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 인생에서 중요한 게임 하나의 엔딩을 봤습니다.
내 집 마련을 했거든요. 흙수저 둘이 만나 부모님 도움 없이 각자 모은 2천만원으로 결혼, 300에 40짜리 월세로 시작했습니다. 2년만에 어찌 저찌 조금 모은 돈에 대출 껴서 전세로 이사 했고.. 전세값 얼마나 올리자고 하려나 불안한 마음으로 두번째 재계약을 앞 둔 시점에 신축 아파트 분양에 도전 했습니다.
엄청 겁났습니다. 사실 당첨 돼도 계약할 돈이 모자랐었거든요. 그래도 열심히 주판을 튕겨보니 간신히 지금 저축하는 것 보다 조금만 더 하면 계약이 가능하겠더군요.
계약한 뒤엔 잔금 모으는 연퀘가 이어졌죠. 입주까지 남은 2년간 5천을 모아야 분양 이후에도 대출을 갚으며 생활이 가능해 보였습니다.
3인가구 평균 소득에도 못 미치고, 그냥 저축하는거 말고는 다른 요령 없는 저희 부부가 그래도 다행히 둘 다 돈 쓰는 재주도 별로 없어서 그냥저냥 큰 위기 없이 오히려 초과 달성으로 퀘를 깰 수 있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최종 보스가 남았더군요. 일부러 재계약 할 때 입주시기에 맞춰서 1년 6개월만 계약을 했는데 계약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이 돈이 없답니다. 새로운 세입자 구하기 전엔 돈 못 준답니다. 배 째랍니다. 보증보험 들지 않았냐며 보증 보험 받던지 알아서 하랍니다.
보증보험.. 계약 만료 2달 후에 보통 돈을 받을수 있다더군요. 그럼 입주 시기를 놓칩니다. 계약금을 날리게 됩니다.
문자도 안보고, 전화도 안받는 집주인에게 찾아가 사정을 해봐도 소용이 없더군요. 찾아오지 말랍니다. 세입자 구하기 전엔 방법 없답니다. 다시 오면 경찰을 부른답니다.
답답한 마음에 내용증명을 보냈더니 제가 전화해도 피하던 양반이 먼저 전화를 하네요. 화를 냅니다. 잘해주고 싶던 마음 다 없어졌으니 너 할 수 있는거 다 해보랍니다.
내 돈인데...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내 돈인데.. 약속한 날짜에 돌려달라는건데.. 뭘 잘해주려 했다는 거지? 그냥 계약대로만 해주면 되는 거였는데..
왜 저 사람은 큰소리 치며 화를 내고 전 부탁드린다고 허리를 숙여야 했을까요.
고민 끝에.. 30년 간 뵌 적이 없던 친척 분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부산 갈 일이 생겼는데 잠시 뵐 수 있냐고.. 흔쾌히 그러시라 하시더군요. 사실 부산 갈 일 없었는데.. 다음날 비행기 타고 갔습니다. 그리고 사정 이야기를 드리고 보증보험 받으면 무조건 3개월 안에 갚을 수 있다고, 이자도 다 챙겨 드릴거라고 딱 전세금 만큼만 빌려주십사 읍소를 했습니다.
사실 제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걸 힘들어하는 성격이라서.. 원래는 못 하는 행동이었는데.. 그게 되더라고요. 집이 깨끗하면 세입자가 구해질까 싶어서 매일 퇴근해서 무슨 강박증 처럼 쑤세미질을 하는 아내가 눈에 밟혀서...
생각보다 흔쾌히 그러자는 말씀을 듣고 친척분 앞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간 긴장과 속에 맺힌게 다 풀리는 기분이었거든요. 돌아와서 연락 안되는 집주인 대신 부동산에 가서 돈 구했고, 집 나가던 안나가던 우리는 이사를 할 거고, 보증보험 받을거다. 했더니 부동산에서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나 봅니다. 집주인이 부동산에서 보자더군요.
큰 소리 치더군요. 뭐하자는거냐고... 돈이 생기고 방법이 생기니 무서울게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거 다 해보라 하지 않았냐고? 난 이제 저 집에 세입자가 들어오건, 경매로 넘어가던, 보증보험 받을 수 있고 돈은 구했으니 큰 소리 치지 말라고, 누가 더 아쉬운 상황인지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했냐며 소리 치고 나왔습니다. 속 시원 했습니다.
30분 뒤 전화가 왔습니다. 계약 만료일에 돈 줄테니 조용히 나가달라고..
피가 밑으로 내려가는 기분이더라고요. '이 XXX 해줄수 있으면서!'가 제 처음 든 생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 어제 무사히 입주 했습니다.
그동안 잘 버텨줬던, 처음 써보는 드럼세탁기 30분동안 쳐다 보면서 물멍이 이런 기분인가보다라며 웃어주는 아내가 너무 고맙습니다. 그리고 막보까지 잘 잡아내고 엔딩 본 제가 스스로 대견합니다. 제가 눈물이 좀 많은 편이라 지난 3개월 정도 식구들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정작 어제는 눈물은 안나더라고요. 날 줄 알았는데..ㅎㅎ
앞으로 남은 인생을 계속 살다보면 어제의 일은 결국 제 인생에서 퀘스트 하나 클리어 한 것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냥 저 잘 했다고.. 쉽지 않았지만 해 냈다고 자랑 하고 싶어서 긴 글 써 봅니다. 끝으로 보배 분들도, 그리고 저희 가족들도 새해엔 좋은 일만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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