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생각한다.
댄스를 하듯 살아가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세를 부리거나 자만심을 갖지 않고,
겸허하게 일을 배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하게 그리고 자신이 넘쳐 흐르게..
열린 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환희 속에서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아마도 본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겠지..."
- 영화감독 샐리 포터-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올란도>(92)라는 여성주의 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영화감독 샐리 포터의 <탱고 레슨>(97)
샐리포터 그녀 자신이 초보부터 전문가 단계까지 탱고의 스탭 바이 스탭을 따라가면서
기록하듯이 만들어진 <탱고 레슨>은 영화의 80 퍼센트를 구성하는 탱고가
남성과 여성의 불균형한 파워에 관한 메타포라는 것을분명히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조화로운 탱고 뒤에서 존재 대 존재로서의 남과 여가
어떤투쟁을 거듭하는지에 관한 가장 투명한 무용극이다.
또한 이것은 춤의 형식으로 알레고리를 이루어낸 육신의 고통에 대한 숭고미의 성취이다.
젊은 탱고 댄서와 연상의 여성감독이 호흡을 맞추는 열두번의 레슨.
단순히 탱고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된 이 만남은 점점 상반된 요소들의 충돌로 나아간다.
앵글로 색슨과 라틴 아메리칸 컬쳐,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 유희와예술,
현실과 이상, 춤과 영화, 도큐멘트와 픽션…
그리고 무엇보다 치열한 것은 서로의 몸을 맞댄 남성과 여성의 헤게모니 신경전이다.
런던과 파리,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로스앤젤리스로 오가는 샐리는
바깥으로는 준비중인 영화 <분노>의 제작비와 싸우지만
안으로는 탱고의 파트너 파블로 베론(아르헨티나최고의 댄서가 실명으로 출연)과 싸운다.
파블로는 샐리에게 ‘아무 생각없이’ 그가 이끄는대로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마초적인 가부장과 요조숙녀가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하는 탱고의 규칙이다.
그러나 공적(스승과 제자), 사적(연인) 관계가 얽히면서 샐리는 점점 파블로에게 제동을 건다.
샐리가 탱고에 관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하고 주연배우로 파블로를 내정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역전된다.
“탱고에는 당신이 전문가이지만 영화에는 내가 전문가야.”
그렇다면 탱고가 바로 영화이기도 한 <탱고 레슨>의 전문가는누구던가?
두말할 나위 없이 모든 중심은 샐리 포터 그 자신이다.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 속의 영화, 그리고 동시에 영화를 만들기까지의 제작일지이기도 한
<탱고 레슨>은 샐리 포터의 철저한‘개인 영화’이다.
그녀는 직접 주인공샐리를 연기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
(마지막 장면의 노래「I Am You」외에도 샐리 포터는 음악을 직접 선곡하고
요 요 마 등과 함께연주도 했다).
영화 내내 넘쳐흐르는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빛과 그림자를 마술처럼 안무하는
로비 뮬러의 카메라 속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
솔직히 말하면 자아도취가 너무 심하여 혹시 이것은‘소년’나르시스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이다.
그러나 한 여성감독의 내면을 들여다 볼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현실의 흑백 이미지 속으로 간간히 끼어드는
총천연색 비전(샐리가구상중인 영화의 이미지들)의 아찔한 충격만큼
강렬한 호기심을 제공한다.
실제로 영화 속의 영화로 보여지는 <분노>의 몇 장면은
샐리포터가 준비하다가 포기했던 프로젝트였다.
휠체어를 탄 기형적인 디자이너와 빨강, 파랑, 노랑 드레스를 걸친 세 모델의 연쇄살인극인
이미완의 영화는 곧바로 <올란도>의 지독한 탐미주의를 환기시킨다.
샐리 포터는 <바톤 핑크>와 똑같은 수영장에서 헐리우드 제작자들과
미팅을 갖고 제멋대로 영화의 방향을 바꾸는 산업적 횡포를 경험한다.
그 순간 메인 스트림의진입을 포기하는 이 여성감독의 표정은 참담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아름다운
칼라 이미지 <분노>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우리들이다.
