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인것 같아
올려드립니다
[1] 서론 : 맥아더 談論의 의의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역사는 유례없는 하나의 큰 조류를 따라야 했다. 그것은 유라시
아의 극동에 접근하는 서방 세력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다분히 일방적인 흐름이었고 여기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에 따라 차후 수십 년의 국가 성쇠가 판가름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는 일정한 시련이 있어야 했다. 정도에 있어, 또 시기상으로 차이를 두
고 있지만 어느 나라나 일정한 기간동안 외침을 받아야 했고, 또 타국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근, 현대사를 비교하면 45년 이후 약 십여 년간 미국이라는 서방 강
대국의 직접적인 세력 하에 있었던 점에서 일치한다. 당시는 두 나라에게 모두 중요한 역사
적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
근대화의 조류에 올바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조선 왕조의 국운이 쇠락해 가던 19세기 후
반부터 우리 나라의 운명은 강대국간의 세력 다툼의 장으로 던져진다. 그러면서 수십 년간
의 일본 점령을 받아야 했고, 우리에게 있어 1945년 직후의 시기는 모처럼 다시 국체를 회
복하는 시기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일본에게 있어 이 시기는 외세의 점령 하에
놓이면서 최초의 국체 위기 상황을 겪어야 했던 때이고 주도 세력으로서의 군부 파시즘이
쫓겨 나가며 새로운 변혁을 필요로 했던 때이다.
이러한 시점에 두 나라의 역사적 주체, 주역으로서 우리는 더글라스 맥아더를 발견할 수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란 인물은 곧 두 나라의 근, 현대사를 얘기하는데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학계에는 한국 현대사를 이야기하는 각종 談論들이 많지만 기이하게도 맥 아더는 쏙 빠져있
다. 맥아더를 끌어들이면 우리 현대사는 어떻게 바뀔까. 조금의 과장을 섞는다면 대한민국은 미국이
만든 나라라기 보다는 맥아더의 지원을 받은 李承晩이 만든 나라라는 가설이 성립한다." -조선일보-
"日本 占領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맥아더라는 인물이 점령사령관이 아니었더라면 일본의 점령
과 민주 개혁의 성격이 달라졌으리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어떠한 사관에 바탕을 두든간에 역
사에 있어서 개인 특히 역사적 개인의 역할의 중요성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이 미국에 의해 단독으로 점령당했다는 사실과 그 점령 사령관이 맥아더라고 하는 開明
專制君主的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전후 일본의 占領改革의 의미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 [맥아더의 일본 점령과 천황제] -최상룡- )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국사가 아닌 세계사 속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맥아더를 제외한 체
현대사 담론을 계속 하고자 하는 태도는 (고루한 민족주의적 사명에 의한 것일지는 몰라도)
편협한 시각으로 현대사를 바라보고자 하는 분명한 문제점을 노출한다. 필자는 그러한 문제
점을 지적하면서 맥아더의 역사적 의미를 한국과 일본의 현대사 속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
다.
[2] 본론 -1 : 現 맥아더 담론의 문제점
① 역사의 주체로서 배제하는 태도
일반 역사 담론 속에서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에서 용맹했던 미국 장교로서
그친다. 한국 전쟁이 또한 우리의 역사임에도 우리는 미국의 참전과 그로 인한 서울 수복
등을 얘기 할 뿐 좀처럼 그 속의 맥아더 개인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
정과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도 미국의 행정부가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강한 외세로서 평
가될 뿐 맥아더 개인을 주체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맥아더는 미국 행정부와는 독립성을 보였다. UN 연합군이라는 간판을 내걸
었음에도 그 속에서는 미국의 강한 주도권이 독주하였고 또한 맥아더 개인의 주도권이 미
행정부와 다분히 독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군사적 전문성이 결여된 현지의 정치인들이 전지
에 파견된 군 사령관에게 전장의 지도권을 일임하여왔던 미국의 정치 풍토로서도 설명되지
만 그것 보단 맥아더 개인의 군사적 (또한 다분히 정치적) 입지, 지위로서도 이해가 된다.
한국전 발발당시 연합군의 파견부터 서울 수복 후 3.8선 이북 전진 결정에 있어서 맥아더의
주장은 곧 군부 전체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었을 만큼 군부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
이었다. 전쟁 발발직후 군사 개입에 반대했던 미군부가 北進論(3.8선 이북을 점령하여 한반
도 통일을 이루려는 주장)을 반대하는 C.I.A.에 강하게 반발하였던 것은 곧 맥아더의 영향력
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과 전란 당시에 미군부가 한반도에 취했던 정책의 한국 현
대사적 의미, 평가는 곧 맥아더 개인에 대한 그것만으로서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를 얘기하면서 그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데에는 고루한 민족
주의적 편견에 손발을 묶어둔 비과학적인 태도의 개입이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② 군인 맥아더에 대한 집착
맥아더 개인에 대한 평가가 경시되는 배경에는 그가 기본적으로 정치가가 아닌 군인이라
는 데서 시작되는 편견이 크게 작용한다. 더욱이 입헌 정치의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 군부의
역할이란 민의에 충실한 작전 수행이고 곧, 행정부의 지시 특히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
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이 맥아더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 있다. 특히 우리 나라 일반
인들이 갖는 보편적 인식 속에는 맥아더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전쟁 영웅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하지만 한, 일 역사에서 그의 역할이 군 지휘자로서 그쳤던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발
발하기 전 이승만 정권의 반공, 외교 정책의 가장 든든한 정치적 조력자로서 그는 한국 정
치에 관여하였고, 무엇보다 일본 점령군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그는 패전후의 일본을 재건하
는데 일등 공신으로서 각종 정책을 입안하는데 있어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는 후에 더 자세히 상술하겠다.
