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꼬꼬무 보고 박열독립운동가 이분의 일대기 를 보고
제판 과정을 올림
이분을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세삼 느낌^^존경 존경
박열 독립운동가
흑도회를 결성해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향 문경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박열은 도쿄에 건너가 반제국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고,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불령사를 창립하여 항일활동에 매진했지만 간토 대지진 당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장기간 복역했다. 해방 후에는 민단 초대 단장으로 활동하다 귀국했지만 한국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의 간토 지방에 대지진이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도쿄와 요코하마 등지에서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그러자 구조활동을 위해 출동한 일본군이 경찰,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더니 급기야 잔인한 살상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폭도들은 집집마다 수색하여 조선인들을 끌어내 닥치는 대로 일본도와 죽창을 휘둘렀다. 그 결과 도쿄에서만 1,798명, 전국을 통틀어 6,618명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일본의 군관민이 합세하여 벌인 이 조선인 대학살 사태가 외국 언론들에 의해 알려지자 세계인들은 새삼 일본인들의 잔인하고 비정한 심성에 고개를 저었다. 일본 정부는 연일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지자 적화된 일본인과 조선인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궁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희생양으로 지목된 조직이 그 동안 감시하고 있던 불령사 멤버들이었다.
지진 발생 이틀 뒤인 9월 3일, 일본군 제1사단 병참 제1대대 하사관 스즈키 가메오는 도미카야에 있는 이시카와 목장의 숲속에서 박열과 후미코 등 조선인 세 사람을 보호검속 명목으로 체포하여 세타가야 경찰서에 억류했고, 그들의 집에서 각종 서적과 선전삐라 등을 압수했다. 이어서 10월 중순까지 김중한, 정태성, 장상중, 최규종, 홍진유, 니야마 하쓰요 등 불령사 멤버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입수계획을 탐지한 검사는 간토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의 빌미를 조작하려 했다. 10월 20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멤버 16명이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오사카아사히신문은 ‘진재 중의 혼란을 틈타 제도에서 대관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의 비밀결사 대검거’란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금년 가을에 있을 황태자 전하의 혼례식 때에 고관대작들이 모이는 것을 기회로 폭탄을 투척하여 암살한다는 대음모를 기도하고 동지와 함께 준비에 분주하던 일당이, 대진재가 발발하자 급히 예정을 바꾸어 도쿄에 사는 소수의 동지들과 약속하고 제국의 도시 도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대사를 결행하기로 한 사실이 발각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조선인 학살사건을 정당화하는 데 실로 안성맞춤인 기사였다. 공판 초기에 묵비권을 행사하던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 멤버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단독으로 폭탄 구입과 테러 계획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중한이 폭탄입수계획에 자신도 가담했음을 자백했고,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이 황태자의 성혼식에 맞추어 도련님께 폭탄을 헌상할 방법을 박열과 논의했다고 자백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그 결과 1925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당시 대역죄는 천황,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황태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죄목으로 대심원의 심리가 1심으로 종결되는 중죄였다
%.아래 부분의 재판 과정에서 이분의 기개 느껴 지네요% 존경 존경
마침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를 담당하는 단심의 최고특별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자 박열은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 주노라!’·‘나의 선언’·‘음모론’·‘일하지 않고 먹어치우는 자들’ 등 4편의 선언문을 발표한 다음 변호를 자임한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를 통하여 법정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인용문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 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박열이 이처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건에 여론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열의 요구사항을 들고 재판부와 담판에 나선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첫째, 둘째 조건을 제한적으로 허용 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공판 당일 조선의 혼례복 차림으로 등장한 박열은 검사와 변호사의 질문에 한국어로 대답했다.
1926년 3월 25일 대심의 마키노 재판장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형법 제73조 대역죄와 및 폭발물단속벌칙 제3조를 적용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자 박열은 미소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중얼거렸고, 가네코 후미코는 웃으면서 ‘만세’라고 소리쳤다.
사형판결이 내린 뒤 검사총장 고야마 마쓰키치는 사법대신 에기 다스쿠에게 두 사람의 사면을 요구했다. 테러의 동기가 권력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고 계획 자체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그는 가네코 후미코는 종범으로 정상참작의 여유가 있는데, 그녀만 감형한다면 조선인들의 반발이 예상되므로 주범인 박열에게도 은사를 내려 황실의 자애로움을 보여주자고 주장했다.
그해 4월 5일 두 사람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이치가야형무소장 아키야마는 박열에게 감형장을 가져다주었다. 그때 박열은 아키야마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받아두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감형장을 받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튿날인 4월 6일,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옮겨졌다.
그때부터 박열은 단식으로 자살을 기도했지만 형무소 측의 강제급식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가네코 후미코 역시 일본 정부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에 분개하면서 끊임없이 자살을 기도했다. 죽음만이 그들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 그해 7월 23일 후미코는 마닐라 삼으로 짠 노끈으로 목을 매어 목적을 달성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은 그해 11월 5일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팔령산 기슭에 묻혔다. 그러자 총독부 관리들은 역적이란 이유로 묘를 높이 쌓지 못하게 하고, 박씨 집안사람들의 성묘도 금지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되어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야당 의원들은 정부가 대역범죄자들을 우대했다며 와카쓰키 내각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로 인해 사흘 동안 의회가 정지되는 촌극을 빚어졌고, 결국 그녀의 사건을 담당했던 다테마쓰 예심판사가 법복을 벗기에 이르렀다.
1974년 북한에서 사망
1989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을 노태우 대통령 으로부터 아들이 받는다
아들도 국가를 위해 헌신
0/2000자