<탱고 레슨>은 어떤 방식으로든 페미니스트‘전사’임을 포기하지 않는 샐리포터가
남성 중심의 시스템 속에서 영화와 탱고가 그 시스템의 가장 미화된 제스처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남기는 영화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질문 자체가 여전히 아름답고 유혹적인 탱고의 리듬과
영화의 이미지로 보여진다는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러한 영화의 내용이 이 한 장의 포스터로
너무 잘 표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터의 뒷 배경에는 역동적인 탱고 동작의 고풍스러운 그림이 있다.
그런데 강하게 앞으로 뻗어나가는 남성과 그를 받아 안는 여성의 춤 동작과
그 앞에서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 샐리과 파블로의 자리는 반대이다.
우아하면서도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샐리와 그녀를 부드럽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파블로의 동작.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 강함과 부드러움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속성이 대립되는 것으로 규정되지 않고,
그럼으로써 두 사람이 조화로운 일체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
샐리 포터와 파블로 베론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강변을 거닌다
파블로 베론이 말한다.
"두려워요, 뿌리를 잃은 느낌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요."
샐리 포터는 그를 위로해 주며 이렇게 얘기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난 거예요."
두 사람은 포옹을 한다.
그리고 샐리 포터는 이 노래를 부르며 파블로 베론과 함께 탱고를 춘다.
세계적인 카메라맨 로비 뮬러가 펼친 요염한 모노크로(흑백)의 영상은
샐리 포터 감독이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생각이다.
댄스를 과도하게 미화하는 일없이 감상과 허식을 배제한 조명과 촬영이 돋보이며,
전반부에 서로 매혹된 두 사람이 세느 강변에서 춤추는 아름다운 장면,
유람선 바트뮤쉬의 불빛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한 장면에서 스챕의 창의와 기술이빛을 발하고 있다.
황량하게만 보이는 투르넬 강변을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칼로스 콘티가 가로등을 총총히 세워 놓고
나무에는 백열 등을 장식해 놓아 흑백과 칼라의 절묘한 조화와 함께 매혹적인 영상미를 보이고 있다.
세계 각국의 영화를 보면 나라마다 색깔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할리웃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영화의 특징이 있고 영국은 영국대로, 또 독일은 독일대로의 특색을,
스페인을 중심으로 하는 남미 계열의 영화 또한 나름대로의 기질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방식의 칼라를 드러내는 영화를 꼽으라면 불란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1998년에 제작된 이 탱고 레슨의 제작자는 불란서 인이고 그 무대의 중심은 빠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감독이자 여주인공이며 각본까지 쓴 쌜리 파터(Sally Potter)는 영국 출신이고 그 상대역으로 나오는 파블로 베론(Pablo Veron)은 스페인 출신의 무용수다.
이 영화 속의 대화도 영어로, 불어로, 그리고 스페인어로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으며
불란서 영화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뛰어 넘은 이 영화는 충분한 대화의 전달이라든가
탱고라는 춤 동작의 끊임없는 연습과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걸음마에서 원숙한 탱고 스텝을 밟기까지,
비틀거림에서 균형을 잡을 때까지,
소리 없는 동작에서 곡조와 리듬을 탈 때까지,
하나의 존재 방식을 외치는 삶에서 만남의 의미를 생각하게 될 때까지,
운명을 이야기하고 사랑에 절망하면서 둘이 하나가 될 때까지의 레슨.
탱고라는 춤을 배우고 익혀가면서 동시에 인생과 사랑을 배우고 익혀나가는 주인공들의
좌절과 고뇌, 그리고 결국에 하나됨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생명의 흐름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인 쌜리는 빠리에 거주하면서 늘 머리 속에 영화의 주제와 그 흐름을
생각하며 영화에 빠져 영화와 더불어 살고 있는 그런 철저한 매니악(Maniac)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극장에 들려 파블로의 탱고를 추는 모습에 매료된 그녀는
그를 만나 탱고를 배우고 싶은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그가 이 제의를 흔쾌히 수락하여 탱고 레슨이 시작된다.
