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손위 형 박상희는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였고, 미군정시절 사살당했다.
- 당시 대구는 일제강점기때부터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박정희는 귀국후 남로당 군사총책을 맡았다. 남로당 입당은 황태성이 보증했고,
그는 박상희와 같이 독립운동을 했던 공산주의자였다.
황태성은 여운형의 건국동맨 전라도 총책이었다.
박정희는 여순사건의 배후 수뇌로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으나
일본육사선배(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후 일본육사로 편입했다)인 채병덕과 백선엽(만주봉천군관학교출신)의
도움과 동료의 명단을 진술하고 풀려났다.
쿠데타때 미국의 의심을 산 이유는 바로 이지점때문이고,
5대대통령선거때 윤보선은 박정희의 좌익경력과
대구,부산에 빨갱이가 많다는 지역감정을 건드렸었다.
참고로 7대 대통령선거때 DJ는 호남경제홀대론(영남은 경부고속도로까지 만들면서 호남은 철도 복선화도 안한다는..)을
내세우며 "경상도정권타도하자"라고 유세를 했다. <- 이건 신문기사 그대로 워딩임
(DJ는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87대선때 YS단일화를 거부했다.(뭐 YS도 별로 바라지 않은 듯)
이때 4자필승론의 이유가 영남은 노태우와 YS가 갈라먹을테니 호남의 지지가 확고한 DJ가 당선된다는 뜻...
하지만 결과는 호남고립화로...<-전 진짜 지역감정의 시작이 여기라고 봅니다. 유시민도 DJ를 무지하게 씹고 조순지지했습니다.)
이얘기를 왜 꺼내냐면
매번 얘기하는 것이
다카기마사오의 만주군관시절, 그리고 쿠데다 군사독재시절만 얘기하고
그사이에 그가 남로당 군부총책이라는 점, 여순14연대 반란사건 (북한은 려순군인폭동으로 부름) 주모자라는 것은
빼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여순14연대 사건은 제주4.3학살에 군대가 동원될 수 없다는, 한민족끼리 동족학살을 할 수 없다는 의기로
저항한 사건으로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사건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최초 봉기의 계기는 불분명한데 남부군 이현상중심의 지휘체계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14연대가 점령한 여수에서 여수인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충성과 대한민국분쇄를 주요 결의항으로 내세웠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북한은 이후 이 사건을
미국의 사주로 군부내 좌익세포노출을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한국판 구정공세?)으로 몰아서
박헌영 등 남로당 세력을 숙청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사건은 현대사의 비극입니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 공산주의,민족주의,항일무장투쟁,민주주의로 나누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어느 분은 자랑스러운 호남의 민주항거투쟁으로 여순사건(북한은 려순군인폭동 이라고 말합니다)을
얘기하고,
당시 남로당 군부총책(군사총책이 아니라 군부잠입세포 총책)인 박정희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네요.
지금의 김문수는 극우의 표상이지만
70~80년대 김문수는 노동운동의 전설었습니다.
참고로... 박정희는 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남로당에가입한 것으로 보통 묘사되는데
당시 형인 박상희는 이미 해방이전부터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형제중 한명은 지하운동가, 한명은 일제 군관... 그냥 현대사의 비극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보면 박정희는 이미 군대 세포로 만주군에 의도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요?
후일담 하나더... 황태성의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에 황태성의 사형에 대해서 진실규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노무현대통령시절입니다)
체포후 관련자 진술에 따른 변절자로의 위치,
북한에 의한 남로당의 숙청 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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