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안중근, 이용구 등 여러지식인들이 대동합방론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하고 일본을 응원했었습니다.
손병희와 함께 문명개화운동에 앞장섰던 이용구는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에 감명받아 친일의 길을 걸으면서 손병희와 갈라섰다.
이용구가 친일의 길로 나간 이유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1893년 출간된 『대동합방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과는 반대로 아시아인의 연대를 강조했다. 덕분에 책이 출판된 후 한·중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은 러시아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다.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동아시아는 러시아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다. 위기에 대응하려면 동아시아의 황인종이 단결하여 연대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다루이 도키치는 세 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는 일본과 한국이 ‘대동(大東)’이란 합방국을 세운다. 2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동맹관계를 수립한다. 3단계는 대동국과 중국을 연합하여 남양제도를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한다. 이용구는 이 책에 감명받아 아들 이름을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라 지었다.
불행하게도 다루이 도키치의 합방론은 겉은 선린의식으로 포장되어 있으나, 내면에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비수가 숨어 있었다. 1910년 한국병합 강행 두 달 전 재출간된 『대동합방론』 서문에서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과 한국의 연합이 성취되어도 한국인은 합성국의 국가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 한국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보호 아래 두어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밝혔다.
다루이 도키치의 눈에 비친 한국은 문화는 미개하고 정치는 부패했으며 기후는 불순하고 국민은 독립심이 결여된 나라다. 이처럼 빈약한 나라라면 합병을 하지 않는 것이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루이 도키치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인들이 한국병합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다루이 도키치는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러시아 등 대륙과의 통상을 편리하게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첫째 이익이다.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체구가 장대하고 완력이 강하다. 이들을 일본식 군사제도로 훈련하고, 우리 무기로 무장시키면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두 번째 이익이다”라고 답한다.
일본에게 한국이란 대륙 진출의 통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방파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일본인들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한 이용구는 친일로 돌진하면서 손병희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1909년 12월 일진회는 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 정부가 직접 정치할 것, 통감부 폐지 등을 주장하는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용구의 소원대로 한일합방이 성사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용구에게 은사금 10만 엔을 내렸다.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s://www.pennmike.com)
그런 변명이 통하는 나라입니다.
단물에 심취해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겠죠.
미군정에는 미국에 충성
자유당시절엔 리승만에 충성
공화당시절엔 박정희에 충성
민정당시절엔 전두환에 충성
검찰정권에서는 쥴리에 충성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면
한결같이 충성할 놈들이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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