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이후, 베르샤유 조약은 독일을 짓누르고 있었으며, 독일인들은 절망에 허덕이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가 강력히 주장했던 '독일에게 굴욕을 줄 정도로 가혹할 정도의 채무'에 반대했으나
프랑스-벨기에는 채무 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 서부 최대 공업지역 루르 지역을 침공하여 강제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루르 점령'(Ruhrbesetzung) 사건이다.
1923년 3월 독일 루르, 프랑스 군의 행렬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이 프랑스 장교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다.
2년에 걸친 강제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군대는 130여 명의 독일인을 총살했다.
군대를 제한당한 독일은 변변찮은 항의를 할 수가 없었으며,
공업지대를 빼앗긴 독일은 경제적 재앙인 초인플레이션에 직면했다.
2년의 점령기간 동안 9억 달러의 차익을 남긴 프랑스 군은 25년 철수했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 때,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다.
나치 독일, 베르사유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라인란트 재무장' 선포
대독일의 통일을 외치며 오스트리아, 체코 주데텐란트 지역 합병, 폴란드 침공
이를 본 영국-프랑스-벨기에 3국 연합군 결성
영국-프랑스-벨기에 대 독일 동맹,
나치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 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 막강한 공업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들,
상대는 로마 제국 이후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인류 역사상 최강국인 대영제국과,
그 대영제국을 상대로 수백년을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 식민제국이었다. (중략) ... '
.
영국-프랑스 동맹의 선전포고에 대한 독일의 대답, 프랑스에 살포한 전단
"Nous vaincrons parce que nous sommes les plus forts"
"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선전포고, 역으로 프랑스 본토로 치고 들어가는
독일군 141개 사단의 진격속도.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 독일군 프랑스 전역 석권
덩케르크에 포위된 영국군
독일 15기갑군단 제7기갑사단 에르빈 롬멜 소장,
프랑스 최정예 제1기갑사단, 제4기갑사단 격파. 마스강 도하
'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마침내 해냈다!'
- 나치 독일 기관지 '검은 방패'의 당시 1면 헤드라인 -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의 서쪽 끝, 브리타뉴를 점령한 독일군
프랑스 수도,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군 보병사단
에펠탑에 휘날리는 나치깃발
파리 입성 선봉부대의 사열을 받으며 항복 서명장에 도착한 히틀러.
항복 서명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것과 같이,
똑같은 기차칸에서 이루어졌다.
독일군 귀국열차를 향한 환영인파
독일 장병들이 탑승한 열차가 역을 지나갈 때, 모든 일반 열차는 운행을 멈추었다.
독일 장병들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독일인들.
1940년 독일 베를린, 라디오에서 격앙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장병들이 도착했다는
긴급 보도를 송출했다. 히틀러와 귀환한 군인들을 보기위해 생업을 멈추고 몰려드는 독일인들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귀국한 히틀러 시가행진
인산인해를 이룬 베를린, 지크 하일! (승리, 만세!)을 외치는 독일인들
19 3,40년대를 관통하던 광기
베르사유조약의 내용으 조금이라도 안다면 얼마나 독일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에 처했었고 프랑스놈들이
얼마나 악랄한놈들인지 알수있음.. 도저히 나라가 발전을 할수 없게 해놓은게 베르사유 조약임...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이걸 부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걸 히틀러가 한거임..
사실 히틀러의 잘못중 가장 큰건 유대인 학살과 인종차별이었지 그외에는 기타 여러 유럽의 지도자들과 다를게 없음
난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비교하면 나폴레옹이 더 나쁜놈이라고 본다..
나폴레옹은 쿠테타로 지도자가 됐으며 스폐인 침공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고 동유럽을 침락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러시아 침공떈 자기혼자 수많은 부하들을 남겨놓고 몰래 도망쳐왔고
섬에 유배된후엔 자기가 한 약속까지 지키지 않고 다시 탈출해 자기조국을 한번더 패전국으로 만들어서
힘들게 시민들이 공화정을 만들어 놓은것을 다시 왕정으로 복귀시키게 만든게 나폴레옹임..
