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민간인 학살, 이젠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로 삼을 때
100만 민간인 학살, 이젠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로 삼을 때
이무열 (책만드는 노동자)
한국 전쟁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불행히도 어디에서도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정부 기관의 공식 기록들을 보면, 국군,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을 포함한 전투원들이 모두 합쳐 이백수십만 죽었고, 민간인들은 수십만밖에 죽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누워 있던 소가 컹컹 짖어댈 소리다. 2차세계대전 이후 무차별 대량살상 무기의 만발로 민간인의 죽음이 전투원의 죽음을 훨씬 웃돌기 시작했다는 따위의 골치 아픈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수치는 곧 터무니없음이 드러난다. 주변의 어느 집안이라도 둘러보라. 전쟁중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을 잃지 않은 집안이 과연 몇이나 있는지... 몇몇 특수한 지역을 빼고는 한두 집 건너 하나 꼴로 전투 참여와 상관없이 전쟁중에 목숨을 잃었고, 온 가족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한 집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죽은 사유도 제각각이다. 피난길에 죽었다는 사람, 집 안에 있다가 죽었다는 사람, 갑자기 끌려간 뒤 소식이 없다는 사람, 시장에서 손을 놓친 뒤 행방불명되었다는 사람... 그러나 대부분은 정확한 사인을 모른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알아도 모른 척하거나 차라리 모르고 싶어한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르고 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아니 알아도 모른 척한다는 사실에 '아 우리 대한민국' 탄생의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나라가 왜 요 모양, 요 꼴로 굴러가고 있는지 설명해주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자, 강요된 망각의 세계를 되짚어 올라가 진실의 가닥을 찾아보자. 그리고 지난 반백년의 세월 동안 진실이 어떻게 왜곡돼왔으며 그것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 오늘날 이 문제가 왜 중요한 의제로 제기돼야 하는지 검토해보기로 하자.
아, 우리 대한민국은 백만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
전쟁중에 죽은 민간인의 총수는 공식 통계와는 달리 남북한 합쳐서 최소 300만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그 대다수는 직접 전투와 상관없이 수많은 민간인이 무차별로 학살당한 민간인 대학살, 즉 전쟁범죄의 희생자들이다. 남과 북을 비교해보면 적성 지역이라는 이유로 미군이 융단폭격을 퍼붓고 초토화 작전을 벌이다시피 한 북쪽 지역의 학살이 더 전형적인 유형을 보이지만, 여기서는 남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북쪽에 대한 접근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자유롭지 못하고, 우리 남쪽 진보 진영의 일차적인 과제는 역시 남한 사회의 진보에 있기 때문이다.
4.19 직후의 자료나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남한 지역에서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대략 백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유형별로 분류해 보면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학살이 30여 만, 형무소 수감자 학살이 4-5만, 유격대 토벌 과정에서 죽은 이들이 10여 만,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죽은 이들이 최소 10-20만, 미군 폭격의 희생자들이 10여 만, 북한 인민군에게 죽은 이들이 약 10만 등등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투와 상관없는 백만의 생명, 백만의 우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민족의 학살자'로 덧칠된 인민군에게 학살당한 수의 약 10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국군, 경찰, 민간 치안유지단)이나 그들이 우방국으로 떠받들던 미국의 군대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빨간 물'이 든 사람들이나 그들에게 협력한 사람들, 그들의 가족, 군사작전에 방해가 되는 주민들, 그리고 자신의 친일 전력을 알고 있어 자신의 입신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 모두 '건국'의 희생양으로 죽어갔다. 공산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순진한 농민들이든, 그건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백만 학살의 토대 위에 아 우리 대한민국이 세워졌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 미군정 치하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에 바빴던 사람들이 미국의 절대적인 비호하에 대한민국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민족 자주의 정신을 견지한 사람들, 민중들과 함께 평등 세상을 열어가려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대한민국의 토대는 그야말로 반석처럼 다져졌다. 이른바 '불순분자'는 완전히 소탕되고, 대한민국은 푸른 수의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정신병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파쇼 체제가 들어섰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
이제 세상이 조금 변해 공개적으로 떠들진 못하지만, 학살자들이 내심 질러대는 학살의 명분은 이랬다. 이 땅에서 그만큼 '청소'를 했으니까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 국가가 설 수 있었지, 그러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을 거라고. 학살은 무슨 학살?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걸림돌이 되는 쓰레기들을 골라내 청소한 것뿐이라고. (그러니, 대한민국의 품 안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한테 고마움과 경의를 표해야 할 거라고. 피를 보며 목숨 걸고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낸 우리에게 학살자의 멍에를 씌우려 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작태냐고.)
