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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자 관계 사례 중 하나를 꼽자면 영조와 사도세자 관계일 것입니다.
조선을 중흥기로 이끈 성군으로 평가되는 21대 왕 영조는 천민 신분인 무수리 출신 어머니로 인해 출생에 대한
열등감이 평생 성격 기저에 깔려 있었어요. 1724년에 왕으로 즉위했지만 4년 후,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며 과격파 이인좌 일파가 일으킨 난으로 인해 그의 뿌리 깊은 열등감은 더욱 심해졌지요.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가 시아버지 영조는 왕의 정체성 문제로 인한 정치적 위기 때문에 신경증이 생겼다고
‘한중록’에 기록할 정도였으니까요.
또한 즉위 20년이나 지난 1755년에는 나주 벽서와 관련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영조는 평생 자신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으로 트라우마적 경험에 시달렸어요.
이는 영조에게 비천한 출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과도하게 일중독에 빠지는 강박적 과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요. 나아가서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아들 사도세자와의 상호작용에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추측되네요.
영조는 미친 듯이 자신을 다그치며 학문과 일에 몰두하였고 신하들과 밤새 토론을 벌이고 답을 내지 못하는 신하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는데요.
또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기 위해 철저히 소식을 하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죠.
열등감을 극복하려고 부단히 애를 쓴 영조는 이러한 강박적 특성 때문에 신경과민에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등 감정기복이 심한 격렬한 성격으로 평생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긴장하게 만들었지요.
아들러는 열등감은 인간의 잠재능력을 발달시키는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말했어요.
그는 자신의 약점으로 생기는 불안정감이 주는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게 되고,
이 열등의 감정을 극복하고자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증가된다고 했죠.
아마도 영조는 출생의 한계로부터 오는 열등감은 너무 큰데, 이 열등의식을 억압하기 위해 완벽주의적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규칙적인 운동과 소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통제했을 거예요.
또한 정체성의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권력이 탄탄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되고 또 신하들보다 월등히 우월해져야 한다는 강박으로 밤새도록 신하들에게 유학 경전 문답법을 하는 등의 행위에 매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러가 열등감을 지나치게 억압하면 권력과 우월성의 추구는 정도를 넘어 병이 될 정도로 극단으로까지 치닫게 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이러한 아버지의 강박성은 불행히도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아들 사도세자에게 독이 되고 말았어요.
부모의 열등감에 기인한 강박적 태도는 자녀에게 자율성을 허용하지 않고 매사 통제하는 형태로 나타나 자녀는 일상의 삶에서 커다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세자는 결국 1757년 이후부터는 정신질환이 심각해져 폭행, 성폭행,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비구니(여자 스님)를 성추행하거나, 연쇄 폭행, 성폭행을 일삼아 수많은 궁녀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했으며, 내시와 나인들을 많게는 하루에 6명까지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이로인해 세자가 결국 죽게 되지요.
똥을 싸다 만거 같아서 좀더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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