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 발췌했으며 내용 보면 화려한 휴가등.. 영화나 드라마에서 광주민주화 항쟁을 다룬 내용은
거의 미화수준으로 잔인한 진압장면이 삭제 됐습니다.
보수의 거장 조갑제마저 광주는 민주화 항쟁이 맞다라고 하는데 몇몇 지만원이 논리로 무장한 곤충들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바 글을 올립니다.
1. 전조
18 일 새벽, 전남대에 공수7여단 33대대가 진주했다. 그후 공수부대원들은 정문을 장악했다. 도서관에 공부하려 모인 학생들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당황해서 모인 대학생들은 공수부대한테 막혀 학내에 구속됐다. 진주한 33대는 교내를 수색해 학생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연행해갔다. 이 때 학생들 중엔 농성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멀쩡히 도서관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대학교도 상황은 비슷했다.
광주교육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임영남 씨는 평소처럼 테니스를 치기 위해 대학체육복을 입고 학교에 왔는데 공수부대원 중 한 군인이 임영남 씨를 불러놓고 다짜고짜 발을걸고 넘어트리고는 군홧발과 몽둥이로 온몸을 구타했다.
전남대 정문에선 몇몇 학생들이 돌을 던졌고, 한 장교가 그 중 한 학생을 잡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 후에도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33대는 진압을 위해 2개 지대를 동원하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이 도망가자 인근이나 집까지 찾아다녔다. 근처에서 지나가던 버스에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학생들까지 7여단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계엄군은 신분을 밝히고 다가간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한다.
2. 도청 발포 이전 살육
18 일 오전 11시쯤 계엄군은 독서실에 올라가 가만히 입시 준비하던 고교생들을 구타했다. 이유없이 매를 맞아서 학생들은 독서실에서 울고 있었다. 학생들은 시내로 몰려들고 시내에서 파출소에 돌을 던지거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들의 진압에 따라 무너지거나 흩어졌다.
18일 14시 30분, 대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대는 10~20명 단위로 시내에서 배회하는 수준이 된다. 공수부대 시내 투입은 필요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한테 지시를 했고, 정웅 31사단장은 지시를 따라 7공수여단 시내 투입을 명령한다. 7공수여단이 아직 시내 출동하기전일 때, 계엄사는 동국대 주둔 중인 11공수특전여단 증파를 결정한다. 현지의 전남북계엄분소는 요청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유동 삼거리쪽에 1개 중대 공수부대 병력이 나타났고 시민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 때만 해도 시민들은 '시위진압'이 아닌 '무차별 살육' 혹은 '폭동적 진압'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18 일 16시 쯤 국방색을 입은 군인들이 유동 삼거리에 나타났다. 세겹으로 횡렬을 지어 도청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 지휘자가 '제자리 서, 정렬'이라 하자 군인들은 횡단보도에서 일제히 멈춰서 대오를 가다듬으며 대기했다. 유동 삼거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횡단보도였고, 북동 180번지와 루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러다 정확히 16시 정각이 되었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탑차량 위에 있는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거리에 나와 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이었다. 이 때 시민들은 당시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방송에 있은지 1분 정도 지났을까 말까하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엄청난 명령이 군인들한테 떨어졌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이 딱 한마디가 다였다. 이 명령 이외 세세한 행동지침 따윈 없었다. 시위해산이나 시위자 체포같은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시위하던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유동 삼거리쪽에 다가왔을 때 부터 이미 대부분 잽싸게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학계에선 이 명령을 아주 중요하게 보며, 이 명령을 광주민중항쟁을 일어나게 한 폭탄선언이라 평가한다.
거리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 때의 계엄군이 받은 지령이〈전교사 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는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 명시돼 있다. 군인들은 진압봉과 착검한 소총을 겨누어 잡고 인간 사냥에 나섰다.
2007년 국방부의 진상규명에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는 시위진압을 위해 폭력을 쓴게 아니라 체포를 위해 폭력을 썼다. 공수부대는 시위를 안 한 시민들까지 포함해 무차별 진압봉 공격과 대검 공격을 벌였다.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공수부대를 피해 시민은 여러곳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다 11대의 군용트럭이 횡단보도에서 50m 떨어진 서석병원 앞길에 정차하고 군인들을 쏟아냈다. 그 군인들 역시 무차별로 시민들을 공격했다.[14]
그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건물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지사가 있는데, 그날은 일요일이라 출근한 사람은 적었다. 거기에서 가만히 일하던 직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정은철 총무는 바깥일에 신경도 안 쓰고 앉아서 '태연'하게 일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대를 잡으러 건물을 수색하던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총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정총무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졌고, 두 군인에게 짓밟히고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았다. 당시 다른 동아일보 기자가 봤을 때 그 모습은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수준이었다. 정총무는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초죽음 되어있는 정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머리는 땅바닥에서 끌린 채였고,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군인들은 또 올라왔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려고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 군(광주공고 1년)이 그 표적이 되었다. 박준하군은 공수부대한테 갑자기 구타당하고 실신했다. 두 군인은 끌고 가다가 박군을 계단에 내팽개쳐버리고 내렸다.