그랬다. 조금이라도 '빨간 물'이 든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은 '빨갱이' 인종으로 분류되어 '선량한' 인종과 분리되었다. 그리고 종족간의 유혈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빨갱이' 인종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아가 그들에게 우호적이거나 그들과 한패인 것 같은 사람들이 모두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는 '빨갱이'인 것 같은 사람이 한둘 섞여 있다는 정보가 있을 경우, 그들과 함께 있는 주민들, 그들과 함께 있던 피난민들 모두가 무차별로 살육당했다. 정보가 옳은 것이건 그른 것이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전투와 상관없이 그렇게 죽은 숫자가 남쪽 땅에서만 백만이고, 살아남은 가족들과 이웃들에겐 재갈이 물려졌다. 입이라도 뻥긋 하려는 순간, 그 사람 역시 '빨갱이' 인종으로 몰려 세상을 하직할 판이었다. 전국민 중 '빨갱이'로 몰릴 위험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얼마 안되었다. 학살의 총부리는 전국민의 대부분을 겨냥하고 있었다. 학살자들에겐 국민 대다수가 잠재적인 '적'이었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걸까? 그것은 해방공간의 정치역학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40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새 나라를 건설할 기회를 맞은 우리 민족은 무엇보다도 자주적이고 평등한 나라를 염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반도의 남쪽에 진군한 미군은 이 땅에 자주적이고 평등한 나라가 들어서기를 원치 않았다. 남한 민중과 미군정은 처음부터 심한 갈등을 빚었다. 미군정은 '불온한' 남한 민중을 통치하기 위해 친일 지주를 비롯한 친일파 무리와 이승만을 비롯한 배알 없는 사대주의 무리들을 하위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남한을 반공의 보루로 삼아 미국의 이익을 지킬 필요가 있었는데, 당시 남한 민중과 지식인들은 대체로 '불온한' 사상에 동조하는 세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1948년 사대주의자 이승만은 미국을 등에 업고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꾀했다. 깨어 있는 민중들과 민족 지도자들에게 남한만의 단정은 곧 분단 고착화로 가는 길이었고, 분단은 곧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쟁 위험과 그에 따른 학살을 내다본 남한 민중은 단정 반대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전국에서 항의의 목소리가 빗발치고 저 남녘 땅 제주에서는 4.3봉기가 일어났다. 미군정과 그 하수인들은 총칼로 민중들의 항의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해 여름 남쪽에는 결국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그에 맞서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남북 양쪽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남북 양쪽의 분단 정부는 불완전한 상태였다. 특히 남쪽에서는 4.3 진압에 투입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14연대가 항명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이 여순 민중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 걸쳐 빨치산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남한 지역은 이미 내전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고, 진압 작전이 펼쳐지면서 민간인 대학살이 본격화되었다. 6.25 이전부터 한반도는 사실상 전시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6.25는 한편으로 보면 국지적인 내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38선을 넘은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내려왔다.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과 그 후견인인 미국은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극심한 탄압에 전향한 '보도연맹원'들과 위험 인물로 지목되던 사람들 30만여 명을 소집, 검거하여 아무런 절차도 없이 집단처형하는 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그중에는 좌익 전력과 무관하게 얽혀 들어온 사람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전쟁의 확대가 대규모 학살 참극을 불러온 것이다.
6.25 이후 불과 한달여 사이에 낙동강 동남부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이 인공 치하에 들어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반공의 보루를 잃을 위기에 처한 미국은 재빨리 전쟁에 전면 개입했다. 참전 미군의 눈에 누리끼리한 피부를 가진 한국인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열등한 인종이었을 뿐이다. 피난민들, 전선 지역이나 적성 지역의 주민들, 작전에 걸림돌이 되는 주민들이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사격의 제물로 죽어갔다. 당시 미군의 작전 지휘를 받고 있던 한국군이나 계엄하에서 군의 지휘를 받고 있던 경찰, 군과 경찰에 기대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우익단체들의 만행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전선 지역에서, 제2전선 지역에서, '수복'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건국'의 제물로 바쳐졌다. 이들에게 '공비'니 '통비분자'니 '부역자'니 하는 갖가지 이름들이 붙여졌고, 일단 그런 딱지가 붙여진 사람은 무자비한 학살의 그물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전선이 북으로 이동하면서 이전부터 '적성' 지역이던 북쪽 지역에서는 더욱 무자비한 폭격과 초토화 작전이 펼쳐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죽어갔다. 전선이 몇 차례 오르내리면서 전선 부근과 제2전선 부근의 주민들은 학살 위험에 상시 노출돼 있었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제물로 바쳐졌다. 19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진 뒤까지도 한동안 이런 양상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쪽에서만 100만, 북쪽까지 합치면 200만 정도의 '국민'들이 전투와 무관하게 '건국'의 제물로 바쳐졌다. 대한민국이 서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당시의 이승만 정부나 미국이 우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이승만 정권과 동아시아에서의 패권 추구에 골몰하던 미국의 눈에는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잠재적인 적이었다. 그중 일부는 죽었고, 더 많은 사람들은 공포에 짓눌렸다. 그리고 그 위에 대한민국이 섰다.
