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성향
수구(守舊) : 묵은 관습이나 제도를 그대로 지키고 따름.
보수(保守) : 오랜 습관·제도·방법 등을 소중히 여겨 그대로 지킴. 반대말 : 혁신.
진보(進步) : 사물의 내용이나 정도가 차츰차츰 나아지거나 나아가는 일. 반대말 : 퇴보.
개혁(改革) : 정치 ·사회상의 구(舊)체제를 합법적 ·점진적 절차를 밟아 고쳐 나가는 과정.
정파
우파(右派) : 어떤 단체나 정당에서, 온건주의적인 경향을 띤 파.
(온건주의(穩健主義) : 행동이나 사상·언론 따위가 과격하지 않고 온건한 방법을 취하는 주의.)
좌파(左派) : 어떤 단체나 정당에서, 급진주의적인 경향을 띤 파.
(급진주의(急進主義) : 현존의 사회 질서나 정치 체제 등을 급격히 변혁해 나가려고 하는 주의.)
중도(中道) : 불교에서 이르는, 유(有)나 공(空)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또는 고락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
좌익/우익
본문 : `좌익(左翼)'은 `왼쪽 날개'라는 뜻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급진적ㆍ혁신적 정파를 뜻한다. `오른쪽 날개'라는 뜻의 우익(右翼) 역시 정치적으로는 점진적ㆍ보수적 정파를 뜻한다.
즉, 좌익(좌파ㆍ左派)은 진보, 혁신 또는 사회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를, 우익(우파ㆍ右派)는 보수, 자본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뜻한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절대적인 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 맥락에서 쓰이는 `좌익' `우익'은 같은 뜻의 영어 'left wing', 'right wing'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좌파는 공산주의 체제의 신봉자, 우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신봉자라는 뜻으로 구분되어 왔다.
유래 :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이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혁명기다. 1789년 혁명 직후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에서 보아 오른쪽에 왕당파가 앉고 왼쪽에 공화파가 앉은 것이 그 기원이다.
공화파가 장악한 1792년의 국민공회에서도 왼쪽에 급진적인 자코뱅파 의원들이 앉고 오른쪽에 보수적인 지롱드파 의원들이 앉았다. 가운데에는 중간파인 마레당이 앉았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보수적이거나 혁명의 진행에 소극적이고 온건한 세력은 우익으로, 상대적으로 급진적이고 과격한 세력은 좌익으로 나누는 것이 혁명기에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이러한 좌·우파 정치 세력의 구분은 이후 유럽 정치에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계승된 것이다. 예컨대 유럽 의회에서도 공산당, 녹색당, 사회민주주의 정당 출신의 의원들은 의장석에서 보아 왼쪽에 앉고 보수 정당의 의원들은 오른쪽에 앉는다.
전통적인 유럽 좌-우파 정책
[경제정책]
좌파 -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 및 개입
우파 - 시장원리에 따라 경제정책 운영
[기업정책]
좌파 - 기간산업의 국유화 추진
우파 - 국유기업과 공기업의 민영화 추진
[사회정책]
좌파 - 평등과 분배, 복지 중시
우파 - 경쟁원리에 따른 성과 배분 중시
[국가운영]
좌파 - 국가 역할 증대(큰 정부 지향)
우파 - 국가 개입 최소화(작은 정부 지향)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부분이 좌파와 우파가 서로 바뀐 듯.)
중도(中道) : 단멸(斷滅)·상주(常住), 유(有)·무(無), 고(苦)·낙(樂) 등 두 가지 대립·집착을 떠나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즉 불교의 근본적 입장으로서 대승·소승을 통하여 중시되어온 사상.
본문 : 석가의 깨달음도 최초의 설법도 이 중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원시·부파(部派)불교에서는 고·낙의 이변(二邊)을 떠난 실천인 팔정도(八正道)를, 또한 단·상, 유·무 등의 편견을 떠난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이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를 피하고 낙을 구한다. 안락은 고와 대립하면서 인생의 이상으로서 지고의 선이다. 여기에 고의 멸과 낙의 초월의 ‘이중부정(二重否定)’이 있다. 이 이중부정에 의하지 않고는 진실·절대가 현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관파에서는 성멸(成滅)·단상(斷常)·일이(一異)·거래(去來)의 여덟 가지 대립적인 견해에서 떠날 것을 말하는 팔불(八不) 중도를 가리킨다. 결국 공(空)을 말한다. 법상(法相)·유식(唯識)에서는 비유비공(非有非空)을, 천태종에서는 실상(實相)을,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법계(法界)를 중도로 해석한다.
사상(이데올로기)
민주주의(民主主義) :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반대말 : 전제주의(專制主義).
전제주의(專制主義) : 지배자의 전단(專斷,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서 시행함.)에 의한 정치를 합리화하려는 주의. 반대말 : 민주주의.
자본주의(資本主義) :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생산 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노동력을 사서 생산 활동을 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해 나가는 경제 구조, 또는 그 바탕 위에 이루어진 사회 제도.
공산주의(共産主義) : 사유재산제도의 부정과 공유재산제도의 실현으로 빈부의 차를 없애려는 사상.
재산의 사유(私有)를 부인하고,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붕괴와 계급투쟁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는 주의.
사회주의(社會主義) : 사회사상으로서 볼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의 사회적 공유(共有)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 제도, 또는 그런 사회를 실현하려는 사상.
개인주의(個人主義) : 개인의 생활을 남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으려고 하는 주의. 이기주의(利己主義).
(모든 면에서) 국가나 사회·단체보다 개인을 우선으로 하는 주의. 반대말 : 전체주의.
전체주의(全體主義) :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
개인의 모든 활동은 국가나 민족 전체의 존립·발전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이념 아래, 국민의 자유(自由)를 억압·통제하는 사상 및 체제. 예 : 나치즘·파시즘 반대말 : 개인주의.