탱고를 배워가며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가까워지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서로 간의 삶의 패턴 속에서 공통점들을 발견하며 춤을 통하여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로를 파악해 나간다. 그러던 중 쌜리는 자신이 작업하던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할리웃으로 건너가 영화 제작을 위한 미팅을 갖게 되지만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는
미국 영화계에 신물을 느끼고 영화 제작을 포기한 채 빠리로 돌아온다.
의기 소침해 있던 그녀는 결국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구상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어느 날 부엌에서 파블로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즉석에서 추는 탭댄스를 보고
탱고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떠올리게 되고 두 사람은 이 영화 제작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간다.
한편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화려한 빠리 쇼에 게스트로 초대받은 파블로는
그녀에게 함께 공연해 줄 것을 청하고 그녀와 상당 기간 연습 과정을 거쳐 무대에 서게 된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직후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게 되고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다가 결국 절교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괴로움의 나날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실상)을 바라보다 어느 날 쌜리는
성 설리스 성당 벽화(제목: 얍복강가의 씨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게 되자
그 자리에서 파블로에게 전화를 건다.
야곱이 밤이 맞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더불어 싸우는 스토리를 얘기하면서 그 싸움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싸움의 대상이 곧 하나님 자신이요 바로 내 자신이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나를 포기할 때에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메모를 전화에 남긴 채 그를 기다린다. 전화 메시지를 들은 파블로는 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두 사람은 하나가 되고 서로의 만남에 감격해 하며 둘만의 아름다운 춤을 추게 된다.
본격적인 영화 만들기에 앞서 두 사람은
분수대에서 경건한 세례식을 갖고(둘이 하나가 되는 의식)
스페인으로 가 그들을 도와 줄 친구들을 만난다.
새로운 스텝들을 개발하고 손 놀림과 몸 동작들을 연구하면서,
또 새로운 연습장을 찾느라 온갖 고생을 함께 하는 가운데 쌜리는
예전에 파블로로부터 탱고를 배울 때와는 달리
영화를 이끌어가는 리더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일에 몰두해 있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파블로는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과연 우리는 왜 만나게 됐을까?
이렇게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만남일까?
왜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생기는 것일까?
유대인의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치 뿌리를 잃은 느낌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유대인의 회당에 가 있어도 교회나 성당에 와 있어도,
불란서에 가 있어도 스페인에 와 있어도 그 해답을 들을 길이 없다.
왜 이렇게 답답하기만 할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너무나 두렵기만 해….
왜 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 때에 쌜리가 그를 붙잡고 춤을 추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영화는 막이 내린다.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땅에서 아니면 물로부터,
불에서 아니면 대기(air)로부터,
당신과 춤을 출 때 확실해져요,
오래 전부터 당신을 안 느낌…
당신은 나, 나는 당신.
하나는 하나, 그리고 하나는 둘…”
인생은 하나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시절을 좇아 싹이 나고 잎이 돋고 꽃을 피우다 열매를 맺듯이
그런 큰 흐름을 따라 우리네 인생도 흘러간다.
이 흐름의 순서에 건너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건너뛸 수도 없고 건너뛰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모든 자연의 움직임이 이 커다란 질서와 흐름에 동참한다.
거역할 수 없는 이 흐름의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 흐름의 처음과 끝을 보는 눈이 없어 우리는 방황한다.
우리의 주위에는 인생처럼 흐르는 것들이 있다.
강물이 흐르고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간다.
바람에 실려 꽃향기가 흐르고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따라 추억도 흐른다.
우리의 몸 속에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가쁘게 뿜어내는 호흡을 따라
우리의 정신과 기백이 흐른다.
그렇다!
흘러간다는 것은 살아있음이요 살아 있음의 원천은 무한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한다.
생명에는 멈춤이란 없다. 멈춤은, 즉 흐름을 타지 못함은 절망이요 죽음인 것이다.
춤을 춘다는 것 역시 하나의 흐름을 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춤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삶과 죽음을 이야기 한다.