국군은 공비로, 학살자는 애국자로
학살의 땅에 선 대한민국과 그 후견인인 미국, 그리고 학살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묻은 벌건 피를 하루 빨리 씻어내야만 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땅에서 권위를 얻고 지도자로 행세하자면 학살자라는 멍에를 벗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일차적으로 취한 방법은 학살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중에 죽은 민간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축소되었으며, 그조차도 전투나 학살과는 무관한 병사, 객사 따위로 처리되고, 다수는 그저 실종자나 행방불명자로 간주되었다. 이제 오갈 수 없는 장벽이 된 휴전선이 그런 은폐를 도와주었다. 어쩌면 북에 생존해 있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납북'된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들이 그런 모호한 통계를 뒷받침해주었다.
모든 피학살자들은 '악질 빨갱이'로 둔갑되었다. 자기네가 죽인 사람들을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 원수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행동이 합리화되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열 살박이 아이도 댕기머리 소녀도 모두 '악질 빨갱이'가 되었다. 모든 피학살자들은 죽어 마땅한 인종으로 둔갑했고, 그 '인간 송충이'들을 잡아 처치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었다.
학살자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비호하에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빨갱이 사냥'은 영웅적인 행위였고, 그 일을 서슴없이 행한 사람은 애국자였다.
심지어는 학살을 자행한 국군 부대를 공비로, 우익단체원들을 변장한 인민군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살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인민군이나 공비라는 터무니없는 등식이 모든 공식 기록에 버젓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은폐와 조작들에 용감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였다. 4.19 직후에 제기된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은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았다. 많은 유족과 사회운동가들이 투옥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었다.
남은 자취, 긴 자락
대학살의 그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는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만한'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 불감증과 민주주의 냉소증, 극심한 가족주의, 진보에 대한 회의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떼거리로 개처럼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거리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50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 속에서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 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만연한 생명경시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그리고 그 파쇼 체제하에서의 인권 경시, 폭력은 그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 치사,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기승을 부렸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통령이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금까지도, 그 뿌리는 깊게 남아 있다.
갈가리 찢겨진 유족들의 몸과 마음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양민학살 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본격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는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학살은 또다시 은폐되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은 유족들에겐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어도 싸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기에 이른 것이다.
그뒤 양민학살 문제가 침묵을 깨고 다시 제기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주의 공간이 조금 열리면서부터다. 거창과 제주 4.3을 중심으로 다시 뚜껑이 조금씩 열리고, 다른 곳에서도 잇따라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예전의 유족이 아니었다. '건국'의 제물이 된 피학살자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보다는 국가의 보살핌과 시혜를 촉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게 보통이었다. 그조차도 유족들 단독으로는 요구도 못하고 사회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야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2, 3년래에 거창 특별법과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이 제기되면서 유족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전국적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가 빗발치고, 학살 진상조사 작업이 체계적으로 시작되고, 국제여론의 지원을 끌어내며 미국의 책임을 묻는 움직임도 전개되었다.
그러나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학살 진상규명 운동의 주체로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움직이는 유족들조차도 자기 가족이 누구에게 죽었는가, 어떤 경로로 죽었는가, 명백한 증거물이 있는가 없는가, 언제부터 진상규명 운동을 했는가, 어떤 사회단체와 맥이 닿아 있는가 등등의 차이로 갈려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의 억압과 그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유족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것이다. 세월의 무게는 그만큼 컸다.
