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에 징용당해서 사할린에 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슬하에 3형제가 계셨는데 첫째(맏아버님)는 강제징용으로 해방후에도 재회를 하질 못했죠.
차남이셨던 큰아버님은 그리워 하시다가 1986년에 돌아가셨고
셋째이셨던 저희 아버님은 그나마 1990년 사할린 동포 모국방문으로
맏아버님과 처음으로 재회를 하셨죠.
물론 그 이전에 KBS 라디오인 사회교육방송에 아버님이 출연하셔서 아버님 형제분을 찾는다는 방송도 하셨고
다행히 서로 연락이 되어서 제가 중학교때는 서신교환도 되었으니..
지금도 기억에 나는것이 중학교 시절 CCCP(영어로 USSR)라는 국명과
러시아어로 된 주소를 진짜 그림그리듯이 편지봉투에 적었던 기억도 있고.
1990년에 드디어 맏아버님이랑 아버님이 재회를 하게되셨는데
얼마나 우셨는지 몰라요.
약 한달간 모국방문을 하셨는데 사촌형님과도 처음으로 재회를 했구요.
좀 가슴아팠던것은 한국의 대부분 가정이 그러하듯이
큰집이나 우리집이나 남자사촌들은 같은 항렬을 사용하는데
사할린에 계셨던 사촌형님은 다른 항렬을 사용하셔서 좀 슬펐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사할린 동포의 2세는 그당시 러시아 국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93년에 맏아버님과 맏어머님께서 영구귀국하셨을때 같이 따라오질 못하셨습니다.
현재 아버님 형제분들은 3명다 고향에 묻혀계신데 그것만 해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나마 저희집은 다행이게도 아버님 형제들이 서로 생존해 계실때 재회를 하셨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굉장히 많죠.
그런분들에게 좀 더 죄송스러운 마음이.
강제징용문제와 관련된 현재의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참 많은것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거기다가 자칭 국내극우라는 세력들의 행태를 보면서 참..
그나마 강제징용 생존자분들이 한분이라도 계신데도 저따위 반응을 보이는 일본인데
생존자분들이 안계실때 이 문제를 제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뻔하네요.
거기다가 일본군성노예문제도 부인하는 일본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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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추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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