③ 잘못된 평가 , 편견.
맥아더 개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그의 가까운 측근들 사이에서도 합의점을 찾기 힘
들다. 그가 누구보다 용감했던 군인이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인
간적인 면, 성격 등에 대하
여는 예찬에 가까운 극찬이 있는가 하면 혐오에 가까운 비난도
있다.
"그는 가장 훌륭한 인간인 동시에 가장 형편없는 인간이다. ... 그는 군복입은 이들 중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또 가장 우리를 화나게 만든다..그는 오만하고 계시적이며 자기 실수를 인정 않고 교활하게
덮는다." , "그는 워싱턴, 링컨, 때론 나폴레옹에 비견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그는 씨저같은 인물이다.
대담하고 냉정하며 침착하면서도 자신만만한데다 노예근성 가득한 보좌관들에 둘러 쌓여 있다는 점도
같다. 또한 놀랄정도로 당당하며, 두려움을 모르고 자비로운 전제 군주였다는 점에 있어서도 일치한
다..".. ([미국의 씨저 맥아더 元帥] 中 -William Manchester-)
"맥아더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는 사람이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그를 존
경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누구도 그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하다." (-George C. Kenney-)
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과시했던 Jonathan M. Wainwright ( 맥아더의 명령으로
필리핀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포로가 되어 4년간의 지옥 같았던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던 군
인 . 구출된 후에는 여전히 "나는 어디서를 막론하고 무조건 그(맥아더)의 명령에 따랐을 것
이다."라 하였고 그후 그는 맥아더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데에 여생을 바친다.) 같은 인물
이 있는가 하면 그를 해임시켰던 트루만은 그가 바탄에서 순국할 수 있는 영광이라도 주어
야 했다며 비난하였다.
그에겐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 또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자기 주장이 워낙 강
하여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51년 대통령 트루만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해임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그의 해임에 대한 미 국민의 반대 여론이 거
세어 트루만의 정치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맥아더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는 대단하
였다. 하지만 트루만은 맥아더 해임 후 여론을 움직이기 위한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결단을 옹호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현재 맥아더의 개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강조되는 부분에 있어서 이러한 트루만의 언론 플레이가 기여한 바 크다고 본다.
역사가 늘 승자에 의하여 왜곡되어 왔듯, 맥아더의 평가에 있어서도 그의 독단, 고집이
당시의 집권층에 의하여 필요이상 과장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그의 정치
적, 군사적 성과물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써 보다 객관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3] 본론-2 : Mac Arthur 人間史
맥아더는 역시 전쟁 영웅이었던 아더 맥아더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군인을 동경
하였고,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인간상을 항상 꿈꾸며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남북 전쟁 서부
터 참전하여 미서 전쟁에까지 전공을 세우며 최고 훈장인 의회 명예까지 받는다. 미 서 전
쟁 승리 후 필리핀에 상륙한 미 3개 여단 중 하나를 지휘했던 아더 맥아더는 그때부터 아시
아와 특별한 인연을 맺기 시작하고 그것이 2대에 걸쳐 더글라스 맥아더에 까지 이른다. 특
히 일로전쟁으로 일본에 파견될 당시 더글라스와 동행하여 동남아시아, 인도 등지로의 여행
을 함께 하게 되는데 당시의 경험이 더글라스 맥아더에겐 아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몸소 체
험하게 하는 좋은 기회를 부여한다.
① in Korea : 맥아더는 동아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남다른 가치관을 부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공 정책에도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6.25 전쟁 중 그가 보여 주었던 열의, 적극
성은 이를 증명한다.
