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걸고 온 대한민국이 나의 두 아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
포항시청, 경북동부아동보호전문기관 (아보전)
포항 두 아이 엄마 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북에서 온 김OO 입니다.
자~ 여러분 저는2015년 12월 30일날 경상북도 포항에 정착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돈없고 권력이 없고
힘없는 가난한집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또한 착한 사람 하나 범죄자로 만들고자 할 때
권력이 있으면 그 가난한 사람은 정말 범죄자가 되더라구요.
이게 바로 대한민국이고, 이게 바로 현실입니다.
저는 어디 가서는 제 스토리 공개 안합니다.
제가 부모없이 살다보니 계속 사람들한테 소외당하게 되고 망신스럽거든요.
저는 3살때부터 16살까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제 부모는 3살때 이혼하고 둘 다 어린 저를 버렸습니다.
엄마는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다 할머니한테 현장을 들켜서 이혼했고,
그 바람난 사람과 딸 둘을 낳고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엄마의 얼굴은 항상 궁금했지만 저를 찾지 않았고,
아버지도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한테 빠져 저는 아빠도 모르게 되었지요.
가족이란 단 하나밖에 없는 할머니였고, 할머니가 나의 엄마이자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할머니가 능력이 안되시니 저는 유치원과 학교를 못다녔습니다.
학교는 갔었지만 교복 하나 구매할 돈이 없어서 결국 못다니게 되었고,
동네 애들은 저를 까막눈이라고 놀렸었어요.
할머니가 능력이 없으시니 굶는 날이 많았고, 밥먹는 날은 기억이 안날 정도로 배고파서
길가에 있는 소들의 똥을 헤쳐서 옥수수 알갱이를 골라내 깨끗이 씻어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에서 모르는 분이 제 앞에 오더니
왕눈알 사탕 13알을 주면서 “배고프니? 너 왜 여기서 거지생활(꽃제비) 하냐?” 묻길래
“저는 거지 아니예요. 집에 할머니가 있습니다.” 답했습니다.
그 삼촌은 “오~ 그래? 너 중국 안갈래? 중국 가면 하얀밥에 돼지고기국 먹는다.” 했고,
저는 “할머니 같이 가면 안되나요?” 물었습니다.
삼촌은 금방 돈 벌고 나올 건데 할머니가 거기 가면 힘드시다 했고,
저는 그쪽에 가면 제가 할머니 보고싶어 그런다 하니,
그 삼촌은 너가 올 때까지 할머니를 잘 돌보아 드리겠다, 갔다가 빨리 오면 된다 했었습니다.
저는 돈에 환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제가 연변 조선족 식당에서 설거지만 하면 한달에 중국 위안5천을 받는다 했고,
저는 그냥 두달만 일하다가 북한에 나와서, 할머니랑 같이
좋은 밥먹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겠구나 생각에 얼른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2006년 12월23일 두만강을 건너 중국 장백에 도착하여 탈북을 성공했고,
그때 새벽 3시쯤 도착하여 북한에서 입고 온 옷을 벗고 새 옷으로 바꿔입고
거울을 보니.. 옷이 날개라고, 제 모습이 한순간에 예뻐졌습니다.
조금 자다가 일하러 가는 줄 알았는데..
저는 인신매매에 걸린 거였더라고요.
참~ 장애인인 다리병신한테 3만위에 팔렸고,
저는 꼼짝도 못하고 그 집 노예가 되었습니다.
말 안듣는다고 빗자루로 많이 맞았습니다.
또한 그 양키는 저를 그 추운 겨울에 굴에 묶어 놓았습니다.
진짜 너무 깊은 산골집이였고, 나를 죽여도 경찰들이 안오는 곳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배가 계속 불러오르고,
배에서는 뭐가 계속 움직임이 있고… 희한했습니다. ㅠㅠ
이상해서 그 장애인에게 말했습니다. 배 안에서 움직인다고..
당나귀 타고 주변 보건소를 가니 임신8개월이였습니다. ㅠㅠ
기가 막혔습니다. 배 안에 아이가 있다는데 그 아이는 어떻게 빼야하는지..