이것이 바로 탱고 레슨의 주제요 춤을 통해 삶의 철학을 얘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열두 부분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삶에 관한 레슨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 역시 주인공들의 대사 하나하나, 눈빛 하나하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춤(탱고) 자체를 가르치는 부분은 첫 번째에서 세 번 째까지로 끝이 나고
네 번째부터는 탱고와 더불어 인생과 사랑을 가르치는 대화와 사건들로 전개된다.
어느 정도 춤이 궤도에 오르게 되고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쌜리는
춤의 고수인 파블로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탱고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자기가 탱고를 선택한 게 아니고 탱고가 자기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탱고와의 만남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고
또 사실은 자기의 오래전부터의 원함이 영화 배우가 되는 것이었고
쌜리의 원함 역시 무용수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만남도 운명이라는 것을 내비치게 된다.
그녀가 운명을 믿느냐고 묻자 그는 믿는다고 했고 그녀는 그런 것은 믿지 않는다고,
오히려 자신의 인생에서 기회가 주어질 때 그 기회가 운명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파블로가 그녀에게 신을 믿느냐고 묻자
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라든가 우리 인생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절대자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따라서 자신은 무신론자이지만 마음은 항상 유대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모호한 말을 남긴다.
그 때 파블로는 자신도 자연스런 흐름을 좋아하는(행동을 통제하는 절대자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댄서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자신 역시 유대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며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또 한편 빠리 쇼를 준비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자 파블로는
자신들의 사적인 관계로 인해 공적인 일들을 그르칠까 두려워 그녀와의 만남을 회피하며
자신들의 관계를 분명히 해 둘 것을 그녀에게 강조한다.
그녀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고 사랑 안으로 빠질까봐 염려하며
사랑의 엄습에 두려워하는 나약함을 보이면서 갈등한다.
사랑 안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음에도 말.
중요한 레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쇼를 앞두고 춤 연습을 하면서
파블로가 그녀에게 하는 대사 중에 나타난다.
“쌜리, 춤은 머리로 추는 게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고… 자, 잡념을 버려요.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머리를 흔들지 말고… 중심을 잃지 말아요.
모든 걸 나에게 맡기고… 날 그냥 따라와요.
흐름을 놓치지 말아요!”
이 대사를 오늘 하루의 인생 길을 걷고 있는 주위의 모든 벗들에게 이렇게 바꾸어 말해 주고 싶다.
“사랑하는 이여, 인생은 이성으로 사는 게 아니랍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긴장하면 자꾸 힘이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면 자연스러움이 망가지고…
자,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과 아집과 지식이라고 쌓아온 그런 잣대들을 내려놓아요.
그런 것들 때문에 자연스런 흐름을 타지 못하고 자꾸 힘이 들어가잖아요.
왜 당신의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성의 흐름을 막는 거요?
그것이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머리를 흔들지 말아요. 이성으로 깨어 나려고 애쓰지 말아요.
그것이야말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테니까.
모든 걸 그 분에게 맡기고… 그냥 그 분을 따라가요.
그 분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런 흐름, 그 자체가 아니던가요? 제발 그 흐름을 놓치지 말아요!”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며 춤을 추는데 파블로의 옛날 파트너가 나타나자
그는 바로 그녀에게 가서 춤을 청한다.
쌜리와 춤을 출 때와는 달리 두 사람은 예전의 콤비다운 화려한 스텝들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동시에 쌜리의 마음을 움추리게 한다.
둘이 춤을 춘다는 것은 하나의 흐름을 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호흡이 맞아야 되고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해야 한다.
내 생각을 주장하고 내 입장만을 고수해서는 춤이 엉망이 된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에게로 가서 먹히든지 네가 나에게로 와서 먹히든지 둘 중 하나가 택해져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사랑은 관계성을 의미하고 이 관계성이란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아닌 다른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봐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상대에게 그의 죽음을 요구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사랑은 권리나 의무를 들먹이는 게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다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섬김의 모양으로 드러날 뿐이요
따라서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되어지는 수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요 죽음이다.
남녀가 사랑하여 하나가 되려면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서로 거듭날 수 없고 자신의 자신을 죽이지아니하면
그는 그의 사랑을, 그의 새로운 삶(인생)을 시작할 수 없다.