맥아더는 동아시아의 반공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구소련과 동독 문제에
만 민감했던 미 행정부와는 입장을 달리하며 동아시아의 반공 전선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여
야 한다는 것을 항상 촉구하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전략적 중요성을 정치인들이 간과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하곤 하였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맥아더는 이승만과 의견을 같이 하였다. 동북아 전세를 읽는 전략적
사고와 철저한 반공 의식은 종전 직후 대한민국 정부의 한-미 대표 세력이 안정된 협조 체
제를 이룰 수 있게끔 하였다. 맥아더는 美 정치가들 사이의 반 이승만 세력을 견제해 가면
서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안정되게 정착 시켜 나갈 수 있게끔 지
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둘은 자신들의 구상대로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나간다. 이
것은 당시 美 군정이 구상하였던 것과는 기본 방향에 있어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조금의 과장을 섞는다면 대한민국은 미국이 만든 나라라기보다는 맥아더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이 만든 나라라는 가설이 성립한다. 맥아더도 미국인 아니냐는 반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
을 너무 단순화시켜 보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미국의 국무부와 국방부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미
국이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을 통해 만들려던 나라와 맥아더-이승만이 합작해서 만든 현재의 대한민
국은 분명 성격이 다르다. 둘 다 미국의 영향하에 놓였겠지만 [상대적 독립성]이라는 문제를 놓고 본
다면 맥아더 -이승만의 선택에 점수를 좀 더 줄 수밖에 없다. 즉, 하지가 구상했던 좌우 합작 정부야
말로 굳이 말한다면 [미국이 세운 나라] 한국이 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조선일보-
그는 한국전쟁 시기에 전쟁 발발 나흘만에 전선을 방문하고는 유엔군 파견을 망설이던
트루만 행정부를 자극한다. 당시 미국은 대만과 한국을 자국의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애
치슨 라인을 발표한 뒤였고,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또한 소련과 중국 (특히
소련)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에서 한국전 개입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맥
아더는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항시 역설하던(애치슨 라인 발표 후 이를 번
복시키려는 움직임도 실제 있었다.) 터에 한반도 적화 위기에 대하여는 누구보다 초조해 했
던 인물이다. 결국 트루만 행정부의 지상군 파견 결정이 있은 후 (소련의 不介入에 대한 확
신을 얻은 상황에서)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고 서울 수복에 그
치지 않아 한반도의 통일로서 이루어 낼 수 있는 완전 승리를 주장하였다.
중국과의 접경 지역에까지 공산군을 몰아 내는데 성공한 맥아더의 군대는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고 그때부터 트루만 행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된다. 미
행정부의 휴전 정책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품고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과 한반도 파견군 증
원 등을 주장하던 그는 결국 트루만에 의해 51년 해임되고 만다.
② in Japan : 맥아더 개인사를 살펴보아 최우선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들이란 주로 "일본
의 민주국가로의 재건"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패전 후 패전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와 재건을 위해서 맥아더는 Supreme
Commander of Allied Power로서 일본에 파견된다. 당시 일본 점령은
포츠담 선언의 연합
국 공동 점령 원칙이 무시된 체 미군의 단독 점령 형태로 실행되었고(만약 연합국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한 경우 미국의 정책에 따르도록 명문화되어 있기도 하다.) 미 점령군
또한 트루만 행정부의 지시 , 명령이 상당 부분 배제 된 체 맥아더 개인에게 실질적 전권
위임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美 行政府는 포츠담 선언이 條約과 類似한 拘束力을 갖지 못한 일종의 guide line이라고 해석함으
로써, 일본측의 발언 여지를 봉함과 동시에, 나아가 일본의 운명은 장래에 있어서의 미국의 극동정책
의 방향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나 이 지령이 맥아더의 대일 점령 정책 수행에 관한 대폭적인 권한을 보증함과 동시에 연합
국의 공동점령이라 하면서고 실질적으로는 단독점령과 같은 미국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다는데서 대
내적으로는 최고사령부와 워싱턴, 대내적으로는 미국과 타연합국 간에 마찰과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
다... (연합국의 일본점령과 점령체제)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일점령 기조는 '비군사화' 및 '혁명저지'의 조건이 붙은 '민주
화'정책이었고,(최상룡 '맥아더의 일본 점령과 천황제') 곧 맥아더의 통치 기조이기도 하였
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다음 표와 같은 지령을 당시 요시다(吉田) 내각에 내린다.
<表1> [맥아더 民主改革의 內容](非軍事化, 民主化 指令)
..."우리 일본인은"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전문에는 "주권이 인민의 의지에 있다고 하는 것을 선언
"하고 있었으며, 제1조에서도 천황의 지위는 "인민의 주권적 의지에서 유래"한다고 명시하고 있었
다....[總司令部案]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권조항이다. 인권조항은 총 92개조 중 31개조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 (연합국의 일본점령과 점령체제)
③ 對 투루만 : 맥아더의 일생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이슈는 총사령관 재직당시 그의
유일한 상사였던 트루만 대통령과의 갈등관계에 대한 것이다.