한달 넘게 그것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팠고,
(뱃 속의 아이는 진짜 상상도 못했는데 그 곳에서 나올 줄이야 ㅠㅠ)
2007년 12달 아이를 낳으니까 이젠 감시를 안하더라고요.
아이 낳은지 일주일이 좀 넘었나 저는 그 무서운 집에서 탈출했습니다.
탈출해서 시내까지 왔고, 일할 곳을 찾았습니다. 빨리 북한에 가야하니까..
할머니도 보고 싶었지만 내가 계획했던 돈만큼 벌어서 나가야
할머니랑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차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한달에 위안700씩. 그렇게해서 얼마정도 모았어요.
하루는 세차장 사장님께서 “너 혹시 북한에서 왔지”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아니예요.” 답은 했지만 갑자기 속이 떨렸습니다. 다시 북한에 북송당할까봐..
저는 자수해서 가야 할머니랑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눈치 보다가 도망쳤습니다.
택시기사한테 멀리 가주세요 하니 가는 도중 택시기사가 저에게
“북한사람이지?” 또 묻더라고요. 참~ 나는 왜 이렇게 꼬이는지..
그 물음에 아닙니다 대답하니 택시기사 말이
우리 장모님이 목욕탕 하시는데 월급도 높고 하다며 솔깃한 소리를 하길래
가보기로 했습니다. 큰 목욕탕이었고, 좀 앉아있는데
제 소지품 내놓으라길래 가방을 줬고.. 할머니한테 가져가야 할 돈은 항상
스타킹 안에 넣고 배에 감고 있었는데 돈을 뺏더라고요.
“이러지 말라고요. 내 돈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안됐어요.
밀려오는 눈물과 서러움에 저항도 못하고.. 그렇게 밖에도 못나가고 갇혀서 일만 했어요.
아침 5시에 일어나면 청소하고, 손님들 들어오면 때밀어야 하고...
그만큼 힘든 일은 없었어요. 일하다보니 나중엔 적응되서 일은 덜 힘들어졌는데
고향 생각과 할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울면 가게 주인은 운다고 욕했고…
도망치려고 몇 번 시도해 봤으나 그놈의 카메라 때문에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말이 나보고 시집간대요.
그 남자는 잘 생겼고, 애 낳으면 경제권도 너에게 준다 하더라고요.
저는 알겠다 했습니다. 빨리 거기서 나가고 싶고 밖의 세상을 보고 싶었거든요.
드디어 그 남자를 만나보니 착해보였고, 그 남자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5만위안에 팔린 거였고, 제겐 단돈 십원짜리 하나도 안주었지요. 썩어빠질 중국 개놈들.
집은 깨끗하고 살만했습니다. 같이 살다 ㅠㅠ
2011년 10월, 떡돌같은 아들을 낳게 되었죠. 진짜 아들은 예뻤습니다.
너무 사랑스럽고 꼭~ 씹으면 피 안나올 정도로 예뻤습니다.
저는 그 남자에게 아이도 낳았고 같이 사니까 약속대로 경제권을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 크면 다 넘겨주니 돈돈하지 말라 하더니 (자식 안주려고 사람 얼러서 하는 수작이였지요)
뺨을 때리고 발로 차더라고요. 더이상 맞고는 못살겠다는 생각에
2012년 6월 아들을 안고 도망 나왔습니다. 정작 나오니 두렵고, 무섭고..
이러다가 아이까지 굶을까, 다시 돌아갈까 이 걱정 저 걱정하는 중,
노래주점 문 앞에 ‘구인구직’ 적혀 있더라구요.
들어가보고 안되면 다시 집에 들어가자 하고 아이를 안고 들어갔습니다.