그에반해 히틀러는 위의 두가지 실책만 뺴면 선거로 당선되었고 종전즈음엔 후방으로 후퇴하자는 수많은 장성들의
권유에도 깔끔하게 베를린에서 자살함으로써 베를린외에 독일내부가 피해를 크게 입지 않고 종전을 맞이함..
그당싱 처칠도 수많은 인도인들을 굶겨 죽였으며 스탈린은 자국민들을 수백만명 죽였고 프랑스는 식민지
국민들에게 한짓은 히틀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으며 그외 기타 유럽의 다른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했음,.
인종차별이야 그 당시 유럽국가들이 다 똑같았고 유대인 차별은 독일뿐 아니라 그 당시 유럽전체가 차별하고
있었다고 보면됨..
일례로 독일이 프랑스나 동유럽으로 들어가니 미리 그 동네 주민들이나 사람들이 유태인들 잡아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일도 비일비재 했고 자기들이 알아서 유태인 신고하고 색출해주는 경우도 너무 많을정도로
그 당시 유태인들은 조선의 중국 왕서방처럼 고리대금업이나 포주등 주민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많이 한지라
인식이 매우 안좋은 상태였던건 전 유럽의 공통이었음...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 땅에 들어가서 하는짓만 봐도 답 나옴...
끝으로 제목이 틀린게 프랑스가 독일에다가 먼저 선전포고 한거임..독일이 한게 아니고...
쪽바리도 해봤으니 우리라고 못할건 뭐야
민간인을 강간하고 학살한걸 생각해보면
벨기에군, 프랑스 사람들 입장에서는
독일 민간인들이 저런 취급 당해도 마땅했습니다.
특히나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이 종전하는 그날까지
민간인 약탈과 폭행, 학살을 일삼았던게
독일군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 프랑스 국토와 민간인들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희생된 반면에
독일 본국과 민간인들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런 참상을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독일 본국으로 진군했던
벨기에,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멀쩡하게 잘 사는
독일 시내와 민간인들을 보면 눈 뒤집힐만도 했을겁니다.
단순히 연합군이 승자의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독일인들의 자조심이 무너지고 경제가 무너져
히틀러와 나찌 독일이 득세했다 ?
이것이야말로 나찌의 거짓 선동이죠.
인터넷 뒤져서 복사하지말고 니개념을 말해야지
배웠으면 그래야지
Nationalism is an infantile disease. It is the measles of mankind. -Albert Einstein
저기에 쪽바리 짓거리 대입해 볼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실 분들이네... ㅉㅉ
교련했잔아?? 한문가르치고 영어 가르치고
문과 때문에 나라 망할거 삼성이 일본기술자들 대려다 나라 살린거다~ 쇠깍는게 천시하고 기름 묻는걸 천시하고 먼지 먹는걸 천시하고 독일 이탈리아 엔지니어들은 컴퓨터 앞이아니라 기계조립하는 현장에있다
ㅋㅋㅋㅋㅋ
정신차려 보배충들아
복수를 극악하게 했고.. 뭐 둘이 똑같은것 같음.. 유대인들도 이상한 애들인건 확실한것같고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는 승자의 역사, 서구열강의 역사가 대부분이라 중동국가들의 고통, 한반도의 고통.. 아프리카국가들의 고통에는 둔감하고 잘 모르죠
잘봤습니다~
전쟁이 끝난후 헤게모니를 미국이 쥐면서 이후 미국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됨
히틀러가 전범이라는 사실은 부동의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시절 또는 가장 양아치스런 프랑스를 상대로 생각해 본다면
그럴만도 했다는 생각이 드는것 또한 사실.
역사의 한 페이지일뿐이지만
유태인 학살이 가장 큰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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