맥아더가 군부 내에서 워낙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트루만이 그에 대해 가
지고 있던 개인적인 신뢰감 또한 다분하여 태평양 전쟁이나 일본 점령 시기 그는 작전 수행
지에서 어떠한 간섭, 지시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전 참전 당시 소련, 중공이 받게될 자
극에 민감하였던 트루만은 맥아더의 군사 작전 수행에 있어 많은 제재를 가하였고 그로부터
심화되어 가던 갈등은 곧 맥아더의 해임에까지 이르게 된다. 해임 당시 미국의 여론은 트루
만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공격을 가했지만 점차 맥아더의 월권행위를 지적하는 목소
리가 커지면서 다양한 논쟁거리를 제시하고 있다.
투루만과 맥아더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 시기는 분명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 시기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공군에 의해 미국의 극심한 전략적 열세에 부딪혔을 당시로 보
아야 할 것이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 이후 북진 여부가 논쟁 대상이 될 때 맥아더는 중공
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이 거센 공격을 받고 유엔군이 위기에 처하자 트루만의 맥아더에 대한 신뢰가 손상을 입게
된 것이다.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밀려난 체 전세가 악화되자 각각의 연합국 정부에서는 유엔군
의 질서있는 철수를 논의하기에 이른다. 맥아더는 대만군 사용에 대한 교섭권과 일본 내 방
위 사단의 증원 파병 등을 미행정 당
국에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한다. 오히려 미 국방성,
국무성은 합의를 통해 맥아더에게 한반도 내 안정선을 확보한 체 한반도 내 군대를 철수 시
키는 전략을 지시한다.
맥아더는 자신의 군사 지휘권에 심한 제약을 가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목
표를 중공군에 대한 반응으로 좌우하려는 듯 하는 트루만 행정부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
게되고 미 행정부 뿐 아니라 영국 등 다른 열강은 미 행정 당국의 통제에 순응하지 않은 체
한반도 내 긴장을 가중시키는 맥아더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51년 3월 미행정부는 트루만 대통령이 전쟁 종식을 위한 조건에 관하여 적과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맥아더에게 통보한다. 이에 맥아더는 미행정부의 정책에 순응하는 듯 하였으
나 곧 중국을 상대로 그들의 능력을 비하하면서 중공 본토 내 폭격에 대한 협박조의 성명을
발표하고 만다.
"....중공은 이제 UN이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려는 인내력을 포기하고 우리의 군사 작전을 중공
의 해안지역과 내륙 기지들에 확대하려는 결정은 중공으로 하여금 임박한 군사적 붕괴의 위협을 면치
못하게 할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이에 따라 대중국 협상 가능성을 사라지고 트루만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곧이어 공화당 지도자인 마틴의원이 맥아더에게서 온 개인서한을 공개함으로써 트루만은 그
의 해임을 결정한다.
맥아더 해임 직후 상당 기간 여론은 트루만에게 불리한 반응을 보인다. 미 전역에서 트
루만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거세어 졌고 반면 맥아더의 귀국을 맞이하는 환영 인파는 실로
대단하였다. 트루만은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언론 플레이를 시작한다. 맥아더의 해임 사
유를 홍보하고 나서며 맥아더의 영웅적 면모를 퇴색시키고자 했다.
[4] 본론 -3 맥아더 재론.
① 군인 맥아더 : 아무래도 맥아더는 전장에서 그의 영웅적 면모를 가장 과시할 수 있었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심을 자극 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자의 면모로서, 누구보다 철
저한 분석력을 가졌다는 데서, 또한 끊임없이 회자되는 용맹함에 있어 훌륭한 군인으로 평
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면모들이 때론 그를 폄하하는데 이용되었다. 그의 지휘자적
카리스마는 독불장군 식의 독단과 과시욕, 명예욕으로서, 용맹함은 무모함으로서 비난을 받
아 온 바 있다.
군인으로서의 맥아더는 현대사 담론에서 그를 많이 배제시켜 왔던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지휘한 인천 상륙 작전은 한반도를 점령 위기에서 구원하였던 업적
이고 우리로서도 그 가치, 평가를 축소하여선 안 된다.
..맥아더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미 합참은 인천
지역은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크고 항구에 이르는 수로가 협소하기 때문에 군산지역을 선택
할 것을 권고했다.