여자 사장님이였고, 너무 친절하셨고, 우리 가게 온 것을 환영한다 해주셨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 말씀드리니 사장님께서는 아이랑 같이 살 집도 마련해주시고,
게다가 일하는 동안 아기 돌봐주는 사람까지 붙여주셨습니다.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안정을 찾았고,
열심히 일한 댓가로 월급도 4천위안씩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
잠시 할머니 생각을 조금 멀리했습니다. 아기랑 같이 북한으로 가고 싶었지만
북한 당국은 다른 나라씨는 죽여버리거든요.
그렇다고 아이를 친아빠한테 줄 수는 없는 거고..
그냥 저는 내 아들을 지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 버리고 나온 자식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서 오빠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 사정을 알게 되었고, 자기 고향으로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 남자라면 내 아들 인수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에 승락했고,
우리 3명은 2013년 상하이로 같이 떠났습니다.
아주 신세계였습니다. 상하이는 동북 심양보다 멋지고 꿈 같더라고요.
오빠 집에 거의 도착할 때 오빠가 “저 앞에 우리집이다.” 하더라고요.
저는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런 멋진 아파트가.. ‘엘리베이터’ 라는 것도 처음 타봤고,
20층 되는 아파트도 살다 처음 보는 거라 실감이 안났어요. 집에 들어가니 궁전 같았습니다.
저는 오빠에게 물어봤어요. 오빠는 왜 아무것도 없는 나를 선택했냐고..
그 사람은 ‘나는 너가 좋다는 것보다 자기 자신도 위험한데
자식 지키는 것에 대해서 아주 마음이 끌렸어. 그래서 너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대로 쭉~ 살았으면 좋겠어.’ 말해주더라고요.
그런데 살다보니 아들이 유치원을 가야하는데 국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인구조사 하러 가끔씩 세대방문을 오는데
항상 아이와 저는 두려움에 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지내며 노트북으로 한국영화 보려다 그 사이트에서
‘이제 만나러 갑니다’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죠.
그 화면 밑에 북한주민 구원단체 번호가 있었고요. 앞번은 02로 되어있고..
한동안 고민 끝에 저는 “저기.. 오빠. 나 한국가면 안되나요..” 물었습니다.
오빠는 그랬어요. 말도 안되는 농담 그만하라고..
가고 싶어도 너가 여권이 있나? 뭐가 있나? 비행기를 탄다고? 하며 웃더라구요.
그 말 들이니 오빠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아이는 점점 커가는데 유치원도 못가고..
앞으로 아들이 살 날이 창창한데 엄마인 저는 포기를 못하겠더라구요.
저는 그 때 한 번 대담하게 한국에 있는 구원단체에 전화했습니다. ㅠㅠ
한국가는 경로를 들으니 떨리고 무섭더라구요.
만약에 잡히면 바로 북송되고, 그러면 총살된다는 것을 알기에..
일단은 생각 좀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고 끊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에 꼭~ 가야겠어. 내 아들이 국적없이 사는 걸 못봐주겠어.
생각해봐. 국적 없으면 내 아들은 평생 나처럼 까막눈이 되어야 해.”
오빠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가는 경로 얘기해봐라 하더라고요.
저는 그냥 짧게 말했습니다. 위험하다는 이야기하면 오히려 안보내줄 확률이 높으니까요.
오빠가 허락했고, 저는 바로 한국에 있는 구원단체에 전화했고,
떠난다는 답을 주고 구원단체와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날 밤, 온 밤을 새도록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만약에 한국가는 도중에 잡히면 아이와 나는 북한으로 북송될 것이고, 북송되면 바로 사형.
내 아들은 아직 살 날이 너무 많고 희망을 펼쳐 나가야 할텐데!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나 혼자 실험해보고 잡히면 나 혼자 죽어야지. 내 자식은 못죽어.
오만가지 생각하다가 제가 오빠에게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인수 두고 갈께. 만약에 내가4개월 후까지 연락 없으면 인수는 친아빠한테 맡겨.”
말하자마자 오빠는 놀라서 그러더군요. “너 한국 안가면 안되니? 나는 너가 죽는 게 싫어.
아들은 너 없으면 평생 불쌍하게 살게 된다.” 서로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오빠, 울지 말고.. 내가 말하는 건 만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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