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은 한때 일본의 다루이 도키치가 내놓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이른바 ‘흥아론’(興亞論)에 크게 마음을 빼앗겼다. 조선에 그의 책이 수입되자 하루 만에 1천부가 매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개화파는 물론 유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쑨원 역시 신해혁명 직후 일본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했다. 일본은 중일전쟁 당시 ‘일지제휴’를 앞세워 ‘일본과 지나(중국)가 장차 손을 잡고 함께 가기 위한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침략을 미화했다. 이 시기 조선의 지식인 중 일부는 장차 우리가 일본의 뒤를 이어 아시아의 2등 국민은 될 수 있을 거라는 ‘아제국주의’의 착각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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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한성지잔몽>이 한국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은 한국병탄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한 일본 역사가의 지적처럼 이 책은 “한국병탄의 이념적 무기”였다. -
서양으로부터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한중일의 ‘대등한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당시 한국이나 중국의 지식인들의 지적 관심을 자극했다. 출판 직후 중국의 개혁론자 량치차오(梁啓超)는 자신의 서문을 추가하여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이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했다. 또한 일본의 한국병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대동국의 사내’[大東國男, 오히가시 구니오]라고 지을 정도로 이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1850년 나라(奈良)에서 태어난 다루이 도키치는 열렬한 정한론자였다. 평소부터 사이고 다카모리를 흠모해 온 다루이는 1877년 서남전쟁이 일어나자 사이고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사이고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륙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군사적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한’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부산과 목포 일대를 몇 차례 내왕한 그는 ‘국면 타개책’으로 한국 근해의 무인도 수색을 착수했다. “나는 평소부터 일본이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발전의 실마리가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는 다루이에 의하면 무인도 탐험의 목적은 “정한책(征韓策)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3년 동안의 무인도 탐험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대륙낭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와 함께 상하이에 동양학관 설립을 주도했다. 또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과 두터운 친교를 맺으면서, 그의 재기를 위한 자금 조달과 후원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일본의 ‘대륙진출’과 ‘정한’의 실현에 귀착했다. 그의 <대동합방론>도 이를 위함이었다."일본+한국=대동국 건설"...한-중 지식인들 겨냥, 한문으로 저술
<대동합방론>의 초고가 완성된 것은 1885년이지만, 출판된 것은 1893년이다. 8년이라는 공백은 다루이가 두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초고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1893년에 출판된 <대동합방론>의 특색은 초고와 달리 일본어가 아니라 한문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그가 한문을 택한 것은 처음부터 <대동합방론>의 독자를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대동합방론>은 서양세력의 아시아 진출이라는 뚜렷한 국제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고 있다. 아시아의 단결과 통합을 위하여 다루이는 구체적으로 세 단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대동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을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루이의 주요관심과 <대동합방론>의 핵심 주제는 첫 단계인 대동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동합방론>의 상당부분은 서양세력의 동양진출로 인한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쇠잔해 가고 있는 중국의 사정과 호전적인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정세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사회적으로 피폐한 한국의 현상을 그렸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은 “이름만 자주국일 뿐 오래전에 자립을 상실”했고, “나라를 부흥시킬 방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가 아닌 나라였다.
주변사정을 볼 때 그동안 한국이 의존해온 중국은 “한국을 후원할 실력을 이미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한번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면 “두 번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어렵고 동양의 폴란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에서 한국이 택할 길은 일본과 통합하는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동종동문(同種同文)의 형제와 같은 일본의 보호와 지도를 받을 때 한국은 비로소 자주성을 확립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택해야 할 길은 명확해졌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합방’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한국 침략으로 한국 내에 반일감정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한 가족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우리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지형은 입술과 이와 같고, 그 세력은 수레바퀴의 두 바퀴의 관계이고, 그 정은 형제와 같으며, 그 의리는 벗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방국의 국호를 ‘대동’이라고 함은 ‘동(東)’이라는 글자가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사용한 또 다른 국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루이는 이처럼 친근하고 대등한 합방을 논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의 한국, 합방국의 주권자로서의 일본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루이가 살펴 본 세계정세에 의하면 강대국들은 “속국(屬國)을 본토 면적의 몇 십 배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 하나의 속국도 거느리지 못하고”있었다. 구미의 여러 나라와 대등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일본도 그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결국 일본이 진출해야 할 곳은 ‘대륙’이고, 대륙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필요했다. 다루이는 “일한합동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포함한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870년대 정한론자의 논리와 다를 바 없었다.결국 한반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이고, 대등한 ‘합방’이라는 명분은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이 이 후 진행한 대륙정책은 <대동합방론>의 코스를 밟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동합방론>은 한국병탄의 ‘교본’이었고, 대륙정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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