합참과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확률을 5000분의 1로 보았다. 그러나 맥아
더는 이 상륙작전의 성공이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에서 오히려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합참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면 적도 역시 미국이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물론이고 마트베에프(A.I.Matveev)라는 장군을 군사연락관으로 파견하여 한국전쟁의
작전상황을 일일이 보고 받고 필요한 작전지시를 내리고 있던 스탈린조차도 인천상륙작전을 전혀 예
측하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미국은 38선 돌파를 결정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
로운 국면을 맞게되었다.-한국일보-
그러나 상술하였듯, 전장에서의 맥아더가 항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그의
용맹함, 군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은 누구나 다 인정하지만 다른 이의 의견을 좀체 수용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 식의 지휘는 많은 비난을 받는다. 또한 그는 전장에서 자신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으며 무모하게 뛰어 들었다 하는데, 혹자는 이를 명예욕에 가득 찬 행위였다
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들이 일부의 왜곡, 과장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져버리지 못한다. 더욱이
그것으로 인하여 전장에서의 그의 업적마저 평가 절하 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를 재고하
여 보고자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일본 천황의 항복 통고가 있은 후 항복 조항 실행의 임무를 띈 맥아더는 우선 아쓰기(厚
木) 비행장을 찾는다. 아쓰기 비행장은 카미카제 특공대의 비행사 훈련기지로 당시까지만
해도 특공대 대원들이 그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터였다. 이 결사대원들은 거의가 항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혼란 속으로 연합군 총 사령관으로서의 맥
아더가 찾아가는 것에 대하여는 맥아더의 참모들 뿐 아니라 일본측도 반대하고 나섰다. 더
욱이 그는 무장을 해제하고서 착륙할 것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또한 맥아더의 무모한 일면을 증명하는 사례로서 인용된다. 하지만 맥아더는 나름대
로의 확신을 가졌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성공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 거리에서라면 곡사포가 빗나갈 리가 없다. 탐욕스러운 전쟁터의 괴물인 죽음은 수많은 전쟁
터에서 맥아더를 못 본 체 놓아주고는 결국 끝에 가서 그를 죽여 버리려는 것인가? 나는 숨을 죽였다.
온 세상도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맥아더가 옳았다. 동양을 잘 알고
일본인의 기본적인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가 죽음을 상대로 그런 서투른 도박을 할 리는
없었다. 그는 일본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무사도>라는 전통적인 기사도 정신을 알고 또 믿고 있었
다..." -맥아더의 군사 비서관이었던 휘트니 장군의 당시 회상 中-
천황이 방송을 통해 항복 선언을 하고 나서도 미-일 양국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미
국은 잔류 세력의 최후 저항(전시에 그들은 죽기를 각오한 일본군을 많이 보아왔던 터였다.)
에 고심하였고 일본으로서는 미군의 점령이 무질서하고 , 가혹할 수 있단 걱정에 휩싸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맥아더의 이러한 행동이 가져온 영향력이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맥아더가 단신으로 아쓰기 비행장을 찾은 것이 일본인에게는 우호적인 점령에 대한 강한
믿음을 주었을 것이며 또한 이것이 천황의 항복을 따르는 일본군의 '무사도'를 증명할 수 있
었기에 주둔하는 미군들은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의 일본 점령 , 통치가 그토록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의 확신, 결단에서 시작 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독
단에 가득 찬 지휘와 무모한 용맹함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의 그러한 일면들조차 높은 평
가를 받아야 옳다. 따지고 보면 인천 상륙 작전 또한 그의 고집으로 이루어낸 성과인 것이
다.
② 맥아더의 정치 (일본 통치 성공 요인) : 우리가 그에 대하여 많이 간과하고 있는 점들
은 주로 전장을 벗어났을 때의 그에 대한 평가이다. 특히 일본 점령군 총 사령관으로서 그
는 일본의 민주주의 국가로의 재건 임무를 수행하면서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성공 요인을 들자면 당시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에 대한 확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주도면밀한 정책 시행일 것이고 여기에 덧붙여 '국체유지'라는 하나의 통치 기조의 역할
이 컸을 것으로 본다. 당시의 일본 정치 형
태를 보면 12세기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봉건
체제의 그것과 명치유신 이후의 메이지 정부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전후 일본에 대한 점령 형태의 특징이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실질적으로
미국에 의한 단독 점령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황을 포함한 일본 정부 기구를 통하
여 그 권력을 행사하는 간접 통치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접 통치의 시스템이란 것은 일본을 그 대상으로 함에 있어 뛰어난 효과를 발휘
하였다. 즉,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국체유지'라는 더 없는 (패전국의 입장으로서는 황송하기
이를데 없는) 선물을 가져다주면서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미국은 일본 정부의 적극적 협조
와 일본 국민의 지지라는 점령군으로서는 유례없는 대접을 받은 것이다.
미국의 대일 정책이 당시 일본 정부를 많이 곤란케 했던 것은 사실이다. 맥아더가 특히
적극적이고 신속하였던 전범 처리의 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령
이 많았고 미국인 비전문가에 의해 초안된 헌법 개정안 또한 그랬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
서 이를 거스를 수 없었고 더욱이 이에 대한 천황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다.