쌜리가 두 사람의 춤을 한편 부러움으로, 또 한편 질시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앉은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들려준다.
(제목:펜살로 비엥-잘 생각해 봐요)
“스텝 밟기 전에 잘 생각해 봐요.
일단 밟으면 돌이킬 수 없어요.
다시 생각해 봐요.
나는 진정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또 다른 나의 사랑 때문에 당신은 나의 사랑을 버리는군요.”
질투는 사랑함에 있어 최대의 적이다.
질투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망쳐버리는 최고의 원수다.
질투는 소유욕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랑이란 어디 한 곳에 소유 당한 채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유하려면 할수록 달아나는 것이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 역시 자유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처음 쌜리가 파블로에게 춤을 배우면서
전에 함께 하던 파트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헤어졌다고 씁쓸하게 말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원칙(?)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드디어 빠리 쇼에 출연한 두 사람.
객석에 앉은 관객들로부터는 놀라움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돌아온 파블로는 그녀에게 몹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무대에서 힘있게 보이려면 모든 잡념을 버려야 해요.
당신은 힘과 긴장을 혼동하고 있어요.
힘은 침착함에서 시작하고 빠름은 느림에서 시작한다구요.
과거의 습관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공연을 모두 망쳤어요. 전부 엉망이 되었다구요. 춤
을 출 때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나만 따라와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내 동작까지 망친다구요.
당신은 내 자유마저 무너뜨리고 말았어요.(You destroyed my liberty.)
이건 춤이 아니에요. 아주 엉망진창이라구요”
여기에 답하는 분노에 찬 쌜리의 절규!
“당신은 마치 쏠로(Solo)처럼 내 존재를 철저히 무시했어요.
마치 낯선 사람과 춤을 추는 기분이었어요.
당신은 관객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구요.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죠?”
하나됨의 삐걱거림이 이런 결과를 낳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망만 가득, 불평만 늘어놓게 되어 있다.
파블로는 당연히 그녀와 하나되기를 기대했었고 나아가
그는 관객과도 하나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는 과연 춤꾼이었다.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자유마저 침해당했다는 사실에 그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관객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긴장으로 인해 흐름을 놓치게 한 쌜리 자신은
그와 하나되지 못한 것이 그가 자신을 무시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깨달음, 즉 자기 죽음, 자기 절망, 자기 포기라는 코스를 거쳐
다시 하나됨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됨이 끝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장을 향한 또 다른 출발이다.
절망과 사랑이라는 싸이클을 그리며 인생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만날 만한 때에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난 것이다.
파블로가 쌜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그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와의 만남과 사랑으로 인해 하나가 하나되고
하나가 둘이 되는 생명력의 오묘함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고 익혀 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사랑은 인생의 본질이자 의미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정점을 살고 있는 것이요
그 정점은 자기 죽음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그 원함의 완성이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는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샐리포터 감독의 탱고레슨.
탱고를 배우며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영화 속 탱고장면이 탱고를 배우게 된 계기이거나
탱고 음악이 많은 땅게로스들을 탱고로 이끈다.
열두번의 레슨.
탱고를 만나며걸음마를 시작하고 갈증을 느끼고 밀롱가에서
고수 땅게라에게 홀대를 받기도 하고
또 여러 땅게라들과의 홀딩을 통해 탱고의 맛을 알아가며 땅게로가 되어가는 과정은
내가 탱고와 만나게 되고 그간 맛보아 온 과정과 몹시도 흡사하여
보는 내내 싱크율 100%로 몰입하고 동화되게했다.
처음 워킹을 배우던 날.
살리다를 배우던 날
살리다 만으로 리드해서 탱고를 첨 췄던 첫 밀롱가.
첨 땅고 슈즈를 사던 날.
땅고를 출 때 첨으로 음악이 느껴지던 날.
하루 하루 기억이 날 듯 하다.
영화 속 그림같은 장면들. 반짝거리는 이미지들.
땅고음악을 들으며 스토리보드를 그렸던....
유난히 땅고가 생각났던 오늘.
집에 돌아와서 이영화를 다시 한번 씹어본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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