그에 반해서 가해자 집단을 비롯한 극우반공 체제의 수혜자들은 학살규명 운동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학살의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날, 자기들이 딛고 서 있던 땅, 자기들을 애국자로 떠받들어주던 토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저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뒤에는 침묵으로 저들을 뒷받침해주는 다수가 있다. 큰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 현 체제에서 먹고살 만하여 체제에 몸을 기대고 있는 이들, 지배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런 생각이 우리 사회의 공식 입장, 즉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다양한 고리를 가지고 있는 학살 문제
우리에게 분단과 전쟁, 그리고 대학살은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 사건이다. 한국 사회가 변화하면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많은 파장을 낳고 있지만, 이만큼 그 영향이 깊고 넓은 문제는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현 체제와 직결되는 문제라서 아주 민감한 반응들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학살 문제는 다양한 고리를 가지고 있어서 다차원적인 접근이 가능하고, 그 고리들을 이어가면 자연스럽게 문제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몇 가지 접근 고리들을 살펴보자.
우선, 해원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전쟁기의 학살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그것도 한두 다리 건너면 죽은 사람 하나 없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했다. 남쪽만 해도 백만의 원혼은 음으로 양으로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하다. 이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고서는 나라도 사회도 바로설 수 없다. 또 그 유족들의 한과 아픔을 함께 보듬어 안는 것은 더불어 사는 인간 세상의 기초다.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정확한 진상규명이다. 진상을 밝히는 과정은 곧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둘째, 인권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학살은 인권,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생명권을 유린한 가장 반인간적인 범죄 행위다. 전쟁중의 공권력에 의한 대학살은 나라와 사회의 존립 근거를 의심케 하는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다. 학살 문제는 모든 인권 문제 중에서도 으뜸 가는 사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고 무참하게 죽어간 마당에, 크고 작은 가지가지 인권 유린이 무슨 대수겠는가? 공권력에 의해서 가장 근본적인 인권인 생명권을 박탈당한 학살 문제를 밝히는 일은 만연한 생명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인권에 대한 방호벽을 굳게 치는 일이며, 나아가 학살을 가능케 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셋째, 민족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한국 전쟁과 대학살은 해방공간에서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는 내부 진통을 겪고 있던 중에 외세가 개입하면서 일어났다.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전쟁도 학살도 피해갈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더욱이 당시 작전권은 미국이 쥐고 있어 국군도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며, 당시 계엄하에서 경찰과 민간치안대(경찰 역할을 수행한 준 국가기관)는 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미군에 의한 직접 학살만이 아니라 한국 전쟁기의 모든 학살의 궁극적인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 분단이 완전 고착되고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은 이후 반세기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학살 문제는 민족의 자주와 통일 문제에 깊숙이 맞닿아 있다.
넷째, 계급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한국 전쟁은 각각 어떤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들의 대립 관계에서 비롯되었는가? 대학살의 과정에서 죽인 자는 누구이고, 죽은 자는 누구인가? 전쟁 후의 사회는 어떻게 귀착되었는가? 이후 수립된 극우반공 체제의 수혜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군가? 학살규명 운동에 나선 사람은 누구고 그것을 짓밟은 세력은 누군가? 지금은 또 어떤가? 이런 물음들을 추적해 보면 학살규명 운동이 어떻게 나라 바로세우기, 평등세상 만들기와 맞닿아 있는지 분명해진다.
다섯째, 역사 바로잡기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는 치를 떨면서, 또 일제의 만행, 코소보, 동티모르의 학살에는 분노하면서, 우리 역사의 짙은 그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왜곡된 역사, 사회 의식이 만연해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는 거품 물고 항의하면서 우리 역사의 왜곡에는 침묵하는 것도 꼴불견이다. 한국 전쟁기의 대학살과 관련해서도 머리에 뿔난 인민군과 공비, 간첩들의 만행만 이야기했지, 그 10배에 이르는 우리 국군과 경찰, 우익단체, 우리 '우방국' 군대인 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 왜곡해왔다. 가끔은 학살자를 뒤바꾸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전쟁 후에 자리잡은 극우반공 체제와 그 지도자들이 학살과 직접, 간접으로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 학살규명 운동은 왜곡된 역사 바로잡기 운동의 일환이고, 그것은 나라와 사회를 다시 세우는 일로 직결된다.
또, 공동체 차원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내 손에 난 생채기 하나, 내가 당한 작은 불이익에 대해서는 핏대를 올리면서도 타인들의 아픔과 피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가족주의와 패거리주의도 수위를 넘어섰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도 심하다. 이런 현상들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상당 부분이 전쟁중의 대학살과 맞닿아 있다. 학살규명 운동은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 만들기 운동의 한 과정이다.