"나는 가장 철저한 개정을, 천황 자신의 모든 정치적 권위를 완전히 박탈하는 정도까지도 전적으
로 지지한다." -총사령부의 헌법 개정안을 놓고 갈등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천황의 충고-
이외에도 많은 정책에 대한 일본 정부의 협조 체제는 공고하였다. 특히 美 점령군 下 일
본 수상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맥아더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 총 사령관으로서의 5년여 동안 그의 정책 기조였던 일본의 비
무장화, 자유 민주주의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총사령부의 정책 입안과 실행은 미 행정부의 그것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천
황제 존속의 논의에 있어 美 여론 뿐 아니라 다른 연합국에서도 반대 의견이 속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무성 정책기획실장 케난에 의해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던 일본 재군비에 대하
여 서도 맥아더는 절대 불가 입장을 밝혀 마찰을 빚었다. 당시 일본 재군비론의 입장은 주
로 공산주의의 침투를 저지하는 일본 내부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맥
아더는 자유, 민주주의를 접한 일본 국민들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반대
를 표명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고 있다. 한번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맛본 사람들은 결코 기꺼이 구속상태로 돌아가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에게는 불행한 전체
주의의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결코 기꺼이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
을 것이다." -케난이 밝힌 당시 맥아더의 입장-
이처럼 맥아더는 일본 통치에서 자신의 결단, 정책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일본의 정치, 역사, 문화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력, 분석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황
이란 상징적 존재를 유지하여 둔 체 실권자가 뒤에서 그를 조종하는 이러한 정치 형태는 일
본의 중, 근대사에 비추어 유사한 형태의 것이었다. 그로부터 맥아더는 일본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미 대선 후보로 맥아더를 내세우고자 하는 지지운동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
서 있었다 한다.) 의도한 바의 효과들을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것 또한 맥아더에게는 중요한 임무였다. 특히 맥아더 자신이
분명한 반공 주의자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반란, 정치적 행동 등은 항시 주의 대상이 되
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하여 맥아더는 사전에 훌륭한 방어 조치를 취해두었다. 바로 일본의
'정체유지'가 그러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일본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공산주의라는
것이 제대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특히 천황이란 존재가 상징적이지만 나름대로의 절대
성을 공고히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적 전제 자체가 거부당하기 쉽상이었다.
맥아더가 천황제를 유지함으로써, 가장 대표적인 '정체'를 유지하여 준 것은 그의 의도에서
건 아니건 훌륭한 공산화 저지책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본다. 또한 이것이 일본의 당시 상
황, 역사, 문화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던 맥아더의 통찰력이었다.
..전후 일본의 농지개혁이 농민과 농촌의 급격한 보수화를 가져왔고 전후 일본의 노동자가 社會主
義가 아니라 會社主義의 실천에 전념하는 이른바 '맹렬사원'으로 변신한 것을 보면 전후 일본 자본주
의 발전에 있어서 맥아더의 점령개혁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맥아더의 일
본점령과 천황제] 中 -최상룡 -
결국 맥아더가 천황제를 유지하고 또한 간접 정치 형태로 일관하였던 것은 일본 점령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정치 시스템을 찾은 것이라 볼 수 있다.
③ 對 트루만 갈등 再考 : 51년 4월 트루만은 "맥아더 장군이 미국의 정책에 대하여 성심
성의의 지지를 보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맥아더를 모든 직위로부터 해임한다. 그와 같
은 직위에 있는 인물로서는 전례 없는 방법의 해임으로서 실제 파면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그가 겪은 이러한 불명예의 근본원인은 그의 월권행위였고, 트루만은 "만일 그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민당국에 도전하도록 계속 허용한다면 나 자신은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나의 선서
를 위배하는 것이 될 것이다"하여 자신의 결단을 옹호할 수 있었다. 해임직후 광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미국인들의 "친 맥아더, 반 트루만"적 흥분은 그의 귀국 후 있었던 청문회를
통하여 그간의 경위가 보도되며 가라앉는다.
지금에 와서는 미 행정부에 대한 그의 도전이 헌법 질서를 벗어난 군장성의 무모한 하극
상 행위로서 초점이 맞추어져 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의
한국전 상황 등을 검토해 보았을 때 맥아더의 주장, 태도는 충분한 이해의 소지가 있으며
아울러 트루만의 전세 평가를 다시 한 번 재론하여볼 필요가 있다.
상술하였듯, 미국은 戰時가 되면 군 지휘관에게 정치적 결단력까지 요구한다. 이는, 결국
군 지휘관이 정치적 결정권자의 지위로까지 승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이 발발하면 미
행정국은 언론 플레이를 통하여 상대 진영을 평범한 갈등 세력이 아닌 철저한 반 평화세력..
반 인륜 세력으로까지 몰고 간다. 때문에 세계대전 당시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
국주의 등은 미 국민들에게 어떠한 악마의 이념 정도
로 여겨졌고 그에 맞서는 미 군부는 완
전 승리의 임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가들은 군 지휘관의 결정에 섣부른 간섭
을 할 수 없었고, 때론 군 지휘관의 의사가 곧 국가 정책화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미국의 정치인들은 전쟁 지도에 있어서 군 지도자들에게 최대의 자율을 허용해
왔으며 간섭을 극히 삼가해 왔기 때문에 군은 문민통제의 기본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戰區에서는 상당
한 자율을 누릴 수 있었다. ....
