단군 지휘부는 그를 젠바오섬 경비대로 전출시켰다.
경비대로 전출된 그가 맨 먼저 착수한 작업은 경비대원들에게 목봉술훈련이었다. 그의 생각은 간단했다. 패싸움에서 흉기를 사용했다는 빌미를 잡히지 않고 체구가 큰 상대방을 쉽게 제압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이 목봉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경비대원들에게 집중적으로 목봉술교육을 실시했다. 처음 이 훈련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경비대원들도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숙달되어 갔다.
'산동꼬마'의 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수십명의 중국군은 3월 2일, 얼어붙은 우수리 강을 건너 전바오 섬을 점령했고 산동꼬마의 정체에 대해 몰랐던 소련군은 전바오 섬으로 들어온 중국군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시비는 또다른 패싸움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번 경우엔 상황이 판이하게 전개됐다. 막상 패싸움이 시작되자 중국군 경비대원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군복 소매 사이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목봉이었다. 큰 체구와 주먹만을 믿고 중국군에게 달려든 소련군들은 이내 묵사발이 됐다. 그 광경을 지켜본 '절뚝발이 중위'가 가만 있을 까닭이 없었다. 분에 못 이긴 '절뚝발이 중위'는 바로 눈 앞에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중국군 경비대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주먹이 미처 상대방의 안면에 닿기 전에 코 부위에서 엄청난 아픔이 느껴졌다. 동시에 옆구리에도 똑같은 충격이 가해졌다. 그는 순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를 가격한 상대방은 바로 '산동꼬마'였다. 코가 부러져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상황에서도 '절뚝발이 중위'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산동꼬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허사였다. 어느새 상대방은 준비한 목봉과 민첩한 발길로 중위에게 집중타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불리한 중위는 순간적으로 권총을 꺼내들고 '산동꼬마'를 향해 발사했다. '산동꼬마'가 총에 맞고 쓰러지자 강을 사이에 두고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중국군은 소련군 국경초소를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박격포가 가세하면서 싸움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몇시간 뒤에 소련 증원군이 도착해 역시 중화기로 맞서기 시작하고 나서야 교전은 중단되었는데 산동꼬마는 7발이나 총을 맞고도 당시 치고 받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중국 측은, 장갑차를 비롯하여 4대의 차량에 나눠탄 소련군 70명이 선제공격을 해왔다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중국군의 기습으로 소련군 30명이 전사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상술했듯이 중국과 소련의 봉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소련군의 격투술은 복싱이었고, 중국군의 격투술은 봉술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몽둥이를 무기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련군은 무기로 생각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소련군도 몽둥이로 대응을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소련군 측은 몽둥이를 무기로 생각한 듯하다. 일부에서는 경찰에게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면 경찰은 화기로 제압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들어 소련군의 편을 들기도 하지만, 냉병기(그것도 둔기)와 화기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고, 몽둥이를 든 상대에 권총을 빼든 소련군은 딱히 중국군보다 더 정당했다고 보기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서 주먹싸움을 봉싸움으로 가져간 중국은 도발 수위를 높였지만, 여기에 화기로 대응한 소련군도 도발 수위를 한 수 높였다.
물론 일반적으로 봐도 몽둥이는 충분히 무기고 수련자의 손에 들린 봉은 갑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능히 죽일 수 있다. 한국 형법에서도 사람을 몽둥이로 팼느냐 주먹으로 팼느냐에 따라 형량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경찰에게 몽둥이를 들고 접근할 경우 경고 후 발포 대상이다. 여하튼 인식의 차이를 떠나서 이미 몽둥이에 당한 소련군도 역시 몽둥이를 나섰으나, 아무래도 숙련도가 떨어지는지라 여전히 밀렸다고 한다.
양측의 충돌이 일어난 후 반응이 격렬했던 곳은 소련이었다. 인민해방군이 소련을 침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련 지도부는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로 흥분했고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치코가 즉각 중국의 공업 중심지에 핵공격을 감행하여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강경파들도 핵기지를 상대로 한 정교한 핵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동의 소련군 장성들은 정말로 중국 측에서 비무장 민간인 수백만 명을 마구 국경에 밀어넣는 식으로 소련측 방비를 무력화하여 극동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브레즈네프는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고려했었다고 1973년 5월에 회고했으나, 결국 핵공격 대신에 다연장 로켓포를 동원한 포격을 허락하였다.
이후엔 신나는 포격전이 시작됨
당연히 60년대 가난뱅이 중국이 소련에 상대가 될리 없었고, 중국이 쳐맞고 끝났다.
글로 읽으니 또 새롭네여. ㅎㅎㅎ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잘잘못은 모르겠고,
최전방에 군사들이
저정도 전투력과 패기는 있어야되는거 아닌가??
우리군이
즉각적인 대응과 필승보다
갈수록 무사고와 안전 위주로 가는것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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