이렇듯 7여단의 행위에는 아무런 이유나 원칙도 안 보였다
서 석병원 앞에 서있는 11대의 군용트럭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실리고 있었다. 머리와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해내지 않는 사람들이 없고 하얀 옷자락도 핏물로 얼룩졌다고 한다. 한 사람은 머리에서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고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인원에게 인계했고 대기인원은 군홧발과 몽둥이로 두들겨 팬 뒤 희생자들을 트럭 위로 옮겼다.[17]
그러다 길거리에 어느 택시가 지나갔다. 이 택시엔 남자는 젊고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고 여자는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신혼부부인 듯한 커플이 있었다. 이 택시 역시 공수부대원들한테 붙들렸는데 군인들은 그 두 커플을 택시에서 끌고 내려왔다. 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 고속버스 터미널, 광주역으로 빠져 나가는 길목이다. 신혼여행을 위해 가려는 듯했다. 신랑은 택시에서 끌려 나오자마자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받았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엉망이 된 채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사람 살려!"하고 소리를 질렀다. . 군인들은 "이 쌍년"이라 말하며 신부를 걷어차며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또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한테 옷을 입혀주는 행위조차 막고 잔인한 일들을 벌였다. 예로 하얀색 투피스 옷을 입었던 여자는 공수부대한테 얻어맞아 윗옷과 아랫옷이 피투성이가 되고 공수부대원이 억지로 옷을 잡고 일어나게 하려다 옷이 찢어져서 윗옷은 젖가슴이 보이는 상태가 되었다. 이 때 바로 옆 서석병원에서 병원장 김상수(24) 박사는 사무장을 시켜 가운과 팬티를 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사무장은 옷을 들고 여자한테 다가왔는데 군인들한테 붙잡혔고 군인들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먹였다.[19] 약한 여자를 향해 벌인 폭력도 제정신은 아니지만 여자한테 옷을 입히려는 의사까지 두들겨 팬건 도저히 시위진압으로 볼 수 없는 행위였다.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제일고등학교 까지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이곳은 일본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왜경들은 적어도 교장실에 들려 사전 양해는 구하고 연행해갔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군화를 신고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받던 학생들을 구타하고 짓밟았다. 이날 교실에서 있던 학생들은 만학 과정을 이수하기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일요일 수업을 받던 성인 학생들이다. 이들도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학자금이 없어 정규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 생계 때문에 공부하지 못 했던 사람들이었다. 정복을 입고 있던 한 육군 간부도 두들겨 맞았다. 그 군인은 재빨리 뛰쳐나와 교문 밖으로 나왔다. "나도 군인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며 말하며 빠져나갔다. 눈물이 난건지 눈언저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20]
그날 광주제일고에선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난를 당했다.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러다 교장관사에서 막혔고 공수부대원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이 린치에서 그는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고 한다.[21]
그 무차별 살육속에 결국 첫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청각장애인이었다. 김경철 씨는 귀도 안 들리고 말도 못했지만 갓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고 이날도 친구들과 점심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였다. 그러다 공수부대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 뒤에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3시에 사망했다.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사 같이 온몸을 두들겨 맞은 상태였고 후두부타박상에 따른 뇌출혈이 직접 사인이라한다. 그뒤 군 당국에 따라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다방에선 청년 한 사람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서 포승으로 묶은 뒤 트럭에 내던졌다. 청년의 머리에는 피가 흘렀다. 여자 하나가 '학생이 아니라'고 울부짖자 공수부대원들은 땅에 내동댕이쳤다.
당시에 기록된 5.18 사태일지에 따르면, 조선대 입구 철로변을 지나가던 학생 11명을 공수부대원들이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고, 일부 군인은 대검으로 여자의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버린 뒤 방망이질과 발길질을 하였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여단들은 개머리판 뿐 아니라 날붙이를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는 발포까지 하였다.
3공수여단은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대검을 썼다. 광주역앞에서 죽어있던 허봉 씨는 좌측 전두부가 대검에 찔린 상태였다.
손 옥례 씨는 M-16 총알에 왼쪽엉덩이와 오른쪽등과 앞가슴이 뚫렸고 그 뒤 젖가슴은 대검에 찢겨졌다.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원이 칼을 던진 것을 중앙일보 취재팀이 목격하기도 했다.
검찰조사결과에 따르면 하언남, 최승기, 김인윤, 이인선, 최미자 등이 대검에 찔렸고 사망자 손옥례, 권근립, 윤개원, 김평용, 박종길, 민병렬, 허봉, 김경환 등 시체에서 대검 흔적이 확인됐다.
5월 22일 전교사 연병장에선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일이 일어났다. 그 연행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됐는데 몇시간 뒤 결국 죽었다고한다.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 현장에서 있던 계엄군이 직접 목격하고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다 증언한 사실이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했는데 자신한테 대들고(!) 술냄새가 났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군기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가 확인해보니 전재서 씨는 22일에 국군통합병원에 도착하고 23일 새벽 5시 20분에 죽었는데 '우측 두부'에 찔린 상처가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앞서 밝혔듯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1950. 5.18'을 따르면 대처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 '7空輸隊 銃劍鎭壓'라고 적혀있고 안기부가 1985년 작성했던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고 쓰여있다.
희생된 광주 민주화 영령들을 추모합니다.
그들을 모독되게 하는 언사는 삼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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