국가안보가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민간기관들은 정치적 및 군사적 정책의 형성에 있어서 그
들의 주도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였으며 그 공백을 군이 메꾸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루즈벨트
대통령이 전쟁 지도에 있어서 필수적인 군사적 전문지식의 결핍을 인식하였을 때, 그는 거의 전적으로
합동 참모의 조언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기간중의 전쟁 지도에 있어서 정치적인 고려사항은 군사적인
승리를 추구하는데 우선권을 빼앗겼으며 군이 정치적인 의사결정에 깊이 개입하는 것은 전쟁 기간 중
에는 정당한 것으로 광범하게 인식되었다.
"韓國戰爭 其間 中 美國의 文民統制" -金秀南-
맥아더 또한 그러한 정치 풍토에서 1,2차 세계대전을 일선에서 겪어온 군인이었다. 때문
에 육이오 참전 당시 그에게 가해진 제재에 대한 그의 반발은 일면 이해의 소지가 있다. 트
루만은 처음부터 중국 또는 소련과의 접경 지에선 철저하게 한국군으로만 대치하라는 명령
을 내렸을 뿐 아니라 중국군의 전면 개입이 있은 후부터는 일체의 지원 요청을 거부한 채
소극적 대응만을 요구했었는데, 맥아더에게 이것은 수하 군사력에 대한 직접적 제한으로 손
발을 묶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軍이 전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유일한 결
정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전장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때문에 자기
의 예하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하에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수단의
사용에 대한 제한을 가하는 것은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지시였을 것이다.
"어떠한 戰域에서 戰區司令官은 단순히 그의 병력을 다루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전지역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및 군사적으로 지휘하며 .. 따라서 전역에서의 병력지휘에 있어서 非專門家들
의 간섭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해임된 후 上院 聽聞會에서의 맥아더 연설문 중-
또한 트루만의 대소, 대 중국 정책에서도 확연한 문제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한반도
전 참전 결정 시부터 소련과 중국의 반응에 지극히 민감하였다. 맥아더에 대한 전략 지시가
대부분 중국과 소련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으로서 제시되어 항상 2차적, 부수적 움직임만을
요구한체 끊임없이 외교적 해결 방안을 고심하였다. 맥아더로서는 이러한 그의 태도가 중국
의 선택을 자유롭게 하였다고 비난한 바 있다. 맥아더 자신이 그토록 주장했던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 위협을 깨끗이 배제함으로서 한반도 戰 참전 당시의 중공군을 안심케 하였다는
것이다.
트루만은 한국전이 3차 세계대전으로까지 확대 될 수 있음을 염려하고 있었으며 결국 그
에게 궁극적인 경계 대상은 소련이었다. 처음부터 동아시아보다는 유럽 중심의 정책을 지시
하면서 동구 유럽의 공산화 확장을 저지하고자 했던 그에게 소련은 무엇보다 강력하고 두려
운 위험 세력이었다. 그는 중국의 한국전 개입이 결국 미군 군사력을 동아시아로 분산시켜
놓고 동구 유럽에서부터 도발하려는 소련의 시나리오 일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때문에 한
국전에 연합군을 파견하고도 항시 동구 유럽 공산권의 움직임을 주시하였고 결과적으로 對
중국, 북한 정책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중국의 한국전 개입이 투르만의 도움을 얻어 적극적일 수 있다는 혹자의 아이러
니한 논리도 일부 이해의 소지가 있다. 연합군의 실질적 최고 통수권자로서 당시 투르만의
자세에는 분명 재론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었다.
中共의 개입이전에 여유가 많았던 트루만 行政府가 개입 이후에는 심리적 恐慌狀態에 빠져 蘇聯과
中共이 세계 유일의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어느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판단할 능력을 상실하고 방어적인 태세로 바뀌어 오직 체면 유지를 위한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
과 소련과 중공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맥아더 장군의 임무는 변경시키지 않은 상태
에서 그의 가용수단의 사용만을 억제함으로써 맥아더 장군은 과거에 체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방
식의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고 이것은 맥아더 장군의 개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韓國戰
爭 其間 中 美國의 文民統制" -金秀南-
여기에 덧붙여 둘 사이 대립 관계를 트루만이 맥아더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심리적 갈
등에서부터 풀어 나가기도 한다. 당시 맥아더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범 국민적 영
웅으로 부각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해임 후 귀국하였을 때 미국 시민들 보여주었던 대규모
환영 행렬로써 더욱 자명해 진다. 군 지휘관으로서 그의 입지, 카리스마는 누구보다 강력하
였고 더욱이 패전후 일본의 재건을 이끌었던 최고 사령관으로서 일본에서조차 그를 영웅시
하던 터였다. 반면, 트루만은 45년 4월 루즈벨트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당시 진행 중이
던 원자탄 개발계획을 처음 보고 받았을 때 그 엄청난 계획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루즈벨트 대통령의 잔임 기간 근무 중에는 자신이 획득한 대통령직이 아니
고 남의 것을 대신하고 있다는 의식 때문에 심리적으로 시달림을 받아 왔으며 그와 같은 일
종의 열등 의식은 그 자신이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직접 출마하여 당선된 후에 해소되었
음을 그의 回顧錄에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트루만은 맥아더에 대하여 상대적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
욱이 맥아더 장군이 48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물망에 올랐었다는 사실과 당시까지 맥
아더 장군과 자신과의 경력상의 현저한 차이 그리고 차기 대통령선거에 맥아더 장군이 부상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트루만이 맥아더에 대하여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은 더욱 가
중되었을 것이다.
