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시고 자동차 자랑이라도 생각하고 클릭하셨을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결혼후 첫 명절을 보내면서 처가 식구들과 식사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왔다갔다 하던중 조부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그러다가 문득 스치듯이 들은 이야기....독립유공자! @.@
조부님에 함자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국가보훈처 사이트에 접속하여 어떤분이신가 검색해 보았습니다.
물론 유명하신분은 아니시지만 아주 가까운곳에 독립운동을 하셨던분이 계셨던것 만으로도 그냥 뿌듯합니다.
그냥 자랑아닌 자랑이란걸 해보고 싶었습니다 ^^;;;
유공자정보
관리번호 | 589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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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이강래 | 한자 | 李康來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1891-11-16 | 사망년월일 | 1967-02-19 | |
본적 | 경기도 경성 鍾路 弼雲 25 | |||
주소 | 京畿 京城 鍾路 樓上 13 |
공적정보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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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공훈록 | |||
1911년부터 1923년까지 문화운동을 통한 민족의 언어와 글을 수호하기 위하여 중국 동삼성(東三省)·노령(露領)·일본(日本) 등의 해외동포에게 한글순회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하며 1927년 12월 20일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 참여하여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신천(信川)과 안악(安岳) 등지를 순회하며 한글강연회와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한글계몽에 힘쓰고 방언을 수집하는 등 한글의 문법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1935년 1월 1일 표준어사정위원(標準語査定委員)으로 참가하여 3년여간의 표준어사정을 통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확정하는데 힘썼다. 1937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培花女子高等普通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중 신흥우(申興雨) 등이 조직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938년 9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처분으로 석방되었다. 1942년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게 되자 간사(幹事)로 선임되어 모든 준비와 실무를 추진하였으며 사전(辭典) 완성단계에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운동으로 같은해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가 1943년 9월 홍원(洪原) 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문가 사위 축하합니다 추천
마땅히 자랑 하셔야지요~~ㅎ
품격있는 처가댁에 장가드신거 축하합니다!
처가댁 어른께도 존경심을 가지시는
님도 좋은 남편이십니다 ^^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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