이제 진보진영이 힘을 합쳐 100만 민간인 학살 규명 운동에 나서야 할 때
대학살 이후 반세기, 그 세월은 너무 길었다. 우리는 우리 일에만 파묻혀 학살 문제를 운동의 외곽에 놓인 한 주변적인 이슈 정도로 밀쳐 놓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유족들과 목격자들, 사건의 실체를 밝혀줄 가해자측 증언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떴다. 그리고 학살의 그늘은 유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짙게 드리워졌다.
말이 백만이지, 당시 남쪽 인구 2천만에 100만, 남북 다 합쳐서 3천만에 200만이면 사실상 우리 민족 전부가 유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나서지 않는 유족들이 바보라고 욕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 동안 혹독한 고통을 겪고 대부분 이제 연로하여 살 날조차 얼마 남겨두지 않은 유족 1세들에게 학살규명 운동의 책임을 떠맡기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짓이다. 더욱이 매일매일의 활동이 분단과 전쟁, 학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진보진영에 학살규명은 유족 여부와 상관없이 일차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앞에서 여섯 가지 접근 고리를 살펴보았지만, 그 궁극적인 귀착점은 결국 앞으로 나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이 땅을 어떤 나라, 어떤 사회, 어떤 세상으로 만들어갈 거냐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반세기 전과 똑같은 고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반세기 전의 자주적이고 민중적이며 진보적인 나라 세우기 작업은 결국 외세 개입 전쟁을 통해 좌절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다수의 민간인이 학살당하면서 이 땅의 진보 세력은 사실상 씨가 말라버렸다. 전쟁 전에도 중에도 후에도 이 땅의 지배세력들은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 분위기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극우반공 체제를 강화해왔다. 학살과 개죽음의 위험은 국민 대다수가 빠져 나가기 힘든 올가미였다. 그리고 그 위에서 대한민국의 토대가 다져졌고, 그 귀결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요 모양 요 꼴의 세상이다.
따라서 학살규명 운동은 그 자체로서 지배구조의 뿌리를 뒤흔드는 작업이 된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이 이루어지는 순간, 학살자와 그 추종자들, 이 땅을 지배해온 세력들이 설 땅은 좁아진다. '누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하는 왜곡된 자부심은 발붙일 곳이 없어지고, 저들의 편가르기가 시작될 것이다. 그 자체로서 민족적이고 계급적인 사안임을 알면서도 섣불리 제동을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묻어두기' 전략으로 일관하며 진상규명을 한사코 막아온 것이다.
더욱이 학살규명 운동은 다차원의 접근이 가능한 사안이므로, 다수의 동의와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 이념적인 접근을 할 경우 처음부터 다수의 반대에 부딪힐 염려가 있으므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유족들의 해원 사업, 인간의 생명권을 중심에 두는 인권 사업을 통해 우회해 들어갈 수도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자주와 평등의 고귀한 이념이 깔려 있다.
이제 50년 묵은 한은 씻겨져야 한다. 묻혀진 진실은 모두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나야 한다.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강요된 합의는 백지화되고 죽은 이들의 명예는 회복돼야 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는 없다는 것,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고귀하다는 것을 거듭거듭 확인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의 틀을 다시 세우고 나라를 거듭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 행위가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한다.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대립이 점점 더 첨예해져가는 이 시기, 언제 또다시 피를 부르는 대립과 전쟁이 이 땅을 강습할지 모르는 이 시기, 지금 이 순간에도 유족들과 목격자들, 관계자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는 이 시기, 남북 관계의 진전으로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어가는 이 시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의 횡포로 반미 감정이 보편화되고 전쟁 위험이 높아가는 이 시기에 이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의 절박한 과제다.
학살규명 문제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동과 서, 남과 북이 따로 없는 문제다. NL과 PD, 유족과 비유족,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 수 없는 문제다. 폭넓은 시민사회운동과 종교계가 함께 어깨를 결을 수 있는 문제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는 문제다. 또 남북 화해 이전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풀려야 하고 또 풀릴 수 있는 문제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이어지고 노근리 학살 보도 이후 유족들과 지역 단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이 시기, 진보진영의 모든 단체들은 학살 문제를 핵심 의제의 하나로 삼아 학살규명 운동을 힘차게 펼쳐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 된다.