반 민족, 반 국가 행위자 또는 단체
친일파(親日派) : 설명이 필요 없을 듯.
빨갱이 :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유래 : 구 소련.구 중공과 같은 공산국가의 상징색이자, 공산당원들의 팔에 찬 붉은 완장에서 유래.
서구에서도 공산당원들을 'Red'라고 표현.
단, 한국사회에서는 공산주의자 뿐만 아니라 구 집권여당에 반대하던 사람 또는 단체, 즉 민주주의/반 독재/반 제국주의를 말하는 이들까지 빨갱이로 매도되어 왔음.
대표적 예
일진회(一進會) :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倂呑政策)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선 친일단체(1904∼1910).
설립연도 1904년
구분 친일단체
소재지 서울
설립목적 친일적 민의의 필요
주요활동 대한제국 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 제출
본문 : 1904년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 왕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07년 5월 2일에는 정부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를 제출하여 국채보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구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8일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일진회원들을 토살(討殺)시키고 일진회 지부 및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파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濱]에서 암살된 이후부터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가열되어 국권피탈안을 순종에게 몇 번씩 상주하기도 했다. 이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친일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되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 1905년 11월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로 맺은, 다섯 조문으로 된 조약. 을사보호조약. 을사오조약.)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 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발단된 주권수호운동(主權守護運動).)
(헤이그특사사건 : 1907년 고종이 이준(李儁) 등에게 친서와 신임장을 휴대시켜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게 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이 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려 꾀한 일.)
진보회(進步會) : 일제강점기의 친일단체.
구분 친일단체
설립연도 1904년 2월
소재지 서울 및 360여개 군
설립목적 민족개화운동
주요활동 친일활동
본문 : 일본에 망명중이던 손병희(孫秉熙)의 지령을 받아 1904년 2월 조직된 민족주의 개화운동단체였으나, 조직책인 이용구(李容九)에 의하여 친일단체로 변질되었다.
이용구 등이 동학(東學)의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한 진보회는 설립 초기에는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고 교육·산업의 부흥을 주장하며 360여개 군(郡)에 지방 조직을 설치하는 등 전국적인 규모로 기반을 다져나갔다.
한편 일진회는 송병준(宋秉畯)이 1904년 8월 독립협회 회원이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유신회(維新會)로 조직했다가 이름을 바꾼 친일단체로,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을 뿐 지방조직이 없어 세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회에 대한 일제 소탕령이 내려지자, 진보회의 전국 조직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송병준은 이용구를 회유하여 일진회에 통합시켰다.
1904년 12월 일진회와 합치면서 이용구를 회장으로 하는 '합동일진회'로 조직을 재정비한 뒤 일본인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별였다. 이에 손병희는 민족주의 중립회(中立會)를 발기하고 이용구를 동학에서 쫓아냈다.
국민신보(國民新報) : 한말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로 발행된 친일신문.
창간연도 1906년
발행지 서울
본문 : 1906년 1월 6일 창간. 초대 사장은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이고, 미동(美洞) 30통 4호에서 발간하였다. 2대 사장은 송병준(宋秉畯), 3대는 한석진(韓錫振), 4대는 최영년(崔永年) 등 친일 거두(巨頭)들이 경영을 맡았으나, 독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1907년 7월 19일에는 친일논조(親日論調)에 불만을 품은 군중들이 습격하여 사옥과 인쇄시설을 파괴한 일도 있었다. 당시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여러 차례 논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0년 7월까지 발행되다가 국권피탈 무렵에 폐간되었다.
주사파(主思派) : 1980년대 중반부터 세력을 떨친 우리나라 운동권 학생들의 일파.
본문 : 김일성의 소위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웠으므로 주사파라고 하며, 한편으로는 북한의 남한혁명노선이라고 하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추종하여 특히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NL파라고도 불렸다. 민족해방, 즉 통일을 지향하면서 당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제5공화국 정부를 타도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받아 그 세력이 한때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북한의 노선에 치중, 동조하여 우리나라가 반봉건사회이며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등의 현실 인식은 일반 학생들의 견해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더구나 1986년 10월 건국대학에서 무리하게 애국학생 민족해방 투쟁총연맹(약칭:애학투련)을 결성하려다가 대규모 공권력의 투입에 의해 좌절됨으로써 조직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이듬해인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국민의 여망이 무시되자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를 틈타 주사파 세력은 운동권의 전면에 나서면서 서울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의 학생단체들을 주도하였다. 이 6월항쟁을 통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고 이어 제6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그 뒤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1989년 7월 평양에서 개최된 한민족 축전에 전대협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1993년 문민정부 이후 학생운동이 침체하면서 주사파의 활동 역시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1995년 박홍 서강대 총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주사파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킴에 따라 다시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전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과 김일성의 사망, 학생운동의 위축 등으로 그 존재가 이미 미미해진 상태였다.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民族解放民衆民主主義革命論,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 1985년 말부터 대두된 한국의 사회변혁운동이론 중의 하나.
NLPDR 중 NL파가 강조한 민족해방 측면은 곧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고, 이는 북한과 불가분의 관계였으므로 NL파 내부에서 주사파가 득세하여 운동권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으나, 주사파는 운동권의 한 일파일 뿐 운동권 전체가 곧 주사파는 아님에도 불구, 지난 군사독재시절부터 운동권=주사파라는 등식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하여 왔음.)
진짜 우파의 말씀!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랴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이 되지 못하야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 백범 김구
흑백논리 엄중히 사절.
(흑백논리 : 黑白論理, 어떤 사상(事象)을 극단적으로 양분하여, 어느 한쪽만을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전개하는 논리.)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나는 기특한 어른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