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용철도로의 개편
일본이 경의철도 부설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일본의 자신의 세력을 한반도의 북부지방까지 확장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일본은 경의철도를 만주로 확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반듯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요동반도 서안의 영구까지 있는 영의철도 부설을 계획하게 된다. 이에 다케우치는 1903년 9월 자본금 2000만원의 "영의철도주식회사창립취의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한다. 이 문서는 경의철도의 종점인 의주에서 만주의 안동, 대호산(러시아의 동청철도지선과 교차)를 지나 요하 유역의 영구(영국의 경봉철도 지선인 우장선과 교차)에 이르는 길이 210마일의 철도 노선 계획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계획은 한반도 북부지방과 만주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된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하려 했으나, 오히려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한반도의 영토를 군사목적상으로 이용하지 말것, 북위 39도선 이북의 영토를 중립지역으로 설정하여 양국의 군대를 주둔시키지 말것, 만주 및 그 연안을 일본이 포기할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의 요구는 마침 대한철도회사가 고종으로부터 허가 받은 서울 - 평양간의 노선뿐이라는 점과 평양이 북위 39도선에 위치한다는 점에 의해 사실상 일본에게 경의 철도의 종점은 평양이라고 통보한것과 같다. 결국 러시아는 일본이 구상하던 영의철도또한 부설을 원천봉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주장은 6개월 동안 계속된 협상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되고 1903년 12월 28일 경부철도를 1904년까지 완공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그 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경의철도를 군용철도로 부설할것을 결정한다. 이때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기 사흘전인 1904년 2월 6일이다. 이를 위해 일본정부는 2월 21일 일본군 병참총감 휘하에 '임시군용철도감부'를 편성하고 일본군에 의한 경의철도 직접 부설을 명령한다. 그로고 1904년 2월 23일 군대를 동원하여 서울을 점령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일본 정부는 이를 근거로 경의철도의 군용화 계획을 통보한다.
경의철도 군용화 계획에 의거 하여 동년 3월 12일에 대한철도회사의 정현철 사장에게 경의철도차관조약 파기를 통보하며 당시 조선정부 서북철도국의 서울 - 개성 실측도마저 빼았는다.
또한 형식적이긴 하지만 경의철도 부설과 운영에 대한 감독권이 있던 서북철도국을 폐지하기 위해 하야시 주한공사를 통해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서북철도국의 폐지를 요구한다. 이러한 일본의 요구에 결국 1904년 8월 서북철도국을 폐지하여 철도원에 합병시켜 버린다.
끊겨 버린 경의선 철도 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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