민간인학살규명 전국통합입법에 힘을 모아야
학살규명 운동의 첫걸음은 우선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말하기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물론 증언 채록 등의 실태조사와 학살자료 발굴 등 지역에 따라 성과가 축적되고 있는 곳도 있지만, 100만 민간인 학살의 규모에 비하면 지금까지 드러난 부분은 1/10도 안 된다. 아직까지도 물 밑에서 잠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알고 있는 그대로 말하기 운동은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유족들과 그 이웃들, 관계자들을 원초적으로 짓누르고 있던 바윗돌을 들어내는 작업이다. 바윗돌이 들어올려져 틈새가 벌어지는 순간,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렇다. 이제 반세기 동안 학살자들을 도와온 은폐와 침묵을 깨고 모두 나서서 말해야 한다. 산 자, 죽은 자 가릴 것 없이 모두 나서서 말해야 한다. '이제 와서 들춰내서 뭐하느냐, 조사해서 뭐하느냐'는 덮어두기 전략에 맞서 강력한 안티를 제기해야 한다.
'진실 털어놓기' 운동은 만인이 참여하는 운동이다. 먼저 유족들부터 자식들한테까지 함구해오던 응어리진 말들을 모두 털어놓는다. 그 이웃들도 짓누르던 공포를 떨쳐버리고 본 그대로 말한다. 가해자나 목격자들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가슴 속에 숨겨온 사실들을 털어놓는다. 지역의 신문이나 매체들은 그것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린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조사 작업을 도우며 여론을 일으켜 유족들과 증언자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이 기대되는 사람들이 영향력 있는 지식인, 학자, 문인, 예술가, 종교인 등 양심세력들이다. 그들이 여론을 선도하여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고 나아가 빨간 물 들이기 기도에 방벽을 쳐준다면 천군만마의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유족들과 소수 관심있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만으로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기는 참으로 어렵다. 일부 증언이 나온다 해도 그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진실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그러다간 밥빌어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국지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실태조사 작업 역시 재원과 사람의 부족, 관계기관의 비협조로 빠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민간 차원의 진상규명은 여러 가지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이제 학살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오히려 인권과 민주주의를 중시한다고 말하는 정부에 국민의 국가로서의 의무이행을 촉구하는 것이 중요한 한 방법으로 대두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50년 전의 학살 전모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그 특별법에 따라 국가 차원의 조사위원회(진상규명명예회복위원회)를 두어 학살 실태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는 이미 특별법이 통과된 거창과 제주 4.3 외에도 - 참고로, 집단 위령사업만을 규정한 거창 특별법의 경우 유족들이 대규모 위령사업에 매몰되어 집단이기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고, 진상조사 후 명예회복 사업을 규정한 4.3특별법의 경우 조사위원회 구성방법의 문제점과 불충분한 조사권으로 말미암아 학살실태 전모 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다 - 10곳 가까운 진상규명 명예회복 특별법 입법 청원 또는 입법 발의안이 제출되어 있다. 그러던 중 올 6월에 개별 입법 청원 또는 입법 발의를 한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 통합입법을 추진키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작년부터 전국적인 학살실태 조사와 전국 통합입법을 추진해온 학살규명 운동 단체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규명 범국민위'와 '민변'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안'이 마련되어 국회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이 통합입법안에서는 4.3특별법이나 의문사 특별법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조사권을 대폭 강화해두고 있다.)
그와 함께 올 하반기에는, 지금까지 미군학살만행 폭로와 미국의 사죄배상 요구에 초점을 두어 활동해왔고 올 6월에는 미국을 민간 국제전범법정에 세워 유죄평결을 끌어낸 바 있는 '미군학살만행 전민족조사특위'와 앞서 말한 '민간인학살규명 범국민위'가 힘을 합치고 거기에다 전국의 유족들과 진보적인 인권시민사회단체, 종단까지 포함시켜 '민간인학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전국공대위'를 꾸리기로 했다. 전쟁 이후 최대의 학살규명 운동조직이 될 '민간인학살 공대위'는 전국통합특별법 쟁취를 일차적인 과제로 삼아 활발하게 활동을 펼쳐 나갈 예정이다.
전국통합특별법 제정은 그 자체로서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본격적인 학살 진상규명 작업의 발판을 마련키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학살의 한 주체였던 정부를 계승한 현 정부의 국회에서 입법을 추진한다는 게 역설이긴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학살한 주체였던 국가에 '진정한 국민의 국가'로 거듭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국통합입법 운동과 진상규명 작업의 성패는 미래의 우리 사회가 어떤 세상이 될지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의 하나가 될 것이다. 백만의 원혼이 구천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