트루만 대통령 사후 편집되어 출판된 그의 일기의 기록을 볼 때 트루만은 맥아더에 대하
여 분명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45년 6월 일본과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당시에 트루만은 맥아더에 대하여 "Mr. Prima
Donna, Brass Hat, Five Star MacArthur, a play actor, a bunco man" 혹은 "dugout
MacArthur" 로서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일기장의 다른 곳에서는 "그 맥아더와 같은 실속없이
뻐기는 사람을 우리가 핵심적인 위치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또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왜 맥아더를 필리핀에서 순교하도록 놓아두고 웨인라이트
를 데려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트루만은 군사문제에 관한 한 공적으로는 맥아더에 대한 경외의 태도를 나타내
었다. 한국 전쟁 발발후 맥아더를 즉시 UN군 사령관에 임명한 사실과 전쟁 초기 맥아더의
작전 승인 요청을 참모들과의 사전 논의 없이 바로 받아 들였었던 사례를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후 맥아더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계속되는 승전보를 올리자 트루만은
만족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맥아더는 그에게 자신은 대통령 후보가 될 마음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50년 10월 중간 선거를 앞둔 트루만을 크게 흡족케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과 맥아더 장군의 작전 실패가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패배를 가져
오고 차후 선거에 대한 기대를 무산시킴으로써 맥아더 장군에 대한 트루만 대통령의 감정은
다시 악화 되었을 것으로 본다.
새로운 "制限戰爭"의 개념에 자신을 적응시키지 못한 맥아더 장군은 공공연하게 트루만 行政府의
外交政策에 간섭을 하게 되고 이 때문에 시달림을 받아온 트루만 대통령은 결국 맥아더 장군을 해임
함으로써 그의 맥아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韓國戰爭 其間 中 美國의 文民統制" -金秀南-
[5] 결론
현세인들의 맥아더 평가에는 크게 두 가지의 편견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는 그의
해임 배경에 대하여 일방적인 평가를 함으로써 그를 오만한 독불장군이라 칭하는 태도이다.
이로 인해 그의 다른 업적들 마저 가리워지고 퇴색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또한 당시의
상황을 재론하여 본다면 그를 일방적 비난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역사 연구에 민족주의적 가치관을 개입함으로써 양국
의 현대사에서 그의 역할 자체를 경시하는 것이다. 맥아더가 한국 현대사 담론에서 주역이
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가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 나라 남북 분단의 주역이었
고 냉전체제 하에서 많은 압력을 가했다는 점, 급기야는 현재 자행하는 미국이 자본주의적
횡포(?)로 인해 그 나라가 우리 현대사에서 받는 평가는 그리 달갑지 않다. 하지만 그가 해
임될 당시 미 행정부와 심한 대립 상황에 있었던 점.. 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전망
하는데 있어 독립적으로 행동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미국 행정부와는 다소 다른 평가가 있어
야 함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도 맥아더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지만 그의 투철한 반공 사상과 자신의 조국
(미국)에 대한 강한 자긍심, 영웅심리 등으로 인하여 전형적인 미국 권력자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의 내면 심리, 의도 이전에 그의 업적만큼은 자명하다. 패전 직후의
일본에서 군부 세력을 몰아내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의 기본 제도를 마련하였다는 점, 그
리고 한국전에 참전하여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
를 반전 시켰던 전쟁 영웅으로서의 일면이
그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 그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끊임없이
역설하였다는 점과 전쟁을 휴전 형태로 마무리 지으려는 트루만 행정부에 맞서 한반도 통일
을 주장하였던 당시 미군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 있어 한국과 일본 현대사에 미친 맥아더의 영향력은 많이 경시되고 있다. 우
리에게 그는 '인천상륙작전' 지휘관으로서 그치고 일본에서 그는 승전국의 강한 권력자로서
그친다. 특히 일본에서 그의 업적이 경시되는 것은 더욱 심각하다. 일본의 현 헌법이 그의
세 가지 기본 기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과 천황제가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 누구
보다 당시 그의 견해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으로만 보아도 일본 현대사에 있어서 그는 당
당한 주역으로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미군 지휘관으로
인식 될 뿐이어서 문제점으로 인식된다.
그의 능력, 무능력 또는 사상의 정당성 이전에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평가하자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미국인이기 때문에 또는 어떠한 편견에 의하여 한 개인의 역할이 역사에
서 가리워지는 것도 지적되어야할 역사 왜곡의 한 형태이다.
(네이버지식검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