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인,무술인, tv토크쇼 진행자 등 활약
무술 10단의 최고기록으로 8개 단체 각 무술 10단, 총 80단을 보유한 최고의 무술 실력가로써 검증을 받았다. 여성 무술인으로서 전무후무한 세계기록이다.
첫 번째 대문에서부터 자동차로 10분을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는 김태연 회장의 캘리포니아 부촌의 대저택. 광화문 광장의 20배가 넘는 집에는 한 겨울에도 꽃이 피는 야생화 정원, 높은 천정에 햇빛이 잘 드는 거실, 수영장, 거기에 드레스룸 만해도 3개다.
김태연 라이트하우스 회장은 ‘상공인상’ 40여개 신제품 개발 공로 인정ㆍ 여성 최초의 미국 공인 태권도 10단으로서 반도체 장비회사 회장 등으로 잘 알려진 동포 여성기업인이 캘리포니아주 상공인으로 선정돼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내 1세 아시아 여성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김태연 라이트 하우스 월드와이드 솔루션(LWS) 회장이 비즈니스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스티브 어워드 대상’을 수상했다.
미국 실리콘 밸리 소재 라이트하우스 월드와이드솔루션사의 김태연 회장은 40여개의 신제품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업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캘리포니아주 상공회의소가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과 혁신적인 경영성과를 올린 기업인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세계 최고 경영인들의 권위 있는 상이다. 시상식에는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비롯해 주 상ㆍ하원의원, 기업 관계자, 50개국 총영사 등 2천여명이 참석, 수상자들을 축하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전세계 1만여명의 후보자들중 최종 10명의 후보자들 가운데 대상 수상자로 호명된 김태연 회장은 수상 후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린 뒤 수상 소감을 통해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쏟아온 게 수상 배경이 되지 않았냐”며 “앞으로도 ‘기업은 혁신으로 사회는 사랑으로’라는 마음가짐으로 활동하겠다”고 말했다.
150cm키 작은거인 김태연 회장은 그의 불행했던 기억의 아주 작은 한 토막일 뿐이다. 손자를 기대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김씨가 태어나자마자 끓이던 미역국을 솥째 마당에 엎어버렸다고 한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젖조차 물리지 않았고 조금 자랐을 때는‘태연아, 우리 양잿물 먹고 같이 죽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와의 불화로 주벽이 생긴 아버지는 급기야 그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결국 그는 23살 되던 68년 도망치듯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가 미국에 건너갔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청소 일을 하면서 일곱 살 때부터 배운 태권도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궁리 끝에 인근 학교를 찾아다니며 태권도 사범으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그는 미국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그렇게 번 돈을 밑천으로 85년 실리콘밸리에 사무실을 열어 컴퓨터 한 대를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전 재산을 쏟아부어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잠잘 곳, 먹을 것조차 없었어요. 정육점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소뼈를 고아 그 국물에 수제비를 만들어 먹곤 했죠. 하루는 정육점 주인이 ‘너희 집에 개가 많냐’고 물어보더군요. 개 사료로 쓰라고 나눠주는 뼈를 사람이 먹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렇게 힘겹게 사업을 일궈 현재 그가 운영하는 반도체공장 오염방지시스템 전문회사 ‘라이트하우스’ 라이트하우스 월드와이드 솔루션은 ‘일하기 가장 좋은 직장’(The Best Place to Work) 순위에서 1위에 올랐다. 이 조사는 직원들에 대한 기업의 각종 베네핏과 근무 환경, 급여 등 모든 조건을 점검해 등급을 매기게 된다. 김태연 회장 회사의 직원 복지와 여건 역시 기술력과 함께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김태연 회장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물어요. 성공비결이 뭐냐고. 그럼 저는 ‘왜 너는 안 달렸니?’ 하고 반문하죠. 저라고 특별한 점은 없어요. ‘Can Do.’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죠. 저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가 있느냐가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왜 너는 안 달렸니?’하는 반문은 역설적으로 그가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는 가슴 깊은 흉터였고, 응어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안 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해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1978년에는 미국여자팀을 이끌고 국제 태권도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94년에는 세계무술협회에서 여성 최초로 ‘그랜드마스터’로 인정받기도 했다. 미국 프리몬트에 ‘정수원’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며 아직도 젊은이들을 리드하고 있다.
친자녀가없는 그녀는 6남 3녀는 푸른 눈의 미국인, 흑인, 백인, 동양인,히스패닉 인종도 다양하다. 술과 마약, 폭력 등에 중독돼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아이들을 입양한 것이다. 김 회장 자신도 집안의 천대와 첫결혼 실패, 죽을고비를 넘긴 암투병까지 자신도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에 낳아준 부모조차 포기한 아이들을 모른척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나 역시 뼈 속 깊숙이 아픈 상처를 갖고 있죠. 함께 보듬으면서 살자는 생각을 했어요” 뒷골목을 배회하던 아이들은 지금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어 김 회장과 함께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저는 제 가족들로 인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멸시와 천대, 첫아이를 아들로 낳지 못한 어머니의 한,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폭력적인 전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피부색이 다른 나를 친엄마 이상으로 사랑하고 믿고 따라준 아홉명의 자식들, 그 중에서 어느 한 가족이라도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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